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후기

내게 군산은 00의 고향이자 군복무지였다.
20대 초반 참 징그럽게도 붙어다녔던 남자 둘과 여자 둘.
그 중 둘은 커플이었으며, 나와 00도 두 번쯤 아슬아슬했던 적이 있었으나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꿋꿋하게 친구 사이를 지켰다.
00의 사진첩에서 본 군산은 어딘가 이국적이었고, 어딘가 몽환적이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진은 문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목공소 거리였다.
지난 토요일 비록 차창밖으로나마 그 거리를 지나치면서
참 오랜만에 00을 떠올렸고, 그가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군산의 오후는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모이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처음 간 도시에서 맛집을 모를 땐 택시를 타고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저씨, 가까운 단골 기사식당에 내려주세요."
전국 어디를 가나 기사식당은 양이 후하고, 음식이 빨리 나오고, 가격도 저렴하다.
아치님이 벌써 그 지혜를 알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웠고, 무국은 시원했다.

식사 후의 군산 트레킹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사람 보러 간다 했지만, 덕분에 군산까지 보게 되어 기뻤다.
뜬금없는 직업병(?)으로 난 지방도시 문화트레킹을 기획해 볼까 생각했고,
해박하신 순오기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얻어듣기 바빴다.
덕분에 밀물이 들어온 서해의 탁류는 1930년대의 풍경으로 고스란히 떠올랐고,
나트막한 월명산 자락에서 내려다본 바다의 반짝임은 허허로왔다.
아쉬운 건 채만식문학비가 있는 곳에 정자나 평상이 있었으면
항구를 내려다보며 두런두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텐데 하는 것이었고,
forgettable님이 가봤다는 트레킹코스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흘렀다.
금단증상에 허덕일 무렵 아치님은 우리를 맞춤하게 찻집으로 이끌었다.
전통찻집 격에 안 맞게 냉커피를 시킨 건 잘못이었지만
(순오기님의 대추차 향기는 진짜 끝내줬다, 한 입 뺐어먹고 싶었는데. 쩝)
중독자의 말로란 원래 초라한 거니까... 음... 쿨럭...
어쨌거나 카페인으로 재충전한 나는 '메데이아' 쟁취에 성공했고,
승리의 기쁨에 들떠 수다꽃을 피우는 사이 무시무시한 타임슬립을 경험했다.
분명 20-30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5시 5분 전이 바로 6시 3분으로 건너뛰고 만 것이다.
마로의 예절을 가지고 콩이니 팥이니 훈수두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난 제대로된 인사 한 자락 남기지 못하고 방방 뛰며 기차역으로 향해야 했다.

운좋게도(?) 총알택시를 탄 덕분에 기차를 놓치냐 마냐하는 스릴보다
급회전과 과속의 전율을 한껏 만끽하며 20분 거리를 11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같은 기차로 내려왔던 라주미힌님과 휘모리님은 뒤에 남아
실컷 목살 먹고 배 두들기며 느긋하게 올라가겠지 새삼 질투가 나긴 했지만
라주미힌님에게 여러 모로 콩고물을 얻은 터라 차마 댓발 내밀진 못 하겠다.
또 다른 뒷북으로 머큐리님이나 정군님과 과연 몇 마디나 나눠 봤냐는 건데,
최소한 옥찌랑 민과는 땀 흘리며 놀았으니
시간은 금이요 양손의 떡을 다 먹을 수 없다는 게 왜 격언인지 곱씹을 일이다.

이제 군산은 채만식님의 도시이고, 아치님의 도시이고, 서재인의 도시이다.
사람이 도시를 만든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시이벤트가 붐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이 의미있는 꽃이 되면 좋겠다.



뱀꼬리.
오늘 백만년만의 감각으로 00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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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ch님 이벤트, 채만식과 탁류의 군산~~
    from 엄마는 독서중 2009-08-25 07:52 
    Arch님이 군산 초청 이벤트를 한다고 할 때,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OK였다. 왜? 작년 6월 내가 광주이벤트 할 때, 시니에님(그때는 Arch 아니었음)이 왔으니까 당근 답방이다. 사람들의 도착시간이 1시쯤이라는 걸 알면서 기차 시간 다시 검색하기 싫어서 예정대로 9시에 집을 나섰다. 기다리는 시간에 책읽으면 더 좋지, 생각하며 예약주문으로 받아놓고도 읽기 겁내던 '도가니'를 가져 갔다. 28일 광주에 오는 공지영씨를 만나기 전에 봐야 하기도
 
 
바람돌이 2009-08-2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 사진이 없는 페이퍼는 무효여요. ㅎㅎ
그래도 즐거우셨겠어요. 전 오늘 개학했음다. 음~~ 그래서 기분이 좀 안좋아요. ㅎㅎ

순오기 2009-08-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벌써 올리셨군요. 군산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조선인님 사진 많이 찍으셨는데~ 어여 올려보세요.
저는 예전에 갔던 채만식 문학기행 사진 찾느라 늦어졌어요.
앨범 정리를 안했더니 수많은 사진꾸러미에서 건져올리는거 장난 아니거든요.ㅋㅋ
정미소가 아니라 미두장(미곡취인소)이요.^^

조선인 2009-08-2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제 사진기는 6월부터 밀려 있습니다. 8월까지 오려면 앞으로 두세달은 족히 걸립니다.
순오기님, 덕분에 정말 좋았어요. 최고였어요.

머큐리 2009-08-2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와 해람이는 정말 예쁘던데요,,,ㅎㅎ 조선인님의 미모를 빼어 닳았어요...^^ 제가 좀 뻘쭘한 편이라...다음 기회가 오면 많은 수다를 나눌께요...

조선인 2009-08-2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제가 순오기님 팬이다 보니, 알라딘의 귀한 남정들을 너무 등한시한 거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우리 애들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닳았다니 너무 슬퍼요. =3=3=3=3

Arch 2009-08-24 11:43   좋아요 0 | URL
닮았다는게 아닐까요, 이거 두분의 유먼데 제가 괜히 =3=3=3 히~

조선인 2009-08-24 13:12   좋아요 0 | URL
호호 아치님.

머큐리 2009-08-24 18:48   좋아요 0 | URL
'닮았다'라고 하고 싶었어요..ㅠㅠ 오타는 미모를 칭찬해도 보이는 것이군요

Arch 2009-08-2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없는 후기는 무효-2 (지는~)
조선인님 재미있어요. 사람이 도시를 만든다는 말도, 도시 이벤트란 말도, 00의 도시 군산이란 말도 다 좋아요. 조금 일찍 만나 여유있게 뵈었으면 좋았을텐데.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프레이야 2009-08-2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도시를 만든다..^^
사진도 보고 싶어요.

조선인 2009-08-2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두 달 혹은 세 달만 기다려요. 새삼 곱씹을 수 있게 해드리죠. 푸흐흐
프레이야님, 저도 사진 보고 싶어요. 이건 뭐? -.-;;

Forgettable. 2009-08-2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가 해봤다는 트레킹 코스는 무엇일까요? ^^;
마로는 왠지 어렸을 때의 절 닮은 것 같아서 예뻤어요. ㅋㅋ
전 푸르른 제주도에 잘 왔답니다- 메데이아에 드리는 글도 못써드리고ㅎㅎ 아쉬웠어요!

책갈피는 제가 아치님께 뺏어왔어요;; 잘쓸게요♡

조선인 2009-08-2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orgettable님, 책갈피 이쁘죠? 옆지기가 중국 출장 갔다오는 길에 뜬금없이 made in korea 책갈피를 사와 참 웃겼답니다. ㅋㄷ

Arch 2009-08-24 22:49   좋아요 0 | URL
옆지기님 센스쟁이~ ^^ 뽀님, 물고기 마을로 해서 월명산으로 올라가는 얘기 같은데요.

조선인 2009-08-25 08:01   좋아요 0 | URL
호호 좀 센스가 있긴 하죠. 캬캬캬

perky 2009-08-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없는 후기는 무효 3!! ㅋㅋ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네요! ^^ (아,나도 가고 싶어라~~)
저희 아빠가 맨처음 직장을 군산에서 갖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왠지 군산은 제게 친근하게 느껴져요.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저도 꼭 가보고 싶어집니다. ^^ (채만식의 도시인줄 이제야 알았어요.)

조선인 2009-08-2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님, 일본식 건물이 참 많이 남아 있어요. 일제 시대 최고의 항구 도시였거든요. 일본식 건물만 찾아다녀도 아주 재미난 이벤트가 될 거에요.

같은하늘 2009-08-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도 후기가 있네요... 부럽부럽~~~
전 군산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사연까지...^^
정말로 사진이 궁금합니다...
두세달 기다리면 정말 곱씹게 해주시는거죠? ㅎㅎ
저 사진보면 배 아프겠지만 끝까지 기다립니다...

icaru 2009-08-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 님 오랜만여요^^ 아버지 직장 따라 군산에서 태어나 세 살때까지 자랐어요. 기억에는 하나도 없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나저나 조선인 님 군복무하셨나 ...요? 00님의 군복무지라는거죵~?

조선인 2009-08-2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하늘님, 언젠가는요. 꼬옥!!!
이카루님, 하하 네 00의 군복무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