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4:35-41 바람을 꾸짖으시며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다
우리는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울릉도로 교역자 부부 수양회를 다녀옵니다.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톤수는 2,394톤이요 정원은 920명인 ‘썬플라워호’를 타고 소요시간ㄹ; 3시간이 걸리는 울릉도 도동항을 향해 출항합니다. 여객선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푸른 물살을 힘차게 가릅니다. 하얀 갈매기들이 날갯짓을 하며 푸른 물결 위를 넘실거립니다. 우리는 갑판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잔잔하고 우리가 탄 배는 내 집같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혹시 태풍이 불어오면 물결은 거칠어지고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리며 뱃멀미가 납니다. 우리 인생은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순풍이 불어와 순조로울 때도 있고 태풍이 불어와 위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순풍을 만나기도 하였고 태풍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태풍을 만나 위태로울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가장 긴 길이는 21키로 미터이고 가장 넓은 너비는 13키로 미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시자마자 고물(선미)에 베개를 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순풍을 만나 순조롭게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으나 해가 지면서 차가운 바람으로 바뀌면서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은 주로 오후 4-5시에 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녁이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해 어부들이 고기잡이에 나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설사 풍랑이 일어난다 해도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라 대처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사나운 바람으로 돌변했습니다. 우리가 탈 배는 운동장처럼 크다보니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하지 않으나 제자들이 탄 배는 양호실처럼 작다보니 낙엽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이번에는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제자들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은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풍랑에 대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돛을 접어도 배는 바람에 흔들렸고 닻을 내려도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배는 바람에 뒤집히든지 파도에 깨지든지 아니면 차오르는 물에 잠기든지 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은 풍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 예수님도 타고 있다.
제자들은 그제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풍랑을 극복하려고 할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야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파도가 얼굴을 때려도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웠습니다.(막4:38)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신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모른 체 하실 수 있냐며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배 안으로 들어오는 물부터 퍼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4:39)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듯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막1:25,3:12).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바람이 가라앉자 물결도 잔잔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의 농경지에서 농사를 짓고 동쪽의 광야에서 목축을 하는 광야 민족이라 바다를 막연히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에스키모 인들은 눈이 많이 오다 보니 눈이라는 단어가 15개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이 많다 보니 광야라는 단어가 7개가 있었는데, 바다가 없다보니 ‘얌’이란 단어 하나로 바다와 호수와 대양을 모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바다에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나무라셨습니다.(막4:3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무서운 바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놀라워하였으나 예수님은 아직까지도 믿음이 자라지 않은 제자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도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쉽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배를 교회로 생각했고 사나운 바람과 거센 물결을 교회에 닥친 시험과 환란으로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탔지만 풍랑이 일어나 위기에 빠졌듯이 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살지만 시험과 환란이 닥쳐와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에도 풍랑이 불어와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사장으로 모신 직장에도 풍랑이 불어와 파산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담임목사로 모신 교회에도 풍랑이 불어와 분열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모셨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과 모시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돛을 접었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닻을 내렸듯이 사람의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 도달하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봤듯이 그제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듯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호소하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찾아가 애원하는 것은 굳게 잠긴 문을 다른 키로 열려는 것과 같습니다. 문이 안 열립니다. 제키라야 열립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야 깜깜한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듯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위기에서 극복해 주십니다. 반드시 극복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탄 배에는 예수님도 타고 계십니다. 멀리가지 마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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