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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18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회복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야기이죠.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4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의 거룩한 주역이고, 사탄은 악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인공으로 나오죠. 주인공들은 서로 갈등하고 해소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성경을 물에 비유하면 하나님은 물이 콸콸 솟아나는 샘을 만드셨습니다. 샘물이 샛강으로 졸졸졸 흐르는데 바위가 튀어나옵니다. 물이 잠깐 멈췄다 더 많은 물이 고이면 바위를 피해서도 흐르고 넘어서도 흐르며 큰 강으로 흘러갑니다. 큰 강물은 최종적으로 바다로 모입니다. 여기서 물이 발원하는 샘은 창조이고, 물을 가로막는 바위는 타락이고, 바위를 넘어서 큰 강물로 흐르는 물은 구속이고, 큰 강물이 합해지는 바다는 완성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7가지 길 중에서 세 번째 시간으로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회복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회복하길 바라십니다.(호4:6)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1)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보다 앞서 존재하시는 분이고, 모든 만물이 생겨난 원인이신 분이고, 모든 만물보다 위에 계신 분이고,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 최고의 걸작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셨는데 사람에게 제한적인 주권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1:28-30)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와 함께 사셨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 기쁨이 넘칩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었고, 먹을거리도 널려있어 배고플 때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장소였습니다.(창세기 1-2장) 그런데 사람이 복에 겨워 발로 걷어찼습니다.

타락/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어도 되지만 동산 가운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도 하셨습니다.(창2:17)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뱀이 단언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하나님은 죽는다고 경고하셨지만 뱀은 죽지 않는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여자는 흔들렸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습니다.(창3:1-6) 사람은 원래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살게 창조되었는데 사탄이 부추기자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을 조장한 뱀에게 저주를 내려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에게 징계를 내려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내의 말을 따른 아담에게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물을 먹을 수 있고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되어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창3:14-24) 사람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 어쩌다가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집 센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고(사53:6) 반항하는 아들처럼 집을 떠나 타국으로 떠나갔습니다.(눅15:11-32) 사람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잃고 사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였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인 노아의 가족들과 정결한 짐승들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들은 암수 두 쌍씩 남겨두고 대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습니다.(창세기 4-11장)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어쩌다가 때리기도 하시지만 언제나 싸매려 하시는 분입니다.

구속/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셔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백성들을 구출하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은 유목민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농사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워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의 후손 중에서 그의 백성들을 영원히 다스릴 왕이 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순종하기도 하였고 불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 그들이 살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리라고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오도록 선지자들도 보내셨고, 시인들도 보내셨고, 지혜자들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대신 죽이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완성/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26) 예수님은 부활입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키가 자라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갈 수 있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탄과 함께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즐거이 영접하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새 에덴인 천국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성도들과 영원토록 교제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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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1-3 영적 여정(약속의 언약)

무지개는 빛이 물방울을 비출 때 나타나는 일곱 줄입니다. 무지개가 일곱 빛깔을 가졌듯이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처드 포스터 교수와 그의 제자인 게일 비비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이 지은 [영성을 살다(IVP)]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영적 여정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신앙 생활했는지를 보고 배우면 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의 역할모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 아브라함은 영적 여정의 대명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따라 고향인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에 아버지가 하란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창11:31-32)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 그때까지는 아브람이었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은 75세인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고향은 땅을 가리키고, 친척은 확대가족을 가리키고, 아버지의 집은 유산을 가리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과 안전을 포기한다는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게 미래를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의 영적 여정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적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적 여정을 시작하려면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2절을 통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와 두 번째 약속은 3절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었습니다. 이중 첫 번째 약속인 큰 민족을 이루려면 후손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머물 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이때까지 아들도 없었고 땅도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순례자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 3장 20절을 통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천국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식솔들을 이끌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7)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제 아브람에게 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기뻤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그 땅에 기근이 들어 도저히 살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순례 길을 가다보면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아브람은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기름 진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애굽은 세상이요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아내인 사라를 바로 왕에게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순례 길을 가다 고난이 닥친다고 세상으로 떠나면 우리는 더 큰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품에 머물러야 피할 길이 열립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나안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와서 조카인 롯과 분가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보통은 삼촌이 먼저 선택하지만 아브람은 조카에게 양보했습니다. 아브람은 관대했습니다. 롯은 물이 넉넉한 땅을 골랐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사악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롯은 육신의 눈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나중에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아브람은 반대편인 헤브론으로 옮겼습니다. 헤브론은 다윗 왕의 고향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북쪽과 남쪽과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13:15-16)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도 주시고 자손도 땅의 티끌만큼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지만 아브라함은 상속자가 없자 조바심이 나서 종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만류하시고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가리키셨습니다.(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만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 땅을 아브람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번에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 고전을 보면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시며 의형제를 맺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제물을 쪼개고 두 사람이 그 사이로 지나면 약속이 성립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 위에 놓은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 모양으로 지나셨습니다.(창15:17) 하나님과 아브람과 언약이 비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물 위를 하나님 혼자서 지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 혼자서 지키시겠다는 편무적인 약속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땅을 주시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도 우리가 인생을 계획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미안했는지 애굽 사람 하갈을 첩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브람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아브람이 86세가 되었을 때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낳은 아들로 오늘날 아랍 국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와의 불행은 이렇게 태동했습니다. 아브람은 서자인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창17:1-2,4-5)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의 전제조건으로 완전한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언약을 완전하게 지켜야 했습니다.(창17: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심히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가나안 온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필수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창17:10-14) 할례를 행해야 영원한 언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조건도 없었는데 약속을 믿지 않자 조건이 추가되었습니다. 이제 언약은 쌍무적인 약속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도 지켜야 하고 아브라함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추가하신 완전한 행위는 언약의 윤리적 조건이고 할례는 제의적 조건입니다. 언약이 유지되려면 윤리적으로도 정결하고 종교적으로도 정결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유지하려면 도덕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라고 개명해 주셨습니다.(창17:15-16) 사라는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가 89세니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며 비웃었습니다. 사라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으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삭은 그가 웃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년 이맘때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과 영원한 언약을 맺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던 할머니가 낳은 이삭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면 어려워도 하나님이 하시면 쉽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요 사라가 90세였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이라고 이름을 짓고 낳은 지 팔일 만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창21:1-4)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낳은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12) 언약은 이삭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이삭이 언약의 적자입니다.

이제 이삭이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창22:1-2)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게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요? 이삭을 각을 떠 제단 위에 올려놓고 완전히 태우라니요? 하나님이 이상하신 게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말리셨습니다.(창22:12)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세상을 더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언약을 확증하셨습니다.(창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하자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만큼 번성하게 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재차 다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 첫 번째 약속인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후손과 땅이 있어야 하는데 후손은 이삭이 출생하면서 이루어졌고 땅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인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여 믿음의 가문을 세우길 바라십니다. 아브라함이 영적인 여정을 완주했듯이 저와 여러분도 영적인 순례를 완주하길 바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인 여정을 완주하므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번성하고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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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3:17-19 하나님을 향한 사랑


무지개는 빛이 조금 떨어져 있는 물방울을 비출 때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일곱 줄입니다. 흔히 비가 그친 뒤 태양과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는데 바깥쪽에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차례로 나타납니다. 무지개가 일곱 빛깔을 가졌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처드 포스터 교수와 그의 제자인 게일 비비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지개에도 각각의 색깔이 있듯이 영성에도 각각의 길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은 [영성을 살다(IVP)]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예수님이 어떻게 신앙 생활하셨는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역할모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대명사였습니다. 아니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더러 있을지 몰라도 죄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사랑을 실천하셨으니 제자인 우리도 사랑을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3-45절을 통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저주 기도하지 말고 축복 기도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나님의 자녀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춰주시고 단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선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상도 없습니다. 세리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를 통해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하자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하셨고 어떤 계명이냐고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19절 하반 절을 통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이웃은 동료 유대인들을 가리켰지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를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확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족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계명을 지켰다고 이웃을 사랑했다고 자신만만해 하자 21절을 통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과성 구호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4절 이하를 통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모세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질문하자 37-39절을 통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셨습니다. 우리는 전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과 사람을 향한 수평적인 사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막대기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20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와 자매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와 자매 사랑은 사랑을 표현하는 두 날개입니다. 두 날개로 날아야 하늘을 날 수 있듯이 두 개의 조화를 이뤄야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을 통해 성령님의 은사를 설명하고 31절 전반 절을 통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고린도 교인들이 크게 생각하는 방언의 은사보다도 그리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도 더욱 큰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사랑의 은사를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새번역으로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뽐내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원한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친절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모든 것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바랍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지 않아야 할 것 보다 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먼데 서부터가 아니라 가까이에서부터 실행해야 합니다. 사랑의 파랑새는 먼데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의 은사보다 능력의 은사를 갈망하자 능력의 은사보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사는 일시적이지만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만 사랑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사보다도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성격이 모나면 싫어하듯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차갑다면 아무도 따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사랑이 없는 능력은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첫째, 우리가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릴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고 그리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라십니다.(엡3:17-19) 아는 것은 머리로가 아니라 손발로 나타납니다. 지식은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전기 코드를 플러그 인하면 전기가 흘러들어와 가전제품을 작동하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플러그 인하여 그 사랑을 공급받고 그 사랑을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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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6(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3백 년 전에 동양과 서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중국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중국은 길을 막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15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길을 닦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촉진했습니다. 중국은 패쇄적이었고 로마는 개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길을 차단한 중국은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길을 건설한 로마는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피가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듯이 모든 길은 로마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속국으로까지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로마 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는 여러 갈래 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천국은 한 갈래 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요한복음 14장 1-2절을 통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듯이,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2)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라는 장소적 개념도 있고, ‘하나님 안에서’라는 관계적 개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는 하늘나라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약속은 3절을 통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엄마가 시장에 다녀와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듯이,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3)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재림하셔서 제자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고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왜 자신을 떼놓고 시장에 가는지 모르듯이, 도마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5)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도 몰랐고 아버지께로 가는 길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엄마가 아이에게 시장에 다녀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듯이, 도마를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14:6-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일방통행로입니다. 다른 길로 가면 일방통행로 위반입니다. 승용차가 일방통행로를 위반하면 범칙금 6만원에 벌점 10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가면 안심하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일방통행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대자연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반계시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며 창조주의 솜씨를 감탄합니다. 그러나 대자연보다도 창조주를 더 잘 알려주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특별계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을 주시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는 모두 유익하지만 예수님이 없는 종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통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멸망당할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리석게 보고 거부하지만 구원받을 사람은 능력으로 보고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을 통해서 예수님과 두 명의 행악 자가 십자가에 달렸는데 하나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고 거부했으나(23:39), 다른 하나는 비방한 행악 자를 꾸짖고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영접하였습니다.(23:42)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영접한 행악 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23:43) 예수님을 영접한 행악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지만 아무리 악행을 했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생과 영멸의 관건은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길을 막은 중국이 쇠퇴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으면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길을 열은 로마가 흥왕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날 때 표를 받고 통행료를 주느라 정체하게 되는데 하이패스 차량단말기를 설치하면 통행료가 무선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정차하지 않고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하이패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망설임 없이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지옥으로 파기 환송하지 않고, 천국으로 ‘하이패스’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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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25-26(1-4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인생을 즐기며 살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또 영적으로도 한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 죽음은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계20:10)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만 죽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는데 잠을 자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깨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시범 케이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매 년 세 차례(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출23:14)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동쪽으로 3Km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오빠 나사로, 언니 마르다, 동생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나사로가 동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하인이 예수님의 발을 물로 닦아주면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고 귀한 손님으로 환영하였습니다.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정신을 빼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삼남매는 예수님을 존경하였고 예수님도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인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병들었다고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며 오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당일 장을 치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중턱에 석회암 바위를 파서 동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물로 깨끗이 씻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고 천으로 둘둘 감싸고 세마포 수의를 입혔습니다. 동굴 무덤은 맷돌같이 둥근 돌로 굴려서 막고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로 붙이듯이 점토로 동굴 틈새를 봉인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나 살이 썩으면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고 무덤 벽에 있는 납골당에 넣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조문을 받았습니다. 상가는 조문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문객들로 북적거렸고, 큰소리로 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당을 받고 우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요1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삼일 동안 무덤 주위에 머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사로는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동안 의지하며 살던 오빠가 갑자기 죽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문을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빠를 살려주시지 않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도 오빠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는 오빠가 나중에 부활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주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도 아쉬움을 쏟아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32)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셨는지 아니면 믿음이 없는 자매를 보시고 안타까워서 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5)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자 시신 썩는 냄새가 새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정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보시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물으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하고 기도하시고,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11:43)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동굴 무덤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중국 귀신인 강시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콩콩 뛰듯이 손과 발이 묶였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면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이르셨습니다.(11:44) 나사로를 풀어주자 썩어서 흐물흐물하던 살결이 건강한 사람처럼 탱탱하게 회복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귀로 들어서 얻은 지식은 30%, 눈으로 보고 얻은 지식은 50%, 손으로 만져 보고 얻은 지식은 80%가 기억된다고 합니다.(한국학교발명협회 발명의 길잡이 365일)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수님이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고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여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우리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죽어도 살아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체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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