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묘사할 때 ‘절망’과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절망도 비극이지만 소외는 더 큰 비극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과 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없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어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처럼 절망감과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하혈병’을 앓았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여인이 피를 흘리는 7일 동안은 부정하였습니다.(레15:19-33) 이 기간 동안 이 여인과 접촉하는 사람들도 부정하였고 이 여인이 만진 물건들도 부정하였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한 사람들은 옷을 빨아야 했고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옷을 빨고 몸을 씻으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는 여인은 아예 기피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피를 흘려도 불편한데 이 여인은 한 두 달도 아니고 일 이 년도 아니고 무려 12년간이나 피를 흘렸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여인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양분이 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부정해 질까봐 슬슬 피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회당에 나가 실컷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회당장이 부정한 여인이라고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피를 흘려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기피대상이 되어 사회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부정한 여인이라고 낙인찍혀 종교적으로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여인은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했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 봤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약값을 치르느라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지만 병의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도 병이었지만 치료받으러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포기하자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을 유지인 회당장의 외동딸을 고치기 위해서 바쁘게 걸어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여인은 망설였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예수님을 놓칠지도 몰랐습니다. 여인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여인이 피가 흐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길을 터주기는커녕 부정해진다고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게 뻔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안수해주지 않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의 숲을 헤치고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서로 밀치고 당기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다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 여인이 게처럼 기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맥스 루케이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 56). 아무튼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흐르던 피가 즉시 멈추었습니다.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그으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피가 멎은 줄 금세 알아챘습니다. 이제 여인은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여인이 뒷걸음치려는데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밀치고 있는데 어떻게 아느냐며 투덜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옷자락을 만졌는지 아시는 눈치였습니다.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앓던 하혈병이 즉시 나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니까 죄를 저지르는 겁니다. 여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은 피가 흐리고 있어 허락도 맞지 않고 옷자락을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피가 멈추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호통 치시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안심시켰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그동안 몹쓸 병에 걸렸다고 집안에서 내쫓겼습니다. 어쩌면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감 속에서 절망하는 여인에게 딸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방탕한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가 뛰어가서 아들을 껴안아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아들로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거지를 아들로서 맞아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버림받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 가족으로 맞아주십니다. 아들과 딸로 맞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가족들은 재산을 탕진했다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인과 옷깃이라도 스칠까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이 옷자락을 만진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성냥개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성냥갑에 긋기를 바라십니다. 성냥개비가 성냥갑에 닿을 때 불이 붙듯이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체험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평안히 가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2년 동안이나 앓았던 고질병을 단숨에 고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도 손쉽게 해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해보여도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이 능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베로니카처럼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낙담하지는 않습니까? 소외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외롭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아들과 딸로 맞아주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여러분에게 평안을 빌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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