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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개인성의 존중과 전통,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일본의 집단주의적인 움직임 속의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함께 파악해야 올바른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일침을 가하는 저자는 일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무라이의 역사를 통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헤이안조 시대에 귀족들의 교토에서 세련된 문화생활을 즐기던 9-10세기, 무력의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사무라이 집단이 출현한다. 사무라이는 그들이 가진 군사 기능으로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는 직능집단이다. 이들의 출현은 그 이전부터지만 본격적인 사회조직으로 나타난 것은 11세기 정도로 본다. 고대의 왕실세력이 쇠락하면서 이들의 지위가 향상되어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되고, 본래 귀족이 소유했던 토지마저 이들의 소유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중세는 쇠락한 황실세력과 새롭게 성장한 사무라이 권력의 이중구조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12세기 후반 가마쿠라 바쿠후에서 시작하여 16세기까지 점차로 확대되어 간 일본 중세사는 사무라이의 권력과 그에 상응하는 문신 귀족의 몰락으로 특징된다. p.90』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 유독 군사적 기능을 하는 사무라이 계급의 출현이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헤이안 시대 폭력이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라 한다. 교토의 궁정 귀족은 기요메(정화)와 게가레(오염)의 문화에 취해있어, 죽음이 다가온 천황조차 격리될 정도였다. 이러한 시기는 사무라이가 무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고 지방정부와 중앙관청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므로 경제적 영향력도 커졌을 것이다.
또한 사무라이라는 계급이 중세 일본을 장악하게 된 것은 그들의 뛰어난 연대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무라이 주군-신하 관계는 충성심이 희박한 궁정 사회와는 차이가 있었다. 사무라이 정권 자체의 특징에 따라 지방 분권적인 요소가 많은데, 이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연대로써 충의의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것이다. 충의의 이데올로기는 명예라는 요소와 맞물리게 된다.
가마쿠라 바쿠후 시대부터 ‘세켄’, 즉 사무라이 세계에서 좋은 평판을 취하는 것이 가신인 무사들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 요소가 된다. 이는 주군들에게 좋은 평판을 획득하는 자기규제를 강요하게 된다. 자신의 평판 특히 무사로서의 명예를 위해서는 생명마저 거는 사무라이의 심리적 성향은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싸우기도 했지만, 개인의 명예를 드러내기를 더 좋아했다. 격렬한 전투는 명예를 드러내기에 맞춤인 장소였다. 세습적이긴 했으나 안정적인 지위가 될 수 없었던 사무라이들은 끊임없이 실력을 증명해야만 했고, 이러한 무사계급의 오랜 지배는 일본문화의 개인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측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사라는 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집단주의라는 특징으로만 이해해온 나로서는 새로운 시각의 발견이었다. 이는 일본의 현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중요자료가 될 것이다.
무로마치 바쿠후가 시작 되면서부터 한 명의 권위자를 따르던 단결된 사회적 상하관계는 좀 더 느슨한 형태가 된다. 이는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에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더 짙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다이고 천황의 몰락(1338년)과 함께 조정의 실추는 표면적으로는 사무라이 계급의 승리처럼 보일지 모르나, 토지소유를 법률적 구조로 인정해주는 조직의 와해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무라이 계급의 토지소유의 부정으로까지 나타날 수 있는 위험상황이기 때문에 권리 쟁취를 위한 공격적 성향이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사무라이의 각 ‘이에’는 독점적인 토지소유권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된다. 일본의 전국 시대라 불리 우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해 농민들의 저항이 집단적으로까지 성장하게 되면서 토지에 대한 징세의 문제까지 겹치게 된다. 농민들의 집단은 때로 영주를 바꾸는 일로 나타나게 되는데 토지를 둘러싼 끊임없는 경쟁이 심화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때에 힘을 얻게 되는 세력이 ‘센고쿠다이묘’로 약체가 된 중앙권력에서 떨어져 나와 현지 사무라이를 스스로의 군사력 아래 피라미드형으로 재편성함으로써 지역의 정치적 조직체로서 자립해 나아간다. 이들은 부유한 농민들을 자신의 조직 안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자율성을 박탈하고 군사적인 봉사의무까지 장악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시기 부대의 전술적인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는 전쟁의 성격 변화는 사무라이를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으로 변화시킨다. 명예로운 죽음의 방법으로써 할복자살이 이전의 자율적인 모습에서 제도화된 측면으로 변화 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6세기 말 전국 시대를 통합하여 혼란스러운 내전이 종식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곧 도쿠가와 바쿠후가 전국을 제압하고 ‘오코기’(위대한 공적 권위)에 선다. 좀 더 확실한 제압을 위해 사적인 분쟁해결은 물론이고 비사무라이에 의한 무장을 일체 금지한다. 이른 바 ‘칼 사냥’은 강력한 사회 통제 수단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로써 사무라이라는 계급은 전국 시대에 혼란과 살상을 야기했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써 인정받게 된다. 명예를 가질 수 있는 공식적인 계급으로써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의 특징을 요약해 본다면 군신제도를 수직적으로 재편함으로써 국가를 통일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후에 나타나게 될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상업의 발전으로 인해 사무라이 본연의 정체성에 관한 혼돈이 나타나게 된다는 특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의 순응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가져오게 된다. 우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제도가 정한 역할이나 책임과 조화하도록 하는 정신풍토가 확립된다. 또한 도쿠가와 사무라이들에게 명예형 정서의 가장 역동적인 부분인 자율성을 향한 열망을 품게 한다. 이는 국가의 위기상황에 연대를 이끌어내게 하는 국면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비록 머리가 잘리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인 면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둘은 현대의 일본 문화에서 나타나는 집단주의적인 경향과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로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쿠가와 시기에 나타난 이러한 양상은 일본 문화의 큰 줄기로써 기능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분량을 들여 이에 대한 설명을 다루고 있다.
힘겨운 책읽기가 되었다. 그동안 현대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읽기 시작했기에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책의 양이 워낙에 방대하고 심오해서 쉬이 읽히지 않는 책이었던 이유 때문이다. 인내를 발휘하여 읽기를 반복한 끝에 사무라이의 변천에 관한 저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흥미 있게 바라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덕분에 일본 문화의 저변에 있는 사무라이 역사, 그리고 아직도 남아 활약하고 있는 사무라이 정체성에 대해 조금 다가설 수 있었다. 일본의 현재를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