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서른에 읽는 삼미라.

책은 책대로 그대로인데 그걸 읽고 또 읽는 나는 많이 변했다. 두가지 포인트. 청춘, 그리고 탈주.



# 청춘


"(p.185) 청춘은 고장난 탱크와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앞에 서있었다." 


스무살에 읽을 때는 전혀 감흥 없었던 문장인데 와닿아버렸다. 

맞아, 내 청춘 또한 저런 모습과 닮았었지. 동의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동의는 어쩌면 나의 청춘시절이 지났다는 반증이다.


"나 아직 20대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청춘'이라는 단어는 부담 스러웠고, "아 20대가 너무길다~" 꾸역꾸역 버리고 싶은 스물아홉을 보냈다. 어느 덧 서른을 맞이한 내가, 나에게 맞는 나이를 가졌다며 기뻐하던 내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던 건 미안해서 일거다. 고장난 탱크처럼 앞으로만 달리던 나 자신에게. 나의 청춘에게



"(p.191) 그녀는 끝없이 울었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므로, 운다는 느낌보다는 증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p.202) 빠빠빠 빠빠빠빠. 그리고 나는, 필름이 끊어졌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대학시절의 마지막 필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아움직이던 내 청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후에도 20대의 나날이 계속되었지만-이후 내 삶은 결코 청춘의 범주에는 들어갈 수 없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5분의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청춘은?!

... 대부분이 필름이 끊어져서 보냈다ㅋㅋ <그녀>의 죽고 싶어처럼 열심히 살자를 입에 달고 다녔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고, 울다가 내가 증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좌충우돌 천방지축. 과도하게 신이났고, 불현듯 우울했다가도, 또 다시 신이 나길 반복. 무언가를 발산하고 토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ㅡ 주체할 수 없는, 감당이 안되는 극단의 어떤 상태의 시기였다. 그래서 참 간절하게 <그녀>처럼 혹은 <나>처럼,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날 것의 나 마저도 함께 견뎌 줄 연인 혹은 동지같은 존재를 바라고 필요로 했더란다. 뭐, 번번히 실패했지만.


확실히 스물여섯 이후 부터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훨씬 덜하게 되더라. 어쩌다 한 번, 발작처럼 엉엉우는 시간들이 있긴했지만, 그 또한 해소가 덜 된 남은 감정들이 었던 거지,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근거는 아니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살아움직이는 것 같던 시간. 그 기억들이 너무 강렬해서, 스물 여섯 이후의 삶은 도통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나의 청춘은 너무나 날뛰는 류의 것이라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한동안은 내가 준 상처들에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를 감당하느라 정신을 못차렸을 정도. (지금도 수습중)


삼미의 마지막장을 덮고나니, 그 후회마저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0대를 정리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음, 깔끔하군.





# 탈주_ 남은 질문들.


애들이랑 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 데, 다 소설속 <나>처럼 살겠다고 해서, 질문하고 싶었던 거다. 

음?? 다들 이렇게 살면?? 세상은 누가 바꾸지? 아예 바꿀 필요가 없어지는 건가?


"(p.297)

지구상의 어떤 양서류보다도 돈 욕심이 없어진 나는 - 늘 조금 이라도 더 나의 시간, 나의 삶을 확보할 수 있는 직장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나는 작은 종합병원의 후생관리 직원이 되었다. 균등하고 변함없는 하루 6시간의 업무. 그리고 그 6시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나의 시간이다.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


생각해보니 이 것도 스무 살때는 전혀 문제 의식 없이 읽었던 부분인데, 결론자체가 불편해져 버린거...


탈주의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저항하자는 물론 기계부품처럼 살지말자는 뜻을 이해못하는 건 아니나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말자.  - 그러니까 "임금노예로 살것이냐 /임금노예란걸 자각하고 거기서 도망칠것이냐" 이 두가지 선택지만 내놓는다.


도망친다는 것 부터 계급적인 행위다 (그들식으로 말하면 '세상으로 하여금 도망치게 하는 것' 이겠지만). ‘적당히 벌고 아주 잘살자’는 생계의 위협을 받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혁명만큼 비현실적인 구호다. 헬조선에선 탈조선마저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리. 소설 속의 <나> 또한 부양가족이나 병든 부모처자가없는 일류대출신의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주의 방식을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다. 두 어깨에 지어진 가족생계의 위협으로 부터 탈주하라고? 이건 좀 약오르는...


'탈주'라는 방식이 지극히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문제다. 연대 혹은 관계가 없다. 그들 나름의 공동체가 있을 수도 있겠는 데, 가능 할런지는 의문.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강요하는 '자기 착취라는 경쟁법칙'을 간파한,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착취를 멈춘 삶.. 더 부연하면 개인이 개인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자기에게 좋다고 판단되는 욕망을 쫓아가는 삶의 형태가 정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일 수 있을까. 


복잡한 미사여구로 포장하지만 탈주는 결국 도망 아닌가. 속세를 떠나 '나 혼자의 삶만' 살겠다는 게 삼미의 결론이라면, 그건 일종의 냉소주의다.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모두 같이 힘을 모아 이 병든 세상을 바꿔보십시다’라는 주장은 무척 피곤한 것일 테니까. 


어쩌면 탈주의 철학은 혁명을 멈춘자들의 투항을 합리화하는 세계관일 지도 모르겠다. 혁명은 포기했고, 연대는 불가능하고, 자본주의는 이미 다 세상을 먹어버렸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하자니 그건 맘에 안들고... 계속 어디로든 도망치자~~ 뭐 이런.


물론, 그 시각의 전복이 주는 쾌활한 기분(소설 속 ‘나’가 잠을 늘어지게 자고 푹~쉰뒤에 느끼는 세상의 발견)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그 생신한 느낌은 '임금 노예'를 멈춤으로서 함께 오는 일시적 해방감아닐까. 


해방이 진짜 해방이 되려면,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바로서야하고, 사회로부터 개인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터,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개인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면, 결론은 무기력일 것이 자명하다. 아무리 내 자신이 그 배에 타고 있지 않더라도, 그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바라만 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지독한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기력. 


자기만의 방식으로 경쟁을 거부한다고 한들,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 일을 고개 처박고 안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하여, 탈주를 계속 해야한다는 건,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처럼 여겨진다. 과연 인간은 유목민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정착하고 싶어한다…


정리하면, 삼미식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철저히 자본주의에 포섭되어있으므로 그 자체가 한계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욕망을 주장하며 혁명을 포기한 지식인들은 -좋든 싫든 진보라고 할 수없을 것 같다. 대중에게 무기력을 설파하니 그게 양아치지. 그리고 혁명이 어떻게 욕망과 함께가나. 자본주의가 욕망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인데. 그냥 솔직히 "욕망을 포기 못하겠는데 자본주의도 아니꼽다" 이런식으로 이야기하지, "지난날의 혁명이 욕망의 포기를 강제했기 때문에 졌다"니 그건 무슨 혁명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억이 막힐 소리냐 …


라고... 그자리에선 

열심히 까댔지만 그래도 난 삼미를 여전히 좋아해 -!


삼미식의 진보라고 했는데, 사실, 삼미는 진보가 아니다. 소설은 진보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덤덤히 그래, 이런 삶도 있다~를 보여주면서 자본주의에게 침을 뱉을 뿐. 소설과 별개일지도 모르지만, 겹쳐져서 내가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삼미식의 삶을 그나마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이들이었나 보다…쩝…



#


생각해보면, 삼미는 스무살에 정말 좋아했던..

나의 첫사랑같은 소설이다.

그래서 이젠 보내줄 생각이다. 안녕, 삼미. ㅠ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게..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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