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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암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671명이 죽었는데, 악성신생물(암)으로 185명(27.6%), 뇌혈관 질환으로 81명(12%), 심장 질환으로 59명(8.8%), 고의적자해(자살)로 34명(5%), 당뇨병으로 31명(4.6%), 운수사고 21명(3.1%)이 죽었습니다. 암은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이 넘었습니다.

1.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질병은 무엇일까요? 나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그것도 제사장이 진찰하다 보니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입은 옷을 찢어버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 질렀습니다.(레13:45-46) 나병에 걸리면 집에서도 쫓겨났고, 마을에서도 쫓겨났고, 회당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혼자 살거나 나병환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았습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무릎을 꿇고 간구하였습니다.(막1:40)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 환자가 예수님에게 찾아온 걸로 보아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이 환자가 예수님에게 엎드린 걸로 보아 아주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환자는 예수님이 나병을 치유하실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환자는 용기도 있었고 겸손하기도 하였고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12) 도전하는 자가 성취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 몸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빠지고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욕설을 퍼붓고 돌멩이를 던질 텐데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7) 이런 마음을 손기철 장로님은 왕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막1:41)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환자와 신체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나병환자는 감격하였습니다. 사랑은 만짐입니다.(Love is touching)/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는데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기도를 손기철 장로님은 왕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말씀대로 믿고 선포하고 행동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찌 보면 거지 기도입니다. 그러나 왕의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해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나병은 곧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 졌습니다. 곧은 갑자기 그리고 완전하게입니다. 나병환자는 순식간에 문드러진 코가 도드라졌고 빠졌던 손가락이 솟아났고 악취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나병환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막1:43-44)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나병이 나으면 제사장의 진단을 받고(레13:16-17),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바치고(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8일 후에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 등을 바쳤습니다.(레14:8) 이런 모든 과정을 마치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병이 나았으니 집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고,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고, 회당에서 예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육체적으로도 고치셨고. 사회적으로도 고치셨고, 종교적으로도 고치셨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하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이 나병을 고쳐주셨다고 간증하고 다녔습니다.(막1:45) 그 사람이 떠들고 다녀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3.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시면서 우리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듯이 우리도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이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듯이 우리도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외롭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회당에 갈 수 없어 종교적으로 버림받았듯이 우리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지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용기 있게 찾아갔듯이 우리도 열일을 제처 놓고 예수님에게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8)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문제를 들고 예수님에게 나오십시오./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듯이 우리도 겸손하게 나와 예수님께서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내 이야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나병환자가 고쳐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고 마음의 상처도 고쳐주십니다. 제사장이 나병을 정하다고 선언했듯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시어 여러분의 영육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병을 고쳐주셨다고 많이 전파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내 질병과 상처를 고쳐주셨다고 간증해야 합니다. 손기철 장로님은 간증하는 소리를 듣고도 질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널리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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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묘사할 때 ‘절망’과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절망도 비극이지만 소외는 더 큰 비극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과 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없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어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처럼 절망감과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하혈병’을 앓았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여인이 피를 흘리는 7일 동안은 부정하였습니다.(레15:19-33) 이 기간 동안 이 여인과 접촉하는 사람들도 부정하였고 이 여인이 만진 물건들도 부정하였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한 사람들은 옷을 빨아야 했고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옷을 빨고 몸을 씻으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는 여인은 아예 기피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피를 흘려도 불편한데 이 여인은 한 두 달도 아니고 일 이 년도 아니고 무려 12년간이나 피를 흘렸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여인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양분이 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부정해 질까봐 슬슬 피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회당에 나가 실컷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회당장이 부정한 여인이라고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피를 흘려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기피대상이 되어 사회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부정한 여인이라고 낙인찍혀 종교적으로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여인은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했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 봤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약값을 치르느라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지만 병의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도 병이었지만 치료받으러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포기하자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을 유지인 회당장의 외동딸을 고치기 위해서 바쁘게 걸어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여인은 망설였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예수님을 놓칠지도 몰랐습니다. 여인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여인이 피가 흐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길을 터주기는커녕 부정해진다고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게 뻔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안수해주지 않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의 숲을 헤치고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서로 밀치고 당기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다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 여인이 게처럼 기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맥스 루케이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 56). 아무튼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흐르던 피가 즉시 멈추었습니다.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그으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피가 멎은 줄 금세 알아챘습니다. 이제 여인은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여인이 뒷걸음치려는데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밀치고 있는데 어떻게 아느냐며 투덜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옷자락을 만졌는지 아시는 눈치였습니다.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앓던 하혈병이 즉시 나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니까 죄를 저지르는 겁니다. 여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은 피가 흐리고 있어 허락도 맞지 않고 옷자락을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피가 멈추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호통 치시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안심시켰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그동안 몹쓸 병에 걸렸다고 집안에서 내쫓겼습니다. 어쩌면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감 속에서 절망하는 여인에게 딸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방탕한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가 뛰어가서 아들을 껴안아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아들로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거지를 아들로서 맞아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버림받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 가족으로 맞아주십니다. 아들과 딸로 맞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가족들은 재산을 탕진했다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인과 옷깃이라도 스칠까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이 옷자락을 만진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성냥개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성냥갑에 긋기를 바라십니다. 성냥개비가 성냥갑에 닿을 때 불이 붙듯이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체험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평안히 가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2년 동안이나 앓았던 고질병을 단숨에 고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도 손쉽게 해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해보여도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이 능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베로니카처럼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낙담하지는 않습니까? 소외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외롭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아들과 딸로 맞아주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여러분에게 평안을 빌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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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1-28 새 교훈이로다.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 목사님은 리더십에는 다섯 가지 수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직위’의 수준입니다. 단지 리더이기 때문에 싫어도 따르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승인’의 수준입니다. 리더를 좋아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생산’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인물계발’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사람을 키웠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인격’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존경을 받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리더가 인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다섯 번째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다섯 번째 수준까지 도달한 리더일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몇 번째까지 도달한 리더일까요? 예수님은 다섯 번째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이 갖지 못한 하나님께서 주신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의 능력, 비범한 행동, 존재 자체가 갖는 힘 등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밥 브리너와 레이 프리처드가 쓴 [예수님처럼 하라] 68쪽에서 인용하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3차례인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매주 찾아오는 안식일에는 마을에 있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에는 상주하는 랍비가 없었기 때문에 회당장은 마을을 방문한 선생에게 설교를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셨고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과 달리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막1:22) 서기관들은 나중에 랍비가 됐는데 무미건조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유명한 랍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권위를 더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는데도 능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님들도 서기관들이 유명한 랍비의 가르침을 인용하듯이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소홀히 합니다. 설교의 권위는 유명인사의 명언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4장 12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말은 육신은 찌를 수 있을지 모르나 영혼은 쪼갤 수 없습니다. 육신은 즐겁게 할지 모르나 영혼은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귀를 즐겁게 하는 세상의 말보다 영혼을 살찌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쫒아내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자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막1:23) 사탄은 타락한 천사이고 귀신은 사탄의 부하입니다. 귀신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조종합니다. 평범한 랍비가 왔을 때는 귀신도 잠잠했는데 비범한 랍비가 오시자 귀신이 요동했습니다. 영은 영으로 통합니다. 예수님도 영적인 분이시고 귀신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는데 귀신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귀신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는데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만 했지만 귀신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결하고 단호하게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막1:25-26)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은 귀신을 잠잠하라고 결박하셨고 나오라고 추방하셨습니다.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막1:26)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도 물리치셨는데(막1:13) 사탄의 부하인 귀신은 손쉽게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다스릴 권능이 있으십니다. 사탄이 지금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나중에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계20:10) 오늘날 연초가 되면 일부 교인들이 점쟁이에게 찾아간다고 합니다. 점쟁이는 귀신의 도움으로 점을 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듯이 용한 점쟁이는 교인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이 악한 귀신을 내쫓았는데 어떻게 점쟁이가 귀신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인생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시간 낭비요 돈 낭비입니다. 하나님은 열왕기하 1장을 통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병이 들자 신하들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 병이 나을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왕하1:3-4) 결국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은 예수님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귀신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꾸짖으시자 귀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막1:27) 그 당시 귀신을 쫓아낼 때는 귀신을 불쾌하게 하거나 겁나게 해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코앞에 지독한 냄새가 나는 나무뿌리를 갖다 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 귀신보다 더 강력한 영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을 불쾌하게 하거나 귀신보다 강력한 영을 찾지 않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리고 능력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온누리교회 장로님 중에 손기철 장로님이 계십니다. 건국대 생명환경과학대학 학장입니다. 과학자입니다. 손 장로님이 매주 월요일 성남에 있는 선한목자교회에서 월요말씀치유집회를 인도합니다. 손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육신의 질병도 치유된다고 합니다. 집회에 참석하기만 해도, 동영상을 보기만 해도, 휴대폰 기도를 받고서도 치유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간다고 합니다. 손 장로님은 [기름 부으심]이란 책을 통해 구약의 선지자, 왕, 제사장은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 직분을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상징이요 실체는 성령님을 부어주심입니다.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면 성령님의 부어주심을 체험하면 누구든지 왕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는 것은 군인이 무기를 들지 않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악하여 말로하면 믿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여줘야 믿습니다. 우리도 기름 부으심을 받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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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개 있습니다.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카이로스'(kairos)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리키고, '크로노스'(chronos)는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인 시간입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낮과 밤이 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크로노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속에 의미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크로노스로도 보낼 수 있고 카이로스로도 보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때가 찼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때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펼치시는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신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매일 모든 백성들을 통치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막1:4)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막1:15)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손과 발로는 세상을 주님으로 떠받들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살 때는 물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잖습니까?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학생이나 부모는 배우고 싶은 선생을 골랐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복음 전파를 도울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가 21킬로미터이고 넓이는 13킬로미터입니다.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1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하였고 호수 주변에 30여개 마을에서 300여척의 고기배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포스코가 포항을 먹여 살리듯이 갈릴리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갈릴리 농부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라 가난했지만 갈릴리 어부들은 그나마 먹고 살만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새벽에 내다 팔았고 낮에는 그물을 손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막1:17)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당시 제자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요구는 나의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계속해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아간다면 가족을 부양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그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간다면 고생하며 살겠지만 그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막1:18)/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막1:19)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갈릴리에서도 손꼽히는 선주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선주인 아버지를 도와 고기를 잡는다면 잔잔한 물에서 고기를 잡듯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순회 전도자인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면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도와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동참한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시간을 흘러 보내기보다는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선주인 아버지와 고기잡이를 돕는 품꾼들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막1:20)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갔습니다.(막1:18,20)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았다면 이름도 없는 어부로 살다 죽었겠지만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다가 순교했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삶을 살지 않고 카이로스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셔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시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머뭇거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9:62) 예수님은 우리도 즉시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고기를 잡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지 말고 사람을 낚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물질을 모으는데 흘려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전하며 의미 있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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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3-51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 제자가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35절에서 42절을 통해 안드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아마 요한이었을 겁니다.)는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하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스승이 전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인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났다.’ 고 증거 하자 예수님을 만나보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이 전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나, 대중전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전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1장 43절을 통해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빌립은 선선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은 학생이나 부모님이 선택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부모님이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선택하잖아요? 선생님이 학생을 선택하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크세노폰을 제자로 부른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기 때문에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요1:44)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빌립도 거부감이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 다니기가 그래도 쉽지만 없으면 교회 다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나다나엘은 다른 복음서에는 바돌로매로 나옵니다.(마10:3,막3:18,눅6:16)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입니다. 빌립이 확신을 가지고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요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히브리어 성경의 처음 두 부분인 율법서(신18:15-18)와 예언서에서 말한 그이 다시 말해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빌립도 나다나엘도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메시야라는 말보다 나사렛이란 말에 귀가 거슬렸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남부인 유대 지방 베들레헴 마을에서 탄생한다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미5:2) 나다나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요1:46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에 있는 인구가 2천 명도 안 되는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는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율법적으로 메시야와 상관없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의 지적이 옳았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한 마디만 덧붙였습니다.(요1:46하) “와서 보라.” come and see.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다 보면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논쟁하기보다 피하는 게 좋습니다. 논쟁에 이겨도 논쟁에 져도 마음이 상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에 반항하는 사람에게는 슬그머니 피하고,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조심해서 다가가고,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담대하게 전하십시오. 씨를 뿌리면 금방 싹트지 않듯이 복음을 전해도 시간이 걸립니다. 씨가 땅 속에 묻히듯이 그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면 하나님이 물도 주시고 자라게도 하시고,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듯이 그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아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빌립이 확신을 가지고 전하자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에게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습니다.(요1:47)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간사했습니다. 형인 에서가 배고프다고 하자 붉은 죽을 주고 장자의 권리를 샀고, 에서가 사냥 간 틈에 변장을 하고 들어가 눈이 먼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기도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1:48)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신실한 사람들은 잎이 커서 그늘이 넓게 드리운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을 묵상하였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다.’는 성경을 묵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려고 감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해 주시기 위해서 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나를 아시는 예수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전지하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요1:49)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시2:7) 이스라엘의 임금(시2:6,습3:15)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성 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면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지듯이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권능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분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경험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알아본 것 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0-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형인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중에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교통수단이었듯이 예수님은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교통수단이십니다. 하늘나라는 KTX로도 KAL로도 갈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체험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주변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구세주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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