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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12(9:1-41) 나는 세상의 빛이다

제6회 포항국제 불빛축제가 7월 25일부터 26일까지 양일간 북부해수욕장과 형산강 체육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주최 측은 포항의 상징은 불빛이기 때문에 불빛 축제가 포항에서 열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불빛축제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10월)이 되면 조상들이 애굽(이집트)을 탈출하고 광야(사막)에서 유랑했던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나뭇가지로 초막(오두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생활하였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 성전으로 가져와 바위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겨울에 이른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성전에 있는 여인의 뜰에 횃불을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횃불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환하게 밝힌 불빛을 보며 춤을 추고 있을 때 그리고 포항 사람들이 해상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쇼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시편 18편 28절을 통해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 시리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27편 1절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36편 9절을 통해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빛을 통해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활동력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횃불이나 해상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쇼가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2장 6절을 통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서 49장 6절을 통해 “내가 또 너(여호와의 종)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베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과 어둠에 머물면서 예수님께 대항한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9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선천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불쌍히 보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맹인이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보고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 11절을 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이 떠졌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조사를 벌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맹인을 고쳤다고 칭찬하지 않고 안식일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고 다시 말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17절을 봅니다.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고 죄인이라고 비난하였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선지자’라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물었으나 부모가 종교지도자들이 불이익을 줄까봐 대답을 회피하자 다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31절에서 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죄인이라고 비난했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 눈을 뜨게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회당에서 추방했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를 믿느냐고 물었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38절을 봅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는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여겼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 사람에서,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에서, 주로 알아갔습니다. 신체적으로 장애를 앓았던 맹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갔지만, 비장애인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신체적인 눈도 뜨고 영적인 눈도 떴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구세주가 필요 없다고 고집을 피우다 신체적인 눈은 떴지만 영적인 눈은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맹인인 것은 죄가 아니지만, 영적으로 맹인인 것은 죄라고 지적하셨습니다. 

2007년 7월 23일 신체적으로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사람이 영안이 열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75세)이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선교집회인 러브소나타 도쿄대회 현장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이 전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20대에는 반기독교적인 글을 썼으나 70대에 들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전 장관은 딸 장민아 변호사가 암에 걸리고 시력장애를 겪고 거기다 손자가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증후를 신앙으로 극복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간증합니다. 이 전 장관은 딸의 문병을 가서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처음으로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자녀로 살겠나이다.'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전 장관의 기도 때문인지 어떤지 딸과 손자는 질병을 치유 받았고 이 전 장관은 기적 때문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국민일보 7월 25일) 이 전 장관은 같은 날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 ‘CEO 리더십 포럼’에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가 크리스천이 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오후 2시부터 넌 크리스천(Non-christian)에서 크리스천이 됐다. 이건 내게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이성, 인간의 지성을 강조해왔던 이 전 장관이기에 ‘세례’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이 전 장관은 “지금껏 나는 이성의 힘, 지성의 힘으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지성과 영성, 그 문지방 위에 서있다. 나도 궁금하다. 내 앞에 놓인 게 과연 ‘벽’인지 ‘문’인지 말이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영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란 지적이었습니다.(중앙일보 7월 26일) 신앙은 체험하면 이해됩니다. 이 전 장관은 지성의 벽에 갇혀 영안이 닫혔으나 사랑하는 딸이 시각장애를 겪자 빛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 딸도 빛을 보게 되었고 자신도 생명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전 장관은 딸의 신체적인 시각장애가 영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눈은 떴으나 영적인 눈은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을 통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등불을 켜서 말(됫박)로 덮지 않고 등경 위에 둬야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혹시 등불을 켜서 덮어두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빛을 가린다면 아마 공기가 통하지 않아 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을 비춘다면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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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22-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무슨무슨 날이 참 많더군요. 그중 재미있는 것을 골라봤습니다. 1월 1일은 가래떡 데이라네요. 3월 3일은 삼겹살 데이이고, 4월 4일은 클로버 데이이고, 5월 2일은 오이 데이이고, 6월 6일은 고기 데이이고, 8월 8일은 꽈배기 데이이고, 9월 9일은 구구 데이이고, 10월 4일은 천사 데이이고,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이고, 12월 12일은 고래밥 데이라네요. 교회에서 정한 날도 있네요. 최일도 목사님의 다일공동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되새기기 위해 5월 2일을 밥의 날로 정했습니다. 다일공동체는 2002년 5월 2일에 처음으로 식탁에서 밥을 제공하여 오병이어의 날로 정했다가 일반인에게까지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2007년 5월 2일부터 밥의 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헤롯 빌립이 다스리는 갈릴리 호수 동쪽에서, 어린아이의 도시락인 보리 떡(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성인남자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12 바구니나 거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고 믿고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우셨습니다. 백성들이 배를 타고 갈리리 호수 동쪽에서 서쪽까지 따라왔는데 왜 반갑지 않고 안타까우셨는지 26절부터 2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떡을 달라고 몰려온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러 오지 않고 떡을 달라고 왔기 때문에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합시다. 썩을 양식.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썩을 양식은 육신의 양식인 떡입니다. 빵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밥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29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은 열심히 일해서 얻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얻어집니다. 썩을 양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여러분,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 중 어느 것이 쉬울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쉽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육신의 양식은 눈으로 보입니다. 힘은 들지만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믿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힘은 들지 않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양식보다 눈으로 보이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면 손해 볼까 걱정이 되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31절을 봅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었듯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면 육신의 양식을 주는 지 궁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시키셨습니다. 32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기까지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다시 말해 육신의 양식을 주셨듯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면 참 떡 다시 말해 진정한 양식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참 떡 다시 말해 진정한 양식은 무엇일까요? 3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굶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만나는 다시 말해 썩을 양식은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다시 말해 예수님은 먹으면 배고프지 않고 마시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만족을 주십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돼도 영적으로 갈급하면 불안정합니다. 영적으로도 만족해야 안정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만족을 모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 장을 통해 우리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선택하면 썩는 양식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에 활짝 피어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옷 입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들을 먹이고 입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썩을 양식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면 영혼의 양식도 주시고 육신의 양식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남자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를(요6:39)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나만 잘 믿기보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기를 바라십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교인이 신앙의 깊어지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합니다. 하나님은 늘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사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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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1-15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4 복음서에는 35 가지의 기적이 나오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4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이 모두 나오는 걸로 보아 이 기적은 여러 기적 중에서도 중요한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까지 3 사람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사람은 빌립입니다. 예수님은 인기스타였습니다. 인기스타가 가는 곳마다 열성 팬들이 몰려들듯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식사도 못하고 몰려오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예수님은 빌립이 디베랴 호수(갈릴리 호수) 근처인 벳새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빌립은 무리들을 둘러보고 사람 수에 빵 값을 곱했습니다.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2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200 일 품삯입니다. 미국의 NIV 성경은 노동자의 8 달 봉급이라고 말합니다. 주일을 빼면 200 일은 8 달이 됩니다. 빌립은 무리에게 음식을 먹이려면 노동자의 8 달치 봉급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그동안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빌립은 계산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계산적인 신앙인은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신앙생활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지 불리한 지를 따져보고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 6-7 장을 통해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았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고자 군대를 모집하였더니 3 만 2 천 명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군인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하려면 군인이 많아야 유리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숫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3 만 2 천 명 중에서 싸움을 두려워하는 자 2 만 2 천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무릎을 꿇고서 물을 먹는 자 9 천 7 백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3 백 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3 백 명의 군인으로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미디안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군인이 많으면 사람의 힘으로 이긴 줄 알까봐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격파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라고 자랑하게 만드셨습니다. 신앙은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계산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가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데려왔지만 사람 수에 비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안드레도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는 믿음이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신앙인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 따져보며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심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4 장을 통해 제자들이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에 휩쓸려 위태롭게 되자 예수님이 물을 밟고 걸어오셨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물을 밟고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이 불어오자 물속으로 빠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며 나무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믿음이 생겨 물 위를 걸어갔으나 바람이 볼 때는 의심이 생겨 물속으로 빠져갔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이란 성냥개비에 하나님의 능력이란 성냥갑이 부딪힐 때 일어납니다. 젖은 성냥개비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고 싶으셨지만 갑작스럽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돈도 없었고 음식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께 건네 드렸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밖에 안 되지만 예수님이라면 배고픈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는 신앙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어린아이는 과자 하나를 주면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해도 망설이는데 하나가 아닌 한 봉지를 준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어린아이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헌신적인 신앙인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헌신을 거름으로 삼아 큰 열매를 맺으십니다. 열왕기상 17 장을 통해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어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고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마지막 식사를 주면 가뭄이 끊나는 날까지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올리브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병의 올리브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한 끼 식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몇 년 동안 먹을 음식을 주셨습니다.

요즘은 집집마다 상수도가 연결돼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에 수동식 우물펌프가 있었습니다. 우물을 길으려면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우물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하면 공기압력에 의해 우물물이 올라왔습니다. 한 바가지를 부으면 끝도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물이 아까워서 한 바가지의 물을 붓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은 투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바가지의 물을 부으면 끝도 없이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더니 성인남자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하셨더니 열 두 바구니나 걷혔습니다. 무리들은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임금으로 삼으로 했으나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 장 35 절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하며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떡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 정성껏 드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되돌려 주십니다. 차고도 넘치게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테스트하셨듯이 우리도 어떻게 대응하는지 테스트하십니다. 우리는 빌립처럼 계산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믿음 없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은 것을 드려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작은 자동차 키가 큰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우리는 작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시는 기폭제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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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1-22 둘로 하나를 만드사

1.
유대인들은 사람을 유대인과 이방인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다 이방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오직 유대인들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경멸하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어떤 유대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까닭은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시려고 만드셨다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유대인은 뱀을 밟아 죽이는 것과 이방인을 죽이는 것은 모두 잘하는 일이라고 섬뜩한 말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의 표시로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다짐이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표식이었고, 옛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상징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영원히 유대인이 되었다고 인정받았지만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비난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선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약속의 언약들에서 외인이었고, 죽음 이후의 삶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망이 없었고, 많은 신들은 있었지만 한 분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엡2:12)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베를린장벽보다도 더 크고, 휴전선보다도 더 무서운 장벽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땅의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유대인들과도 멀리 떨어져있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도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멀리 떨어져있던 하나님과 이방인을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깝게 했을까요? 예수님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엡2:14) 유대교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이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방인은 성소와 구내를 둘러싼 방책 안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다가 붙잡히는 자는 죽음을 당해도 자기의 책임이다.” 라는 경고문이 쓰였다고 합니다.(LABC,117쪽) 이방인은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갔다간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찢어 담을 허무셨습니다.

3.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데 사용된 유대교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엡2:15) 유대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했는데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수천 개의 규칙과 관습과 계율과 법령으로 세분하였습니다. 율법이 너무 세분되다 보니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롬3:19-20,7:7-13) 수십만의 유대인들 중에서 고작 6천 명 정도의 바리새인들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고 나머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의식을 가졌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지켜주는 자물쇠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히7:27) 짐승의 피로로 사람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었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는 우리들의 죄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히9:14)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시고 율법을 완전하게 폐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은 무리와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는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엡2:14) 평화이십니다. 중세시대 설교가인 크리소스톰은 어떤 사람이 은으로 된 상과 납으로 된 상을 사랑으로 녹여 금덩어리를 만들었다고 비유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은으로 된 유대인과 납으로 된 이방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여 그리스도인이라는 금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하가 왕을 알현하듯이 멀리 떨어졌던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엡2:18)

4.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국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엡2:19) 첫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나라 불법체류자들은 단속반이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도망가는데 그러다 다치면 업무상 재해라고 하네요 우리는 예전에는 하늘나라의 불법체류자였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이제는 천국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속반이 나타나도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신분증에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잡았고 예수님이란 모퉁잇돌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엡2:20) 건물은 모퉁잇돌에 정렬하여 모양을 만들듯이 우리는 예수님에게 연결하여 성전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었듯이 지상의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김치가 갖은 양념을 버무려 맞을 내듯이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사랑의 띠를 이루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전에는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지역갈등을 겪었는데 요즘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이념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 조각들을 한데 모아 퍼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맞추어놓은 퍼즐을 여러 조각으로 흩트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해방 이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과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듯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 사회를 통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하나로 만드셨는데 우리가 이해관계 때문에 분열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인데 싸웠다고 갈라서야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보기 싫다고 해체해서야하겠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돼야 합니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고 단결을 촉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둘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님을 본받아 접착제가 물건을 단단하게 붙이듯이 뿔뿔이 흩어진 우리 공동체를 단단하게 연결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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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8:15-17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

영국에 사는 어떤 청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재산을 다 털어 뱃삯을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식품을 구입했습니다. 드디어 배가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대서양을 향해 물살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청년은 드넓은 바다를 볼 때마다 새로운 희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는 기분이 침울해졌습니다. 다른 승객들은 여유가 있어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었으나 청년은 돈이 없어 한쪽 구석에 가서 말라비틀어진 빵으로 허기를 달랬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그럴 때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성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배가 미국 동부해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승무원이 청년에게 다가와 배를 승선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혹시 항해 중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승무원은 안심하며 “그런데 왜 식당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드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힘없이 “뱃삯을 지불하고 나니까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어서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승무원은 깜짝 놀라며 “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님이 사신 뱃삯에는 하루 세끼 식사비용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요.”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청년이 뱃삯에 식사비용이 포함 된지를 몰라 맛있는 식사를 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몰라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언제 주어질까요?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포항시장의 아들이 있다면 포항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포항시장인데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우리는 포항시장보다 높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왕자요 공주입니다.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데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시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존귀한 사람입니다. 옆 사람보고 이야기 합시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렇다면 목사님은 누구일까요?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목사님을 부려먹어도 될까요? 아닙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통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영어로는 Now then we are ambassadors for Christ 입니다. 사신은 영어로는 ambassador 입니다. 대사입니다. 대사는 한 나라를 대신해 외국에 파견된 최고급 외교사절입니다.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파견된 외교사절입니다. 외교사절은 치외법권을 가집니다. 그 나라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아요. 만약 대사를 건드리면 그 나라와 외교문제가 일어납니다. 마찰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세상의 법으로 판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대사인 목사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하나님과의 외교문제가 생겨서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시겠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무슨 권세일까요? 말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무엇으로 창조하셨지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창1:3)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o o 이 o o 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씀하지요? 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입니다. 성광교회는 수준이 높네요. 예수님은 말씀이셨는데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성난 바람이 그치고 사나운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막4:39)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친자는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우리나라는 친자와 양자를 차별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양자도 친자와 똑같은 권리를 가졌습니다. 똑같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친자인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양자인 우리도 말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말의 권세를 받았으니 서로를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 옆 사람을 축복합시다. 당신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의 골치 덩어리 아니 축복 덩어리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많이 나오나 부정적인 말이 많이 나오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는 말의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 아들 떨어지면 어떻게 해! 그러면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자녀에게 망할 놈이라고 욕하지 말고 흥할 놈이라고 욕하세요. 그러면 흥하게 됩니다./ 우리의 말에도 권세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대사인 목사님의 말씀에는 얼마나 많은 권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3절을 통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목사님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시고 목사님이 저주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목사님은 저주를 안 하시지만 어떤 교인은 사사건건 시비를 일으켜서 목사님을 기도하게 만드는 교인이 있고, 어떤 교인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잘 섬겨서 목사님이 기도해주고 싶은 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을 기도하게 만드는 교인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이 기도해주고 싶은 교인입니까? 여러분은 말씀의 권세를 받으신 목사님의 입에서 축복 기도가 절로 나오게 신앙 생활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인 말의 권세를 어떻게 누리며 살까요? 첫째, 마귀를 대적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4절을 통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들과 세상에 있는 자’는 사탄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를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사탄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탄을 이긴 줄도 모르고 겁내고 있으니까 마귀가 도망가지 않고 공격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아파트에서 나오고 이어서 작은 개 한 마리가 졸졸 따라오더랍니다. 아주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나무라도 개는 꼬리를 흔들 뿐 돌아가지 않더랍니다. 그 사이 버스가 도착했고 아주머니가 버스를 타려는데 개도 버스를 타려하자 아주머니가 발로 뻥 차며 고함을 치자 개가 깨갱거리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꾸짖으면 마귀는 도망가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7절을 통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을 자꾸 낙심시키려는 마귀를, 여러분의 가정을 교묘하게 해체하려는 마귀를 쫓아내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마귀야 물러가라고 명령하면 도망갑니다./ 둘째, 병이 나았다고 믿고 선포하십시오. 모든 병을 마귀가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는 병을 통해 장난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53장 5절을 통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분당 풍성한교회를 다녔던 서기석 성도님의 간증을 보니 바이러스성 콧물감기를 앓아 콧물을 닦아내느라 화장지 한두 통을 금방 허비했는데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처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는 말씀에 의지해 병이 나았다고 믿고 병아 떠나라고 선포했더니 회복됐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그동안은 하나님 고쳐주세요 하고 애원했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나의 병은 나았다고 믿고 입으로 선포하면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십니다./ 셋째, 물질이 마르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저는 개척교회 목사다 보니까 돈을 수중에 쥐고 살지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성경구절 4 구절을 암송하며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부요하신 예수님이 가난해 진 것은 가난한 나를 부요하게 하심이지,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풍성하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지,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은 하나뿐인 예수님도 내주셨는데 다른 것은 당연히 주시지, 그리고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면 하나님은 내 생활을 책임져 주시지 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압박합니다. 그러면 말랐던 샘에서 물이 다시 고이듯이 하나님께서 통장을 채워주시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나가 만나를 주울 때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고 먹을 만큼만 거두었다고 하셨던 것처럼(출16:18) 쓸 만큼만 주시더라고요. 저의 목회는 아직 출애굽기 16장에 머물고 있나 봐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한다면 주께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고 하셨던 시편 23편까지 진전될 것 같아요.

마크 트웨인이 쓴 세계명작 중에 [왕자와 거지]가 있습니다. 이 책은 영국 헨리 8세가 다스리던 시대에 백성들의 황폐한 생활을 그린 풍자소설인데 같은 날 태어났고 쌍둥이처럼 닮은 에드워드 왕자와 거지 톰이 옷을 바꿔 입고 왕자는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거지처럼 비참하게 살았으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왕자처럼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거지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한쪽 귀퉁이에서 손으로 밤을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왕자처럼 품위 있게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분이 바뀌었으니 수준도 바뀌어야 합니다. 성광교회도 지하교회였을 때와 근사한 4층 교회 일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왕자와 공주가 되었으니 말의 권세를 가졌으니 마귀가 유혹해도 말씀으로 쫓아내고, 질병이 생길 때도 말씀을 의지하고, 가난이 찾아와도 말씀으로 명령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우리 성광 교인들도 흥해에 사는 다른 교인들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돈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며 다니더라도, 썬 크림을 더 바르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를 외치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십시오. 여러분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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