그러니까 이제서야 8월 9일의 이야기를 한다.

1.
그날 마로는 아침밥을 먹다가 그릇을 엎어 나에게 된통 혼났고,
계획보다 일정이 늦어져 책세상님을 못 뵈게 될까봐 조바심치고 있었고,
모처럼 제대로 된 폭염 덕분에 여러 모로 신경이 곤두섰다.
강남역에서 버스 환승하기 전에 애들을 간단히 요기시킨 뒤
정류장에 앉아 '이제 버스 타요. 1시쯤 도착할거같아요'라고
책세상님에게 문자를 보내는데 흠칫!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한손으로는 내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짚고,
다른 한 손은 내 어깨에 척 올리며,
"'도착할 것 같아요'가 맞는데"라며 몸을 숙여 말을 거셨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협심증이라 놀림받는 나는 숨막힐 정도로 놀랐고,
아주머니는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암말도 못 하자 주춤 물러서며,
그냥 틀린 거 가르쳐준 건데 뭘 그리 놀라냐며 사과를 중얼거리고 가셨다.
그날은 놀라고 말았는데 되짚어 생각하면 남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핸드폰 문자를 엿보고 참견한 건 아주머니가 잘못한 거 맞다.

2.
과학축전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무사히 책세상님을 만난 것도 반가왔고,
재밌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마로 모습도 흐뭇했다.
다음에도 또 오자는 마음이 들었기에 평가설문을 할 생각도 들었는데,
설문지를 제출하니 종이연필과 과학그림책까지 주는 게 아닌가.
그냥 주는 선물이라는 말에 감사인사를 하느라 잠깐 지체를 했나 보다.
뒤에 계시던 아저씨가 날 밀치고 설문지를 내는데,
난 그만 중심을 잃고 뒤에 있는 기둥 모서리에 꽤 세게 부딪쳤다.
순간 불쾌하여 아저씨를 빤히 쳐다봤더니
'거 미안합니다. 뒤에 기둥있는 줄 알았으면 안 밀었을 겁니다'란다.
뒤에 기둥이 있든 없든 잠깐을 못 기다리고 밀친 건 아저씨가 잘못한 거 맞다.

3.
구경 도중 해람이가 잠들어 유모차를 대여해 태우고 다녔다.
그런데 유모차를 반납할 때까지 정신없이 자고 있어 살살 흔들어 깨우는데
쿵! 어떤 아저씨의 빈 유모차가 해람이 타고 있던 유모차 뒤에 부딪쳤다.
안 그래도 잠투정하고 있던 해람이는 놀랐는지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고
그 아저씨는 '미안합니다. 빈 유모차인줄 알았어요'라며
내가 해람이 달래는 사이 먼저 유모차를 반납하고 가버렸다.
뒤쪽에서 오신 거니 앞의 유모차가 비었는지 아니었는지 안 보였을텐데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어줍잖은 변명을 한 건
그 남자가 잘못한 거 맞다. 게다가 새치기까지!



새삼 옛일을 끄집어낸 건 그 날 세 번 다 짜증이 났지만,
다른 이유로 신경이 날카로운 걸 수 있겠다 싶어 화 안 내고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아침부터 남의 실수로 불편을 겪게 되고,
남 탓하는 변명을 듣고 짜증난 얼굴과 목소리의 억지사과를 받고 나니
왜들 이러시나 싶어 해묵은 감정부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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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8-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 다 불쾌하셨겠어요. 저였다면 아마도 짜증 제대로 냈을 것 같아요.
잘 참으신 조선인님 대단하세요.^^

hnine 2009-08-2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참 잘 참으시네요. 그리고 뒷정리까지 이렇게 조목조목하시고요.
전 왜 이러질 못하는지.

Joule 2009-08-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독증이라고 해야 하나. 제가 요즘 글자를 자의적으로 조합해서 읽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요. 방금도 또 그런 일이...

그 남자가 잘못한 거 맞다. 게다가 새치기까지!

그 남자가 잘못한 거 맞다. 개...새...끼!

(.. )( '')

조선인 2009-08-2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섬님, 그 땐 참았다기 보다 화낼 타이밍을 못쳤다는 게 더 정확할 거에요.
hnine님, 아흑, 제가 속이 좁습니다. 지금까지 곱씹고 있었다는 게 증거지요. ㅠ.ㅠ
쥴님, 당신의 난독증은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지. 고마워요(?).

다락방 2009-08-2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쥴님처럼 개새끼라고 읽었어요. 저는 난독증이기도 하지만 '읽고싶은 대로' 읽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바람돌이 2009-08-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동안 저런 일이 3건이나 일어났단 말입니까? 저도 타이밍 놓쳐서 화 못낸게 아니 한마디라도 못할때가 많지만 저렇게 하루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나면 집에 가서 밤에 잠 못자고 씨근덕거릴것 같습니다. ^^;;

무해한모리군 2009-08-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 정말 놀랍군요!!
나머지는 --;;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럴까요?
화를 내셔야지요.. 너무 담담히 페이퍼를 쓰셨어욧!!!!!!

조선인 2009-08-2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읽고 싶은 대로 라니 귀여우세요. ^^
바람돌이님, 그날 저녁은 아주버님댁에서 잘 먹고 잘 놀았어요. 제가 단순해서 씨근덕거릴 새 없이 잠들었지요. 쿄쿄
휘모리님, 느끼셨겠지만 저 무지 다혈질이에요. 갈무리하지 않으면 큰일 내는 사람입니다. ㅎㅎ

水巖 2009-08-28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아줌씨는 전직이 출판사 편집부에서 교정을 보셨나보군요. 그게 몸이 배면 틀린거 보면 못 참는거라구요. ㅋㅋㅋ

같은하늘 2009-08-2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건 그렇다치고 첫번재 아주머니 시력이 아주 좋으신가봐요...
그걸 보고 참견을 하시게...>.<
그나저나 쥴님과 다락방님의 댓글을 보고 한참 웃었다는...ㅋㅋ

마냐 2009-08-2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를 참으면 병됨다. 이 간단한 원리를 우리는 애써 묻어두죠. 근데..저도 늘 화낼 타이밍을 놓치는 편이랍시고 툴툴대고, 때로는 화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고..ㅎ

조선인 2009-08-3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하긴 저도 광고전단지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교정보는 습관이 있어요.
같은하늘님,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시력도 참 좋으시지. ^^
마냐님, 병될 정도는 아니구요, 조잘조잘 옆지기에게 수다 떨고 잊어버리는 편이에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