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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6:7-13 둘씩 보내시며 

서론
멘토링 전문가인 팀 엘모어 박사는 [위대한 멘토들]에서 학습 방법에는 그리스식 모델과 히브리식 모델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식 모델은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들이 듣는 교실형 모델인데 정보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입니다.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듣죠./ 히브리식 모델은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주고 학생들이 따라해 보는 코치형 모델인데 현장 훈련을 중요시합니다. 학생들은 능동적으로 참여하죠.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하는 그리스식 모델이 수월하겠지만 학생들은 현장을 경험하는 히브리식 모델이 효과적이라고 합니다.(13쪽) 

본문 접근
오늘 본문은 히브리식 모델의 전형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23절과 9장 35절을 통해 회당에서 가르치시며(Teaching),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Preaching),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Healing). 예수님은 시범을 보여주시고 나서 열두 제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쳐보라고 내보내셨습니다.

주제의 정의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어떤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왜 자세가 중요할까요?

주제의 필요성
운동선수들은 기본기를 튼튼하고 배우고 나서 그 기초 위에 기술을 배운다고 합니다. 훌륭한 선수(Excellent athlete)는 기본기(basics)가 탄탄한 선수(athlete)입니다. 기본기(basics)가 없이는 참된 진보(progress)가 불가능(impossibility)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전도의 기본기를 배우고 나서 전도 현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도해야 할까요?

실천 방법론
첫째, 협력해서 전도해야 합니다.(막6:7)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실 때도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눅10:1) 왜 둘씩 보냈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였습니다.(신17:6) 한 명은 증인으로 성립되지 않았고 두 명이라야 증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둘씩 다니면 힘들 때는 서로 격려해주고 어려울 때는 서로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앞의 문맥(막6:1-6)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시고, 뒤의 문맥(막6:14-29)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헤롯왕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전후 문맥을 보면 제자들이 전도할 때에 박해가 닥칠 것을 암시합니다. 둘씩 짝지어 갔기 때문에 핍박을 받더라도 나누게 되니 절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이 오면 더하게 되니 두 배로 늘어납니다. 두 사람이 전도할 때 한 사람은 전도하고 또 한 사람은 기도하고 이렇게 협력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8장 28절을 통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길 바라십니다.

둘째,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도해야 합니다.(막6:8-9)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걸을 때 쓰는 지팡이와 신고 다니는 신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행을 다닐 때 짚고 다니는 지팡이와, 도중에 먹는 양식과 물건을 담는 배낭과, 돈을 넣는 전대와, 발을 보호하는 신발과, 밤에 덮는 두벌 옷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도하는 게 너무나 시급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준비물만을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져간 게 없으니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주셨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만나를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알맞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셨습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 공궤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올리브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을 통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하는데 전념한다면 생활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물을 퍼내도 새로 솟아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쓰더라도 통장의 잔고를 채워주십니다.

셋째, 지혜롭게 전도해야 합니다.(막6:10-11)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을 영접하면 거기를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들어가서 유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세 명을 환대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창18:1-1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롯도 나그네 두 명을 환대했는데 그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창19:1-22)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고 롯의 가족을 피신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크리스틴 폴 교수는 [손 대접]에서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손 대접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중심이었으나 오늘날은 많이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루속히 회복해야 할 전통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빈손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합당한 사람들을 통해 숙식을 제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논쟁하지 말고 거기를 나가면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맨발에 신발(샌들)을 신다보니 먼지가 많이 묻었습니다.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상징행동이었습니다. 이방인처럼 취급하겠다는 모욕이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면 모든 책임은 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실천 결과
12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막6:12) 세례자 요한도(막1:4), 예수님도 회개하라(막1:15)고 설교했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설교도 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막6:7) 제자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막6:13) 유대인들은 올리브기름을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나가면 마귀는 굴복하게 됩니다.

결론
윌리엄 부스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는데, 한번은 술에 취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빈정거리면서 “여보시오, 내가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신처럼 이렇게 소극적으로 전도하지는 않겠소. 나라면 더 열정적으로 전도할거란 말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윌리암 부스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윌리암 부스는 그 사람 말대로 더 열정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구세군을 창설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세상에 위축돼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전도현장으로 내보낼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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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35-43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액션 배우로 잘 알려진 아놀드 슈월츠 제너거가 주연한 [주니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남자, 그것도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가 여자의 전유물인 임신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남자가 임신을 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해마입니다. 해마 수컷은 육아 주머니가 있는데 암컷은 그 속에다 알을 낳습니다. 그 속에서 수정된 새끼들은 아빠 해마의 육아 주머니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먹고 자랍니다. 새끼들이 자라는 동안 아빠 해마의 배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2주 정도가 지나면 아빠 해마는 새끼들을 부화합니다. 해마는 수컷이 암컷의 출산을 일부분 담당하는데 엄마 해마는 산란을 하고 아빠 해마는 산출을 합니다. 해마는 부성애가 강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갔다.
해마처럼 부성애가 강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회당 장 ‘야이로’이었습니다.(막5:22)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랍비의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회당은 마을 사람들의 구심점이었고, 회당 장은 이런 회당을 관리하고 감독하였습니다.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원로로 존경을 받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어린 딸을 간병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12살 밖에 안 된 어린 딸이(막5:42) 그것도 외동딸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눅8:42)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모셔봤지만 어떤 의사도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여봤지만 어떤 약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딸은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야이로는 딸을 그냥 죽게 둘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리고 싶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야이로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춰왔습니다. 병든 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시는 예수님이 야이로가 사는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라면 죽어가는 딸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야이로는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야이로가 딸을 고치기 위해 사회적인 지위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갔듯이 우리도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으면 장애물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갔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막5:22-23)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야이로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았지만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야이로는 겸손하였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면 죽어가는 딸이 살아난다고 고백했습니다. 야이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뜨거운 부성애를 보시고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는 동안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병이 나으면서 시간을 지체하였습니다. 야이로는 애가 탔습니다. 딸이 죽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났습니다. 야이로가 집 근처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했습니다.(막5:35)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사람들은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은 필요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는 고칠지 몰라도 죽은 자는 어쩔 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온 몸에 힘이 쫙 빠졌습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막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흔들리지 말라고 야이로를 격려하셨습니다. 야이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돌려보내라고 말하고, 현실적으로 그 말이 옳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시고.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어야 했습니다. 어려웠습니다. 야이로는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할지 아니면 예수님을 모시고 갈지를 망설였습니다. 야이로는 이왕 믿은 예수님을 끝까지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박필 목사님은 말이 기적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명령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란 성냥갑에 사람의 믿음이란 성냥개비를 그을 때 일어납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지면에 있는 양전하와 구름에 있는 음전하가 만나야 번개가 치듯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람의 믿음이 결합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하나님은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두셨는데 사람이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제목이 있어 예수님께 찾아갔으면 너무도 그럴싸한 시험이 찾아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마귀는 자꾸만 파도를 보게 하지만 물 위를 걸으려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비가 온 후에 땅이 다져지듯이 시험을 이겨내야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야이로가 끝까지 믿음을 가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은 벌써부터 장례식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상가에는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여자들로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나무라셨습니다.(막5:39)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예수님은 아이가 잔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합니다. 잠자는 사람이 다시 일어나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아니 내쫓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세 제자를 데리시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만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기 위해 손을 잡으시고 힘차게 선포하셨습니다. “달리다 굼” 달리다 굼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입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소녀는 잠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가볍게 일어나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힘차게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자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막5:43a)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에 관심을 갖기보다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막5:43b) 예수님은 아이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시면서 예수님도 다시 살아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예수님께 나아가고, 기도했으면 어떠한 시험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기적을 보았으면 기적을 자랑하지 말고 그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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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35-41 바람을 꾸짖으시며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다
우리는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울릉도로 교역자 부부 수양회를 다녀옵니다.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톤수는 2,394톤이요 정원은 920명인 ‘썬플라워호’를 타고 소요시간ㄹ; 3시간이 걸리는 울릉도 도동항을 향해 출항합니다. 여객선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푸른 물살을 힘차게 가릅니다. 하얀 갈매기들이 날갯짓을 하며 푸른 물결 위를 넘실거립니다. 우리는 갑판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잔잔하고 우리가 탄 배는 내 집같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혹시 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거칠어지고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리며 뱃멀미가 납니다.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순풍이 불어와 순조로울 때도 있고 태풍이 불어와 위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순풍을 만나기도 하였고 태풍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태풍을 만나 위태로울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가장 긴 길이는 21키로 미터이고 가장 넓은 너비는 13키로 미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시자마자 고물(선미)에 베개를 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순풍을 만나 순조롭게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으나 해가 지면서 차가운 바람으로 바뀌면서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은 주로 오후 4-5시에 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녁이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해 어부들이 고기잡이에 나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설사 풍랑이 일어난다 해도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라 대처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사나운 바람으로 돌변했습니다. 우리가 탈 배는 운동장처럼 크다보니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하지 않으나 제자들이 탄 배는 양호실처럼 작다보니 낙엽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이번에는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제자들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은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풍랑에 대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돛을 접어도 배는 바람에 흔들렸고 닻을 내려도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배는 바람에 뒤집히든지 파도에 깨지든지 아니면 차오르는 물에 잠기든지 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은 풍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 예수님도 타고 있다.
제자들은 그제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풍랑을 극복하려고 할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야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파도가 얼굴을 때려도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웠습니다.(막4:38)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신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모른 체 하실 수 있냐며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배 안으로 들어오는 물부터 퍼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4:39)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듯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1:25,3:12).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바람이 가라앉자 물결도 잔잔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고 동쪽의 광야에서 목축을 하는 광야 민족이라 바다를 막연히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에스키모 인들은 눈이 많이 오다 보니 눈이라는 단어가 15개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이 많다 보니 광야라는 단어가 7개가 있었는데, 바다가 없다보니 ‘얌’이란 단어 하나로 바다와 호수와 대양을 모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바다에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나무라셨습니다.(막4:3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무서운 바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놀라워하였으나 예수님은 아직까지도 믿음이 자라지 않은 제자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도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쉽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배를 교회로 생각했고 사나운 바람과 거센 물결을 교회에 닥친 시험과 환란으로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탔지만 풍랑이 일어나 위기에 빠졌듯이 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살지만 시험과 환란이 닥쳐와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에도 풍랑이 불어와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사장으로 모신 직장에도 풍랑이 불어와 파산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담임목사로 모신 교회에도 풍랑이 불어와 분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모셨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과 모시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닻을 내렸듯이 사람의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 도달하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봤듯이 그제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듯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호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찾아가 애원하는 것은 굳게 잠긴 문을 다른 키로 열려는 것과 같습니다. 문이 안 열립니다. 제키라야 열립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야 깜깜한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듯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위기에서 극복해 주십니다. 반드시 극복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탄 배에는 예수님도 타고 계십니다. 멀리가지 마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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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26-34 씨를 뿌림과 같으니


이현주 목사님이 지은 [밥을 먹는 자식에게]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이현주 목사님의 시처럼 쌀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기나긴 시간과 수많은 수고를 거쳐야 합니다. 옛 사람들은 쌀 미(米)자를 가르칠 때 八十八 (팔십팔/88)자가 합쳐져서 쌀 미자가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쌀이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88번의 손길을 거쳤으니 소중하고 감사하게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6) 씨 중에서도 겨자씨 하나(막4:31)를 뿌림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실제로는 난초씨가 가장 작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작은 씨로 알려진 겨자씨처럼 아주 작게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하려면 씨가 작더라도 땅에 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밭에 씨를 뿌릴 때 땅 속에 돌이 많다 보니 가래질을 하지 않고 나귀의 등 위에 씨앗 자루를 실고 구멍을 내어 씨를 뿌렸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내기를 할 때 씨앗(종자)을 소금물에 담가 소독하고 불린 다음 요즘에는 고운 흙을 넣은 모판에 뿌리고 논 한쪽에 물을 대주어 그 위에 올려놓고 비닐하우스로 덮어줍니다. 모가 싹이 트면 찬 공기에 적응하는 기간을 갖기 위해 점차적으로 비닐하우스를 걷어 주고 어느 정도 자라면 이양기로 모내기를 합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줄을 맞추는데 통풍이 잘돼야 병충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모내기를 하기 전에 논에 밑거름을 주고 모내기를 하고 나서 적당하게 물을 대주고 모가 논에 뿌리를 내리면 웃거름을 주고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끔씩 농약을 쳐줍니다. 그러면 모가 잘 자랍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면 농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7) 씨가 자라는 과정이 신비롭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모를 심고 물을 대주고 거름을 주면 모가 자라서 벼가 되고 벼 속에서 목이 올라오면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태풍이 불어오면 벼가 수정이 안 돼 쭉정이가 됩니다. 사람이 지하수를 끌어와 물을 대주고 농약을 뿌려 병충해를 예방해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태풍을 막아 주시지 않으면 벼가 수정을 할 수 없고 햇빛을 적당하게 비춰주시지 않으면 벼가 토실토실하게 여물 수 없습니다. 농사도 사람이 짓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지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씨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복음을 가리킵니다. 농부는 씨가 작더라도 뿌려야 하듯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천국 시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트듯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신앙의 싹이 트게 됩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싹이 트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신비롭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너무 속을 썩이다 보니 마음을 잡으라고 교회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목을 매려다가 전도하러 온 교인이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느냐 안 전하느냐 이지 복음을 영접하고 거부하고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내심을 받아야 전파하고 전파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였습니다.(롬10:13-15) 사람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야 가문이 계승되듯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면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세상의 모든 풀보다 커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32) 겨자씨는 보통 1,2미터까지 자라는데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3미터까지도 자라고 어떤 것은 4,5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강가에 가보니 가느다란 갈대에 참새가 머물었는데 공중의 새들이 가느다란 겨자초 가지의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씨는 작지만 뿌리고 뿌리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자라면 엄청나게 커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욥기 8장 7절을 통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대단해 질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도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지금은 창대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12제자를 남기셨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2제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개신교인만 8억 명이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전체인구의 20%가 조금 안 돼는 9백만 명 정도가 개신교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았는데 겨자초처럼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자라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9) 하나님은 요엘서 3장 13절을  통해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낫으로 벼를 벴지만 요즘은 콤바인으로 벼를 벱니다. 농부는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여가면 논에 물을 빼고 콤바인이 들어갈 수 있도록 논바닥을 말립니다. 성경에서 추수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고 말씀합니다. 농부가 도끼질을 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농부의 아내가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웁니다.(지옥, 마3:10-13) 지금은 영적으로 추수 때입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심판 날은 가까웠는데 전도자는 적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마9:37-38) 우리는 추수할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농부처럼 씨가 작더라도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전도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싹이 트게 하십니다. 복음이 마음의 밭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것도 놀랍게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또 전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고구마 한 뿌리를 캐면 여러 뿌리가 나오듯이 연쇄적으로 확장돼 갑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겨자씨처럼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씨를 뿌린다면 가장 작은 겨자씨가 가장 큰 겨자초로 자라듯이 개척교회인 우리교회가 포항에서 제일가는 감리교회로 성장할 겁니다.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은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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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1-17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바리새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재판을 담당했습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걸로 보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명망 높은 공회원이었고 예수님은 시골 출신의 순회설교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밤중에 찾아온 걸로 보아 그의 영적인 상태가 어두웠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체 높은 공회원이었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요3:2)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니 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니고데모가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은 그의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랍비 그 이상인데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알았습니다.(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적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분이 궁금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시지 않고 새로운 출생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2: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라서 바리새인이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는 게 아니라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지 유대 민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아래로 태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거듭나야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알려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요3:4)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는 거듭남을 육체적으로 한 번 더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요3:5-8)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을 각각 따로따로로 보면 물은 육체적인 탄생을 성령은 영적인 탄생을 의미하고, 물 즉 성령을 하나로 보면 성령으로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6절과 8절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사람을 만들지만 성령님은 사람을 교인으로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는 육체적인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이라는 모태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불 때 소리는 들려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모르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거듭나는 것도 신비로운 과정으로 결과를 통해서 식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바람이 부니 나뭇잎이 흔들렸고 성령님을 만나니 사람이 변했다고 알 뿐입니다. 그가 놀라워하였습니다.(요3:9)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는 영적인 출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지만 거듭남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땅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요3:10-12)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그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설교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자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땅의 일 다시 말해 바람이 어디서 불며 어디로 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 다시 말해 예수님의 대속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하늘의 일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도 하늘의 일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가 잘 아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습니다.(요3:13-17)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 하늘의 일을 말씀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실 겁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유랑하고 있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반역하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민21:4-9) 백성들이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대 위에 놋뱀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자 살아났습니다. 하늘의 일은 이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불뱀에 물렸더라도 놋뱀을 보면 살듯이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값비싼 선물을 주어도 아깝지 않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을 희생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아드님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맞아들이는 겁니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의 왕좌를 예수님에게 넘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요16:9) 우리가 믿지 않고 거부한다면 놋뱀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죽듯이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영접하면 영생하게 됩니다.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살듯이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아드님을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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