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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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회과학 혹은 인문관련 서적에서 사회비판적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회를 바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감이 오고 있을 정도로 더딘 과정이기도 했다.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는 안내를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었는데 이 책도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사회비판적 서적을 읽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던 이유에는 이 책에 나와 있듯이 진실을 왜곡하고 현상을 주관적으로 잣대 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신문보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보수신문의 하나를 구독하면서 정기구독이 끝나갈 무렵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간지는 그대로 대신에 주간지는 진보적인 매체로 따로 구독하게 되면서 나의 신문읽기가 그동안 얼마나 편향되어 있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늘어갔고 이 책을 통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모르고 있어 죄가 되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알아가면서 부딪히는 좌절감이 커 갈수록 앎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가듯이 이제는 더욱 잘 알아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희망도 싹 틔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책읽기는 그 결실과도 같았다.




이 책은 1권에 이어 신문읽기의 혁명이라는 고갱이를 담고 있다. 신문읽기는 이해가 잘 될 터이지만 혁명이라니? 민주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민주시민으로써 신문읽기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여정은 과히 혁명의 과정이라 불리 울 만큼 어렵고, 어렵지만 그 길을 통해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민혁명으로 되찾은 민주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는 세상을 바르고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창 그 언론의 주권을 되찾는 신문읽기의 혁명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보수언론에서 주창하듯 잃어버린 10년은 과연 옳은 표현일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은 보수언론의 편집논리에 발맞추어 나아갔음을 관련 정책으로 제시하고 진보정권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통해 그 논리마저 진실이 아님을 지적한다. 노무현 정권은 보수언론과의 감정적 대치를 보이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논리와 같았음을 지적하면서 집권 후반기 국론 분열은 오히려 감정적 대치의 결과였음을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들 그리고 개혁적 성향의 네티즌의 정파적 신문읽기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꼬집는다. 정파적 신문읽기는 이후 이명박 정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오고 있고 정책을 보지 않고 정치적 성향 혹은 정치적 인물에 대한 평가로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을 불러오고 말았다. 더 큰 분열의 조짐은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정파적 신문읽기의 ‘함정’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신문읽기의 혁명 그 첫 번째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구체적인 의문이 생긴다. 책은 차례대로 그 과정을 짚어주고 있기 때문에 따로 정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목요연하다. ‘경제면 넘어 경제 읽기’에서는 정치사회면 기사와 경제기사를 분리시키는 편집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 삶을 틀 지우는 경제를 정치와 별개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신문읽기의 문제점을 부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보수언론의 편집논리가 숨겨져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문의 탄생과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할 매체를 찾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신문은 자본가들의 논리를 반영하는 통로가 되어 왕과 귀족을 압박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자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가들을 압박하고자 하였지만 자본력이 부족한 그들의 민중언론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이 행한 조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민중언론을 약화하고자 하는 방안은 신문구독료 인하와 신문광고를 통한 통제였다. 몇 년 전부터 대기업 삼성은 진보신문에 광고를 싣지 않고 있고 얼마 전 주간지 한겨레에서는 진보언론의 미래를 고민하며 진보언론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구독료 인상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라고 지적한 바 있음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이 중산층을 겨냥해 기득권 유지를 위한 기사들을 쓰고 있는 이유는 신문사 자체도 대기업의 하나이고 그들의 고객 또한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파적 신문을 넘어선 품격 있는 신문읽기도 필요하다. 신문의 품격을 판단하는 잣대 진실, 공정, 사랑을 알면 그 해답이 보일 것이다. 진실을 왜곡한 신문은 독이든 사과를 건네는 마녀와 같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건네 오는 신문이라는 사과에 독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녀’는 일반 독자들이 신문지면에서 찾기 어려울 만큼 깊숙이 똬리 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특권이나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때로는 ‘거친 색깔공세’로, 때로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로 민심을 호도하고 있기에 더 그렇다.p.119” 진실을 왜곡하는 신문은 결국 공정을 해친다. 공정을 잃은 신문내용을 보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보수언론의 논리로 변질되어 갈 수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편협적인 사랑이 아닌 정파를 뛰어넘은 인간애 동시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유의하고 지켜볼 때 신문의 품격은 되살아 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제는 신문을 더욱 깊이 있게 읽을 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계로 돌입한다. 신문 속에 숨어있는 논리를 파헤치고 우리 모두에게 유의미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세계화, 민중, 이해관계라는 핵심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세계화라는 논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인데 이에 관한 책으로 88만원 세대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있으니 이를 통해 보충해 두어도 좋다. 결국 그들의 자유란 특정계급의 자유일 뿐이라는 설명에 눈이 닿는다. 세계적으로 퇴조하고 있는 이 논리가 대다수 국민의 요구를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보수언론의 논리가 숨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중에 대한 보수언론의 시각은 더욱 파괴적이다. 민중배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논리는 세계 노동자들의 요구를 싣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파업과정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것을 통해 확실시 된다. 이를 읽는 대다수 민중의 시각은 노동자들에게 차갑기만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중은 다름 아닌 신문 독자 자신이다. 스스로 민중이면서도 민중이란 말을 낯설게 여기는 현실은 신문의 여론 지배력에서 비롯한다. p.20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일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이 민중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짚어둔다.




위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혹자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신문을 보아야 하는가? 이런 논리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왜곡된 기사를 근절하고 바른 사회의 지평을 열어갈 참 언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자 신문의 갈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세력은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의 혁명으로 많은 이들의 의견이 개진되고 보수언론의 논리가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곳곳에는 어려움이 남아 있다. 민중의 요구를 반영하는 통로로써의 언론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기득권자들의 논리가 담긴 신문을 대다수 민중의 요구로 채우는 신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노력뿐이라는 공감이 필요하다. 그 공감을 만들어줄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 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읽기는 예술이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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