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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36-49 너희는 증인이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리 없다. 

하나님은 베드로 후서 3장 8절을 통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루가 천 년처럼 길고 천 년이 하루처럼 짧다는 말이죠.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하루처럼 짧다고) 생각했으나 자꾸만 지연되자(천 년처럼 길어지자) 예수님의 재림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보기에 길게 보여도-재림이 늦어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짧다고-금방 재림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보낸 3년간은 화살이 날아가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으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간은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더디게 지나갔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죽으신지 사흘째 되는 날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새벽이 되자 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른다고 나가더니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더라고 알렸습니다.(눅24:6) 사도들은 여 제자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고 시신은 없고 피에 젖은 세마포만 있더라며 이 어찌된 일이냐고 놀라워했습니다.(눅24:12)/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자신들의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향후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사람 유다는 이미 목 메달아 죽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제자들은 하나 둘씩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들은 밤이 깊도록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다며 흥분해서 돌아왔습니다. 사도들은 새벽에는 여 제자들이 헛소리를 하더니 밤이 되자 베드로까지 미쳤다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엠마오 마을로 떠났던 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을 길에서 만났고 예수님과 식사까지 했다며 기뻐 날뛰었습니다.(눅24:35) 사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마 귀신을 본 모양이라며 흘러 넘겼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한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또 한쪽은 아니다 귀신을 보았다며 옥신각신 다투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눅24:36) 문이 잠겨있었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인사법을 따라 그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기도 했고 행여 귀신은 아닌 가 싶어 무섭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눅24:38-39)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은 손과 발의 못자 국을 보여주었습니다. 귀신이라면 그림자만 있을 텐데 예수님은 살과 뼈도 있었고 못자 국도 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너무 기쁘기도 하였고 아직도 귀신은 아닌 가 의심을 떨쳐버리지도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찾으셨습니다.(눅24:41b)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그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고 예수님은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귀신이라면 음식을 먹을 리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 서신 분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인사도 하셨고,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도 보여 주셨고, 음식도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신 겁니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쳐 주시다.  

예수님은 살아계셨을 때에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자 다시 한 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또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서 18장 15절부터 20절까지는 선지자로서의 메시야의 역할이 기록되었고,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이 기록되었고, 시편 16편 9절부터 11절과 이사야서 53장 10절부터 11절까지는 메시야의 부활이 기록되었고, 이사야서 42장 6절과 49장 6절과 60장 3절에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닫혔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바로 그 메시야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설교학자인 토마스 롱 교수는 설교자는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알라딘 닉네임은 위트니스입니다. Preacher is Witness. 우리는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냥 증언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성령님은 그들이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입니다. 시동이 걸려야 차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키는 전기입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청소기가 작동합니다. 성령님은 풍력발전소를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야 전기를 생산합니다. 성령님은 수력발전소를 가동시키는 물입니다. 물이 강력하게 떨어져야 전기가 발생합니다. 성령님은 태양력발전소를 작동시키는 햇빛입니다. 햇빛이 강렬하게 비춰야 전기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셔야 허울뿐인 교인이 거듭난 교인으로 변화됩니다. 성령님은 교회 마당만 밟는 교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임하셔야 능력을 받고 지금 있는 자리부터 시작해 지구촌 전체까지 나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행2:1-4) 성령님은 지금도 오십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받아야 그들처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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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24-29 나의 주님이시요

최근 강원지역에서 열흘 사이에 3건이나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해 남녀 11명이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서로 주소가 다른 사람들이, 렌터카를 빌려 강원도로 이동해, 연탄불을 피우고 출입문과 창문 틈을 테이프로 밀폐하고,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찰은 자살한 사람들이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만났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 2009년 4월 17일) 자살한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인 요인이나, 심리적인 내면적인 이유나, 발달심리학적 특성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자살합니다.(이슈 & 논술 2.0 293호 인문계 31쪽)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이 자살의 주원인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인데 우울증 환자들은 겨울을 전후해 자살을 많이 시도한다고 합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여자가 남자보다 4배나 더 시도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4배나 더 죽는다고 합니다. 자살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4위입니다. 2007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했습니다. 감기가 누구나 걸리듯이 크리스천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자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토마스)가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미국의 가정 의학 전문의 돈 콜버트 박사는 [감정치유]에서 우울증은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몇 주 동안 우울증 증상이 다섯 가지 이상 나타나면 우울증이고 두세 가지 나타나면 정서장애라고 합니다. 여러분 슬프고 행복하지 않으며 기분이 낙담되었습니까? 체중이나 식욕이 심하게 감소되었습니까?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까? 수면태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잠을 못자거나 잠에 빠졌습니까?) 만성적인 피로로 고생합니까? 집중력이 저하되었습니까? 움직임이 둔해졌습니까? 쉽게 흥분합니까? 회의주의에 빠졌습니까? 자살충동을 느낍니까? 도마는 우울증 중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았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조울증에 빠졌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청룡열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땅 밑으로 내려갔다 하듯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빠졌다 하는 증상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백성들에게는 선지자라고 지지를 받았으나 남부인 예루살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으로 견제를 받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킬까봐 미리부터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 즈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이 깨우러 가겠다고 나서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다며 앞장섰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들뜨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을 통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장소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인격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처는 하늘나라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장소도 알 수 없고 어느 길로 가시는지 방향도 알 수 없다고 침울해졌습니다. 도마는 널뛰기를 하듯이 기분이 상승하기도 했고 하강하기도 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갑자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29절을 통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사람 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목을 매 자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봐 문을 닫아걸고 숨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시고, 유령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슬픔에 잠겨 바람을 쐬고 돌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도저히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부인했습니다. 도마는 회의주의에 빠졌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인 사고가 마음에 가득 차서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가락을 내밀어 손에 넣어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우울증 환자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는 낙담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역은 힘들고 목숨은 위태하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서 떡과 물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통해 시편 기자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찬송하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죽고 싶다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던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반복하던 도마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마드라스 근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만든 접시에서 불 고문을 당한 후에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졌으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도마의 허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도마가 순교한 산은 지금 성 도마 산으로 불립니다. 인도 첸나이 공항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그 산 입구에 성 도마 순교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 내부는 천장은 아치형으로 생겼고 벽에는 12제자의 순교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앞에는 도마가 만든 돌 십자가상이 있고 그 옆에 도마의 뼛조각이 액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 도마 순교 기념 교회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성 도마 무덤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당입니다. 성당은 흰색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지하에 도마의 관과 뼛조각이 놓여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가야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알려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울증에 빠져 기분이 침울해 있습니까?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십니까?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라고 말합니다. 교인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낙심한 마음에 희망의 해가 솟아오릅니다. 불안한 마음에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슬픈 마음에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들여옵니다. 우리 다함께 시편 42편 5절을 읽어봅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 교인들도 혹시 우울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난다면 한숨소리가 찬송소리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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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18 내가 주를 보았다.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수월하겠지만 여자인 마리아에게 알려준다면 다른 제자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집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지만 수제자인 베드로가 아니라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볼까요? 하나님은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을 통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말씀합니다.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와 함께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을 통해 예수님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8장 3절을 통해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교회를 다녔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봉사를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자 제자였습니다. 여자 제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56절을 통해 예수님에게는 남자 제자가 12 명이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여자 제자들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릴 때 자신들도 뼛조각이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울 때 자신들도 머리에 굵은 가시가 박히는 쓰라림을 받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 넘어지실 때 자신들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드는 고통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망치질을 할 때 자신들도 팔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끔찍함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자신들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충격을 겪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 자신들도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때에 자신들도 돌무덤에 매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통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장례식도 치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일 장을 치르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장례식을 급하게 치르느라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지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무덤 문(돌문)을 어떻게 굴릴까를 걱정하면서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빈 공간은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여자들이 밀어 가지고는 돌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제자들이 무덤에 도착해보니 육중한 돌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여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에 무덤을 도굴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무덤을 파헤치거나 시체를 가져가거나 무덤을 인봉한 돌문을 바꿔 놓거나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10절을 통해 시신을 쌌던 세마포(수의)는 흩어져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개어져 있었습니다. 누에가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예수님은 세마포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셨습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왔다면 시신은 그대로 두고 값비싼 세마포만 벗겨갔을 겁니다. 시신을 훼손하려고 들어왔다면 피로 범벅이 된 세마포를 벗기지 않고 통째로 옮겨갔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신을 도둑질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산허리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입구가 하나였고 그 입구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신이 도둑맞지 않은 게 분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들여다보고 돌아갔지만 요한복음 20장 11절을 통해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남자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동고동락했고,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보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을 통해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500명의 제자가(고전15:6)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으나 기도해도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자 120명만 남았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마가의 다락방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빈 무덤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마리아에게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환웅에게 간청하였습니다.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백일 동안 동굴 안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있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육식동물이 깜깜하고 좁은 동굴 안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살자니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견디어 여자가 되었습니다. 환웅은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분이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곰이 끝까지 견뎠기 때문에 여자가 될 수 있었고 마리아가 끝까지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우리 교인들도 비록 상가교회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우리 창대교회가 부흥하는 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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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1-11(3) 주가 쓰시겠다.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제국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몇 달 또는 몇 주 전부터 환영 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이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개선문으로 들어오면 로마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주피터 신전까지 바닥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화분이 장식되어 있었고, 꽃가루가 하늘에 흩날렸고 각종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장군 휘하의 군단병력이 오와 열을 맞추어 씩씩하게 행진했고, 전쟁터에서 빼앗은 갖가지 진귀한 전리품들이 햇볕에 반짝거렸고, 노예로 사용될 포로들이 힘없이 끌려왔습니다. 로마시민들은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을 보며 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초라한 입성행렬
개선장군의 환영행렬과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규모가 차이 났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으나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식은 몇 달 또는 몇 주 전부터 준비되었으나, 예수님의 환영식은 즉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선장군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잘 훈련된 백마를 탔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아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그것도 아주 볼품없는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개선장군 곁에는 창검으로 무장한 호위병들이 둘러서 있었으나, 예수님 곁에는 지금은 신나 있지만 나중에는 도망칠 겁쟁이 제자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개선장군은 붉은 양탄자 위를 지나갔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존경의 의미로 펼쳐 놓은 떨어지고 헤어진 겉옷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개선장군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화분이 장식되었고 꽃가루가 하늘에 흩날렸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으나,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귀한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기도 하였고 손으로 흔들기도 하였습니다./ 개선장군 뒤에는 진귀한 전리품이 실려 왔고 노예로 사용될 포로들이 끌려왔으나, 예수님 뒤에는 예루살렘에서 명절을 보내려는 시골 사람들이 앞서기도 하였고 뒤따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입성행렬
그러나 개선장군의 환영행렬과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말을 탄 전쟁영웅을 환영하는 행사였습니다. 개선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적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로마시민들의 환호 속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전쟁은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사람이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준비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을 환영하는 행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슥9:9) 사람들의 찬송 속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예언된 행사였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피를 묻힌 죽음의 행렬이었다면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초라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릴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입성행렬을 위하여 
예수님의 입성행렬을 위하여 숨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예수님은 제자 둘에게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베다니 마을에 가 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끼 나귀가 문 앞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줄을 풀었더니 어떤 사람이 (누가복음 19장 33절을 보면 나귀 주인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귀가 어디에 매여 있는지 주인이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시고 제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모두 나옵니다.(마21:1-11;눅19:28-40;요12:12-19) 중요하기 때문에 모두 나오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귀를  빌려준 주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 집에 가끔 들려(요11:1) 식사도 하시고 말씀도 전하셨기 때문에 한 번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나귀 주인이 예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선선히 내주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동물은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민19:2;신21:3;삼상6:7)

주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청지기
우리는 주가 쓰시겠다는 문장 중에서 ‘주’라는 단어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입니다.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라는 뜻입니다. 나의 시간도 주님의 것이고 나의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를 주인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시간도 내 것이고 내가 가진 물질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약 나귀 주인이 나귀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어주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서 타셨을 겁니다. 우리는 3절 하반 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난외주를 보면 ‘즉시 돌려보내리라 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새번역에는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고 기록하였고, 공동번역 개정판은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답니다. 물질을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답니다. 주님은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다 가 필요하시면 달라고 하시고 쓰시고 나면 다시 돌려주시겠답니다.

예전에는 시골에 수동식 우물펌프가 있었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 퍼 다가 안에 넣고 펌프질을 하면 우물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만약 물이 아까워 한 바가지를 넣지 않는다면 우물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바가지의 물을 퍼 넣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귀하게 사용하시고 돌려주십니다. 나귀 주인이 새끼 나귀를 내주었을 때 주님은 영광스럽게 사용하시고 돌려주셨습니다. 소년이 도시락을 내주었을 때 주님은 성인남자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나 거두셨습니다. 성경에는 나귀를 빌려준 주인과 도시락을 제공한 소년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빈 공간에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반드시 돌려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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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4:28 말이 기적을 만든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듯이 말로 씨를 뿌리면 그 말대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면 부정적인 열매를 거두고, 긍정적인 말의 씨를 뿌리면 긍정적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13장과 14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다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4:28) 새번역에는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나의 귀에 들리도록 말한 그대로,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말한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1장을 통해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는 돋았는데 열매가 맺히지 않자 사람들이 영원토록 열매를 따 먹지 못한다고 저주하셨습니다. 다음 날 제자들은 길을 지나다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 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막11:22-23)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한 대로 될 줄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들어주십니다. 말은 기적을 일으키는 배터리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말을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3장을 통해 베드로가 성전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말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말씀합니다.(행3:6-7) 베드로는 돈은 없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일으킬 수 있었듯이 우리ㄷ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믿음의 말도 못합니다. 박필 목사님은 통영을 갔더니 바닷물을 방조제로 막고 덤프트럭으로 흙을 쏟아 부으니 육지가 됐다고 하면서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부으면 믿어진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펄이 딱딱한 땅이 될 때까지-반신반의하던 생각이 확실한 믿음으로 바뀔 때까지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덤프트럭으로 흙을 쏟아 부어도 방조제들 터트리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하더라도 불신의 말을 던지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장을 통해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사가랴 제사장은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고 못 믿겠다고 말하자(눅1:18)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말을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불평하는 말을 던지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14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던지 광야에서 죽는 게 좋았지 괜히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 칼에 쓰러지게 하고 처자가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원망하자, 하나님은 원망한 백성 중에 이십 세 이상은 광야에서 죽게 하셨고, 그들의 자녀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불신과 불평은 방조제를 터트리는 폭탄과 같습니다. 방조제가 터지면 흙과 돌이 바다 속으로 쓸려 들어가고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듯이, 우리들이 아무리 믿음의 말을 하더라도 한 번이라도 불신과 불평의 말을 하면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말이 기적을 일으키려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첫째 시인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장을 통해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 성령님이 능력으로 아들을 낳는다고 말씀하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시인했습니다.(눅1:38) 그리하여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님은 이것을 ‘아멘 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멘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도 고쳐지고 어려운 위기도 극복됩니다. 둘째 고백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왕궁에서 편하게 누워서 시를 쓴 것이 아니고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광야를 떠돌면서 쓴 시입니다. 다윗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먹을 것도 주셨고 잠잘 곳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셋째 선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잠언 6장 2절을 통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선포하면 얽히기도 하고 잡히기도 합니다. 풀리기도 하고 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포한대로 하나님은 이루어주십니다. 넷째 명령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통치할 권세를 위임 받았습니다. 교통경찰이 국가로부터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차를 정차시킬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명령하는 말을 해야 할까요? 사탄과 싸울 때 명령하는 말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마태복음 4장을 통해 사탄이 시험을 해오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마4:10) 그러자 사탄은 물러가고 천사들이 시중들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공격해 올 때 우리도 명령해서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7절을 통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낙심시키려는 마귀를, 우리 가정을 파괴하려는 마귀를, 우리 직장을 분열시키려는 마귀를, 우리 교회를 침체시키려는 마귀를 발로 차서 쫓아내야 하겠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명령하는 말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마가복음 4장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가 잠기게 되자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 하라. 고요 하라.” 고 명령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막4:3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거지처럼 “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왕자처럼 “할 지어다” 라고 명령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질병을 고칠 때도 명령하는 말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마가복음 1장을 통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그의 집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우리가 명령하면 병이 낫게 됩니다. 최근 신경의학계에선 뇌 속의 언어중추신경이 모든 신경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치료에 적용하여 언어치료법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당뇨병 환자인 경우 “나의 혈당치는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고 말하면 정상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 위스콘신 주의 한 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에게 언어치료법을 적용했더니 3주후 진통이 말끔히 사라졌고 암도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합니다.(박필, 당신의 말이 기적을 만든다, 32-33쪽) 우리나라는 과거에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습니다. ‘배고파 죽겠네.’ ‘아파 죽겠네.’ 죽겠다고 하면 죽을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믿음의 말-우리 창대교회는 포항에서 제일가는 감리교회가 됩니다. 라고 선포하여 기적을 체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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