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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6:18 노아(보존의 언약)

성경에는 여러 가지의 중요한 주제가 있는데 그 중에 핵심적인 주제가 ‘언약(Convent)’입니다.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이고 헬라어로는 ‘디아테케’인데, 구약에서는 약 285회가 언급되었고 신약에서는 약 33회가 언급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명시적인 언약이 5개에서 9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IVP 성경신학사전을 참고하여 5회에 걸쳐 언약신학을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노아 언약 다른 말로 하면 보존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창1장)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장)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고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불순종하기 시작합니다.(창3장) 하와는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형이 동생을 살해합니다.(창4장) 가인은 농사하는 자라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 치는 자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화가 나 들에서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의 죄는 한 개인에서 전체 구성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창6장)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창6:8)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6:9)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칸들을 만들고 안팎에 역청을 칠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방주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도 알려주시고 창문도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만들라고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시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6장 18절을 통해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시고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맺은 첫 번째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를 선택하셨듯이 죄로 물든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노아는 의인이라 선택하셨지만 우리는 죄인인데도 선택하셨습니다.(롬5:8) 노아는 행위가 완전해서 선택되었지만 우리는 불완전한데도 선택되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엡2:8)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그의 가족들과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과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씩 방주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부터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창7:11)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사십일 밤낮으로 쏟아지자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방주는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자 물 위를 둥둥 떠 다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주를 주목해야 합니다. 방주는 항해를 위한 장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방향을 잡는 키도 없고, 바람을 맞는 돛도 없고, 움직이게 하는 노도 없었습니다. 방주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움직였습니다. 우리 인생도 방주처럼 내가 운전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운전대를 맡겨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계획하더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잠16:9) 내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대홍수가 일어나자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새도 죽었고 가축도 죽었고 땅에 기는 것도 죽었고 사람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왜 모든 생명을 다 죽이셨을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경시하셔서 죽이신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러셨을까요? 의사는 암세포가 전이되면 잘라버리잖아요? 하나님은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죄의 싹을 잘라버리신 겁니다. 비가 그치자 노아는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오래날 수 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이리저리 날아다녔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먹을거리가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까마귀처럼 썩은 고기 다시 말해 부정한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선원들은 육지가 있는 방향을 알기 위해 까마귀를 먼저 날려 보내고, 상륙할 지점을 찾기 위해 비둘기를 나중에 날려 보낸다고 합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오래 날지 못하기 때문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칠일 후에 또 비둘기를 날려 보내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가져왔습니다. 감람나무는 지대가 낮은 장소에서 자라는 나무로 새 잎사귀가 돋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노아는 칠일 후에 또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발붙일 곳도 있고 식물도 있는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땅이 말라가고 있다고 짐작했습니다. 육백일 년 첫째 달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 물이 걷히자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었습니다.(창8:14) 노아는 홍수가 시작된 지 열두 달 열흘 만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까요?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창8:20) 예배를 드렸습니다. 번제 다시 말해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드려야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창세기 8장 21절-22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모든 생물들에게 확대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11절을 통해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 언약은 노아하고만 하셨는데 나중 언약은 방주에서 나온 모든 생물들과 약속하셨습니다. 언약이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언약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2절 이하를 통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시는 물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무지개는 노아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증거입니다.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쌍무적인 언약입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지키는 편무적인 언약이 아니라 쌍방 간에 지켜야 할 쌍무적인 언약입니다. 우리도 지키고 하나님도 지켜야하는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예배는 우리와 하나님과를 연결하는 끈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이 끈은 견고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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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2:12-14 영적 상승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테베에 스핑크스(Sphinx)라는 괴물이 나타나 지나가는 사람을 세워놓고 수수께끼를 냅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잡아먹었습니다. 테베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여왕은 수수께끼를 맞힌 사람에게 왕위를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이디푸스(Oedipus)라는 청년이 테베를 구하기 위해 스핑크스를 찾아갔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다. 어린아이 때는 팔다리로 기어 다니고, 좀 더 자라서는 두 다리로 걷고, 늙어 힘이 없어지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부끄러운 나머지 골짜기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합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는 인간의 생애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네 발로 기는 것은 혼자서는 설 수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성인이 두 발로 걷는 것은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늙어서 세 발로 걷는 것은 힘이 소진되어 무언가를 다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시간으로 영적 상승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생애를 네 발, 두 발, 세 발로 묘사했지만 사도 요한은 신앙인의 생애를 아이, 청년, 아비로 묘사합니다. 요한은 12절을 통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교인들을 ‘자녀들아’ 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를 자녀처럼 여겼는데 요한도 교인들을 자녀처럼 소중하고 친근하게 여겼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한 아이도 있고, 신앙이 자라가는 청년도 있고, 신앙이 성숙한 아비도 있습니다./  

아기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듯이 영적인 아이 단계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기가 걸음마를 뗄 때 엄마가 손을 붙잡아 주듯이 교회는 이제 막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새가족이 스스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민서와 량헌이를 도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초신자 시절에 바나바가 도와주었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나 나중에는 그를 능가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14절 전반 절을 통해 영적인 아이가 신앙이 자라는 지름길을 알려줍니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영적인 아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면 신앙이 자라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면 베드로 전서 2장 2절을 통해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구원받은 사람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들으면 먹게 되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방법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먹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큐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큐티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직접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직접 들려주시는 직통계시입니다. 저도 큐티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저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매일성경으로 큐티를 하고 아침을 먹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고 나서 육신의 양식을 먹습니다./  

이렇게 큐티를 하다보면 영적인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청년이 되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 힘을 발산하기 위해 무언가를 찾습니다. 그러다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2장 13절 하반 절을 통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말하고 14절 하반 절을 통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청탁이 있듯이 영적인 청년 단계에는 힘이 있기 때문에 악한 자의 유혹도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와 ‘흉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자 어슬렁거리듯이 영적인 청년을 쓰러뜨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청년은 신체적인 힘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으로 물리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7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의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공격할 수도 있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려면 성경 구절을 암송하십시오. 성경 구절을 암송하면 소가 배고플 때 삼킨 음식을 게워 내 되새김질하듯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머릿속에 있는 말씀을 입으로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핵무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이웃 나라가 쉽게 공격하지 못하듯이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고 있으면 사탄이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암송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렇게 성경을 암송하다 보면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듯이 쓸 만큼을 채워주십니다./  

이렇게 큐티를 하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다 보면 영적인 아비로 성숙해 갑니다. 영적인 아비 단계에는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영적인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놓고 방치한다면 부모라고 존중받을 수 없듯이 영적인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영적인 아비라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아비 단계에는 책임감이 지워집니다. 그렇다 보니 영적인 청년 단계까지는 그럭저럭 자라나는데 아비 단계까지는 자라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에서 맴도는 경우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살아 있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퇴화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을 통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요한은 2장 13절 전반 절과 14절 중반 절을 통해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이 성숙해 갑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부모가 본능적으로 자녀를 돌보듯이 자연스럽게 미숙한 교인을 돌보게 됩니다. 미숙한 교인을 돌보지 않는다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3장 18절을 통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아기가 키가 자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랄수록 우리는 어느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영성의 핵심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나는 작아지고 예수님은 커지게 됩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앎으로 영적 아비처럼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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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34-40 관상과 행동

우리나라 목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겠습니다만 아마 주일을 거룩하고 지키고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는 교인이라는 답변이 많을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못 하고를 가르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잘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칭찬할까요?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잘 했다고 교회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세상에서는 경쟁자를 잔혹하게 쓰러뜨리는 비정한 사업가였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의 형식입니다. 겉모습이죠.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속을 중요시 하십니다. 신앙의 내용을 중요시 하시죠. 그렇다면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여섯 번째 시간으로 관상 그리고 행동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관상을 조용한 기도로 묵상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내면의 침묵으로 묵상보다 높은 경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관상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유대교에는 여러 가지 파가 있었는데 그 중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 그 중에서도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사 오늘날로 하면 신학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35절) 공동번역에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서에는 613가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248개는 ‘하라’는 조항이었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조항’과 ‘덜 중요한 조항’을 나누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율법 중에서 가중 중요한 조항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율법사는 망신을 주려고 별렀습니다. 그러나 유대와 헬라 세계에서 유명한 스승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37-4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가지 율법을 2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적 차원이고, 목숨은 의지적 차원이고, 뜻은 지식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 다시 말해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를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머리로 오늘이 ‘주일이구나.’ 라고 인식했고, 마음으로 ‘교회 가야 되겠네.’ 라고 결심했고, 손발로 차를 운전해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겸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이웃을 행동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도 포함되고 남도 포함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골자라고(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아들을 죽여서까지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솔직히 저라면 제 아들을 죽여서까지 남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장 15절을 통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젖먹이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데 혹시 엄마가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듯이 우리도 신앙이 깊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은 자주 만나고 마음도 잘 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화인 기도를 자주해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나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방통행식의 얕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깊은 기도가 관상이고, 관상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수평적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무한대로 용서해주시지만 이웃은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 서운해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원만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만한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배려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원만해지려면 내가 바라는 만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21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명절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동서를 핀잔하기보다 따뜻한 말로 위로해 보십시오. 시누이가 얄밉다고 삐죽거리기보다 작더라도 정성이 담긴 선물을 건네 보십시오. 사랑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겁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앙의 형식인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맛있는 강정이 속이 비었다면 맛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지키지만 내용이 없으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먹을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있지만 형식이 없으면 좋은 물건을 포장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는 교인이 돼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인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형식과 내용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엮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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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2:1-4 하나님을 체험함

우리 감리교회에는 웨슬리 신학의 4대 원리가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 체험.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제5항은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라고 말합니다. 감리교회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일차적인 원천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모든 영역을 다 다루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연 설명할 이차적인 원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고 신앙을 체험하면서 구원을 확증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다섯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체험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무엘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어머니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를 하고 얻은 아들입니다.(삼상1:11)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아마도 세 살 전후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삼상1:24) 한나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시중을 들며 여호와를 섬겼습니다.(삼상3:1) 그 당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일도 드물었고, 환상을 보여주시는 일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얼른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3 번 들렸고, 그 때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고, 엘리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고 직감하고 어떻게 대답할지를 알려주었습니다.(삼상3:8-9) 하나님께서 4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삼상3:19-21)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듯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말씀하세요.' 라고 귀를 막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교인을 박해하던 사울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행9:1-25)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 받고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추자 그만 땅에 엎드러졌고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사울이 행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 안수하게 하셨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각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사울은 교인을 체포하러 다메섹에 왔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교인들은 광주리에 태워 사울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듯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마귀의 종이었는데 ㄹ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전히 세상일에 얽매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하든 일을 멈추고 주님께 달려가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막1:18)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감리교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지낼 만큼 우수한 인재였습니다. 웨슬리는 1735년 미국 조지아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죽을까 두려워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앉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체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윌리암 홀랜드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웨슬리는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면서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성경의 진리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성령님을 체험해야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1990년 12월 11일 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일주일후면 대학 학력고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낮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강단에 흰옷을 입은 키가 큰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에게 안수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분의 커다란 손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교회를 잠깐 다니다가 청년 시절에 다시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체험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환상과 계시를 자랑합니다. 바울이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한 게 아니라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고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바울도 어쩔 수 없이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은 세 개 내지 일곱 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지구의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우주이고, 셋째 하늘은 하늘들의 하늘인 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글로 옮길 수 없는 장면을 보았습니다.(고후12:1-4) 바울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나님의 말씀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지 체험을 통해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은 단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일 뿐입니다. CCC 성경공부 교재는 성경과 체험과의 관계를 기차로 묘사합니다. 옛날 기차에는 기관차와 연료차와 객차가 있었는데 성경은 기관차입니다. 기관차는 기차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합니다. 기차를 출발하게도 하고 정지하게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이 기차를 움직이는 연료차는 믿음입니다. 이 기차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움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신앙 생활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에너지입니다./ 객차는 우리의 신앙 체험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체험을 강조하지만 객차가 기관차를 따라가듯이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으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체험에 의존하다 보면 신앙이 고조될 때는 열심이지만 침체될 때는 엉망이 됩니다.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듯이 신앙의 일교차가 심하면 시험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감정은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인 체험에 의지하지 마시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면 우리가 머리로 알았던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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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2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처드 포스터 교수와 그의 제자인 게일 비비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인들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지고 나서 전부인양 착각하듯이 신앙의 일부분을 알면서 전부인양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은 [영성을 살다(IVP)]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친해지려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역할 모델입니다. 사람은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면 친해지는데 하나님과는 기도하면 친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기도를 생활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35절을 통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한 장소에 가서 새벽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46절을 통해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마치고 나서 한적한 산에 올라가 저녁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도 기도하셨고 마치고 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요 저녁을 닫는 자물쇠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듯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야하고, 우리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듯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큐티로 아침을 시작하고 가정 예배로 저녁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2절을 통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3절을 통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금식 기도도 하셨고 철야 기도도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도 기도하셨고 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잘해주면 좋아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이 찬양해도 기뻐하시고 우리가 어려워서 호소해도 들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특권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특권을 활용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한가해서 기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38절을 통해 배를 타고 가시다가 고물을 베개로 베고 주무실 만큼 피곤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을 통해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바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신앙인에게 교양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과목입니다. 교양 선택과목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지만 전공 필수과목은 반드시 이수해야 학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교인의 전공 필수과목인 기도를 생활화해야 천국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곤해도 바빠도 기도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하셨는지 누가복음 5장 12-1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주자 수많은 무리가 자기 병도 고쳐달라고 몰려들었습니다. 무리들은 복음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병을 고치는 것은 고기를 잡는 방법을 모르면서 고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막막해집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사람에게 칭찬을 듣기 보다는 조용한 장소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병을 고쳐주는 일은 시급한 일이고, 기도를 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일은 뒤로 하고 시급한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매일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까 정작 기도할 시간은 없어지는 겁니다. 휴대폰도 사용하면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고, 자동차도 운행하면 가스를 충전해야 하듯이, 교인도 세상에 살다보면 은혜가 소멸되기 때문에 기도로 재충전해야 합니다. 태아가 탯줄을 통해 엄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기도라는 영적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파이프가 막히는 겁니다. 막히면 뚫어야 하듯이 기도를 쉬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몸이 피곤하면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해 감기에 걸리듯이 영혼이 피곤하면 마귀를 이기지 못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감기에 걸리면 만사가 귀찮아지듯이 시험을 당하면 교회가기가 싫어집니다. 우리 속담에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우리도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성공해야 인생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기도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 토니 존스 목사가 지은 [되찾은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어떤 청년이 오두막집을 구하고 노수도사를 찾아가 영적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3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횟수를 셀 수 있도록 매듭이 100개가 달려있는 기도 끈을 주었습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고생스러웠지만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6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청년은 기도가 익숙해져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1만 2천 번씩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청년의 혀는 감각을 잃었고 턱은 빠질 듯이 아팠습니다. 청년의 엄지손가락은 기도 끈을 만지느라 쓰라렸고 팔은 부어올랐습니다. 청년은 며칠이 지나자 예수기도가 호흡처럼 편해졌습니다. 청년은 예수기도로 눈을 떴고, 낮에는 예수기도로 감격했고, 밤에는 예수기도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청년은 기도를 반복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청년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자신의 형제와 자매로 여겼습니다. 노수도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청년은 러시아의 대초원을 떠돌며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기도를 가르쳤고. 걷든지 쉬든지, 먹든지 자든지, 성찰하든지 노동하든지 예수기도를 암송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여행과 깨달음을 담은 [순례자의 길]을 남겼습니다. 영성의 핵심을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주셨습니다.(엡5:2)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엡5:1) 청년이 예수기도를 통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기도를 하다보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토니 존스 목사는 예수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 라고 기도했듯이, 숨을 들이쉬면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 숨을 내쉬면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수기도는 정신을 집중하고 단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휴대폰의 배터리가 충전되듯이, LPG차의 가스가 충전되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제는 해결됐다고 믿고 예수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문제도 해결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친해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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