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4 - 정나라 자산 진짜 정치를 보여주다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4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의 고대 선현들로부터 배우는 정치 철학은 당대의 치세를 이어 오늘날까지도 개혁가와 사상가,정치가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특히 춘추전국 시대는 수많은 정경(正卿)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은 이론과 행동을 겸비한 정경으로서 진과 초나라는 대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처세와 비법을 알게 된다.

 

BC8세기 제의 환공을 시작하여 진시황에 의해 진의 건립(BC221년)되고 진의 문공,초의 장왕이 패권의 자리를 이어받으며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은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이었다.정나라는 그들의 틈 바구니(지금의 안휘성 정주) 속에서 초와 진의 비위를 맞추는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기도 했다.일종의 명분과 실리를 적절히 구사했다는 반증이기도 한데,그는 예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큰 나라 군주가 작은 나라를 찾을 때는 단을 쌓지만 작은 나라 군주가 큰 나라를 찾을 때는 풀자리만 까는 것인데,어찌 단을 쌓는단 말인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로 갈 때는 작은 나라의 허물은 용서해주며,재난을 구해주고,덕과 형벌을 잘한 것에는 상을 주고,부족한 것은 가르쳐 준다.그렇게 하면 작은 나라들은 곤란을 겪지 않고,큰 나라에 복종하기를마치 귀의(歸衣)하는 것처럼 하게 된다고 한다.자산은 예를 군주와 정경의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며 예는 국가의 근간이며 예를 갖춘 분을 죽인다면,그보다 더 큰 화는 없을 거라고 설파한다.

 

BC543년 자산은 정경이 되어 내란의 뒷처리를 잘 수습하고 나라의 기강잡기와 살림살이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부 거대 씨족들은 그의 개혁에 반감을 느꼈다고 한다.그는 국도와 비읍을 구분 짓고,의복으로 상하 구분을 명확히 하고,전지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정전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오(伍)로 편성한다.사대부들 중에서 사치하는 자는 내치고 검약한 사람을 등용하는데 이는 가난하고 문란한 정나라의 현시리을 혁파하기 위한 일로 보여진다.특히 공실을 억누르고 사병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목공의 후예 즉,씨족 세력들을 제어했는데 공실과 씨족의 차별화를 기도한 것이다.단연 씨족의 반발이 컸음에 틀림없다.

 

자산의 언론관은 백성들에 대해 인과 자애를 두루 갖추었다.좌전에 자산과 대부 연명의 대화가 나오는데 당시 향교(鄕校)에 모여 정치를 평했다고 한다.자산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1호였는데 연명은 자산에게 향교를 폐지하자고 건의했다가 된통 혼이 났다.향교는 사람들이 조석으로 나와 어울리면서 집정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는데,옳다고 하는 것은 행하고,그르다고 하는 것은 반성하여 고치면 된다고 하면서 향교에서의 집정 토론의 장을 유지해 나가며 백성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 섞인 여론을 막는 것은 일시적일 수가 있지만 그 여론은 불씨와 같아 언젠가는 크게 터지고,백성이란 물과 같아 배를 띄울 수도 있고 그 배를 뒤지비을 수도 있다고 대중심리를 읽었고 확고한 정치철학을 되새겼다.

 

또한 자산은 군주 간공을 수행하여 진나라에 간 적이 있는데 그들이 체류한 영빈관이 비좁아서 공물을 다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이에 자산은 담을 모조리 허물고는 수레와 말을 모두 안으로 들여놨는데,노나라 양공이 죽어 진의 군주를 못만나고 밖에 있는 진상품을 한 데에 놓으면 이슬을 맞고 썩을 수가 있기에 할 수없이 담을 무너뜨리고 습기와 좀으로 인해 대국에게 죄를 더할까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수시로 들락거리는 도둑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쳐놓는 것은 당연하다.하지만 자산은 소극적으로 기민성과 재치를 발휘하여 담을 허물고 허문 담을 다시 쌓겠다는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귀국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종들의 거처에 사신들을 맞이하려던 진의 사문백은 정식으로 정나라 사절에게 사과하고 정 간공을 평소보다 후하게 대접했으며 영빈관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그래서 손님 접대를 잘하여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빈지여귀(賓至如歸)'라는 성어가 나왔다고 한다.

 

현대 정치에서도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무조건 따르는 사대주의는 국가의 체모와 자존심,대중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된다.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충분한 예와 도리를 지키며 받을 것은 받아 내고 줄 것은 주는 상호선린 외교정책이 대외정치.외교의 일선에 있는 자들에겐 필요한 덕목이다.또한 국내외 정세 및 상황에 따라 방식을 바꿀 줄 아는 지혜와 용단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또한 이론과 행동을 겸비한 자산은 형서를 주조하며 처음의 죄는 용서하되 극악무도한 죄는 발본색원하는 냉철한 법 논리를 견지했다.

 

팔색조의 얼굴을 띤 자산의 정치철학을 통해 인과 자애,엄격함과 관대함,명분과 실리를 균형과 조화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참다운 정경(正卿)상을 보여 주었기에 충분하다.특히 공명정대한 수사와 법의 집행이 뒤떨어진 한국의 현대 정치.검찰계는 자산과 같은 정치행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그것만이 정치후진국에서 정치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이고 요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아는 세계다
왕후이 지음, 송인재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논객인 왕후이(汪暉)에 의한 근대 중국사와 그 주변국들의 동태,현대 중국의 정치사까지 망라한 시공간적인 개념을 담은 이 도서는 중국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분의 글이어서인지 객관성과 일관성이 돋보인다.19세기 중반 영국 무역전쟁으로 인해 제국 열강이 잠자던 중국의 문호를 활짝 열게 되지만 오래 뿌리박힌 봉건주의와 왕권,수구파의 강세로 중국 문명발달은 서구열강과 비교하여 더디게 흘러가고 말았다.20세기 초 쑨원에 의한 신해혁명과 곧바로 이어진 공산혁명,공산당 성립 등이 중국만이 갖고 있는 국체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공리보다 인의도덕을 중시한 중국의 오랜 사상과 인식은 이제야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그들만의 사회주의식 시장경제의 고도화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중국 역사 연구에서 '지역'에 관한 담론과 '지역주의'적 방법을 분석.종합하고 트랜스시스템사회라는 개념을 동원하여,민족주의 지식의 틀에서 형성된 것과는 다른 중국관을 제시하고,이는 서로 다른 문명.종교.종족집단 및 기타 시스템을 포함하는 인간 공동체이거나 사회 연결망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이는 하나의 인간사회로서 물질문화. 지리.종교.의식.정치구조.윤리.우주관 및 상상된 세계 등 각종 요소와 관련지게 되고 '지역'이라는 범주가 인문지리와 물질문명의 기초 위에서 독특한 혼합성.유동성.정합성을 포함하기에 민족주의 지식의 틀을 넘어 중국과 그 역사적 변천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이 든다.

눈에 띄는 대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경제학자였던 후쿠자와유키치의 주창처럼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호마냥 아시아의 본질-유교주의와 그 체제는 유럽의 맥락에 내재해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문화적으로 고도의 동질성을 갖고 있는 아시아의 지역적 특성에다 '탈유교주의'의 정치적인 함의는 중국 중심(중화사상)의 제국 관계로부터 탈피하여 '자유','인권','국권','문명','독립정신'을 지향점으로 삼아 일본을 유럽식 민족-국가로 탈바꿈하게 하는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그리스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유럽이 성숙되기 전 문명의 어머니인 아시아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점이다.

시스템적 변천의 결과로 다루고 있는 티베트의 문제는 위기로 보여지는데 19세기 티베트는 청과 조공관계에 있었지만 영국의 세력 범위로 전락했으며 영국이 조약의 형식을 통해 티벳을 병탄한 것과 달리 청은 티벳을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금병추첨.기타 종교.조공.예의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며,티벳의 고유한 언어.풍습.종교.인습은 중국 공산당 혁명 이후 중국 중앙정부에 의해 티벳의 언어를 비롯하여 그들의 구심점인 종교 지도자들이 망명과 숙청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자연스레 중국중앙정부의 보호와 감시를 받고 있다.또한 류큐(오키나와) 문제도 거론하고 있는데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였던 류큐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침략과 함께 갖은 수모와 예속을 당하다 1871년 명치유신과 함께 일본의 번속으로 전락하고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의 자치령으로 있다 1972년 일본에 반환되는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미일은 페리제독에 의한 조약이 성립되면서 타이완은 일본의 속국이 되고 류큐는 일본의 속지였지만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연합국들이 지상 공격을 벌이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특히 동북아는 서양열강 세력 개방 요구에 어수선한 각축전이 되었으며 이에 질세라 일본제국은 조선을 쉽게 삼키고 만다.결국 외세에 의해 한국과 중국 및 동남아는 고유언어,문화,인습,종교 등이 짓밟히는 아픈 역사를 안게 되지만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제국의 허울은 막을 내리게 되고 새로운 이념과 경제체제를 향해 중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은 국익과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중국 사상가에 의해 쓰여진 방배한 자료와 오랜 세월 각고의 연구 결과 나온 이 도서는 특히 동북아의 정신적 모델이었던 유교주의와 서양과 비교하여 역사의 연속과 단절을 뛰어 넘어
각국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일체성'을 중시하는 공간 개념에 호소하고 있다.푸쓰넨의 '동서',구와하라지쓰조의 '남북',레티모어의 '상호 변방',스키너의 '구조',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에는 다원성.복합성.중첩성.이동성.차별성을 지역 개념 안에서 융합하려는 노력이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가 밝히고 서술하는 아시아 담론은 18세기 중국의 근대화를 통해 중국의 봉건주의,서구열강의 금융자본 확대에 따른 침략전쟁의 확대,세계대전을 통해 약소국이 받은 교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중국 민족주의가 서양 열강의 침략,일본의 부상,중국의 쇠락,중국의 사회-정치체제의 부패,중국의 기술적.군사적 무능은 중국의 위기를 그려내는 척도로 보고 있다.서양 중심론의 핵심이 새로운 규칙을 확립하고 규칙을 보편화하는 데에 있다면 중국은 혁명과 사회주의,국제주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고,민족국가 시대 이전의 정치-문화적 관계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는데 현대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중국의 근.현대화를 통해 중국이 겪었던 약점을 한국측에서도 깊게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보다 세계를 보는 시야가 성숙해지고 아시아의 근대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동북아의 건강한 외교관계와 창성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
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상식은 늘 머리 속에 담고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려 하고 있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기 위한 관문으로서 입사시험엔 일반상식이라는 과목도 있었던 만큼 흔히 알고 있는 좁은 범위의 상식과는 다르게 종교와 철학이 한 시대와 사회를 지배하던 때부터 현대정치사의 상식에 이르기까지의 범위는 폭이 넓으며 적용 범위 또한 지도자부터 시대의 흐름까지 다양하다고 생각한다.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것으로 일컬어지며 개인과 사회집단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상식(常識)은 누구에 의해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인식론적인 타탕성과 구체성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 도서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적 인식론에서부터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쪽 포퓰리즘에 이르기까지 상식은 다양한 각도와 시각에서 다루어져 왔음을 알게 된다.삶 속에는 언어,문화 등의 여러 장르가 있겠지만 노동자,농민,교육의 때가 묻지 않은 미개인,자연인 등과 상식이 깊게 연결되어 있을거 같지만 실상은 한 사회를 리드하는 계층 이를테면 정치인들과 권위자들,광고업자들이 이해타산을 따져 가면서 수시로 만들어 내고 그들의 생명줄을 이어가며 하위층의 부류들은 그러한 것들을 마치 선의에 가득찬 상식인양 따르고 사용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상식의 잣대를 대고 따지기도 한다.그러나 상식은 때론 미신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망상적인 것으로 비쳐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상적이며 전문적이며 독단적인 관점들로 가득하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이는 산업화와 도시화,교육수준의 제고,시장경제와 상업화로 인하여 상식은 양식이 아닌 일부 계층의 전유물과도 같은 성격으로 전락되어 버린 느낌마저 든다.그만큼 현대 사회는 복잡성과 전문성,내부 지식,도시풍,전문적 용어,갈등,파벌,토론 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여 왔으며 철학과 종교,선각자들의 깨우침에 의해 상식은 변화무쌍을 거듭하고 있으며 현대적인 감각의 상식은 도시에 집중해 있으며 인쇄술(쿠텐베르크가 발명)이 발달되면서 인쇄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문화인들에 의해 거의 지배가 되고 생성되며 정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된다.구체적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인간의 오감을 통한 '공통적인 감각'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영국에선 18세기에 와이즈클럽이 주축이 되어 상식을 통한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으며,비티에 의한 '상식과 이성'의 차이 대해서도 깊게 논의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이성은 신과 인간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데 인간의 눈에는 부조리하게 보여도 신의 눈에는 즉 종교에는 이성이 적절히 보이는거 같다.

종교와 철학이 지배를 이루고 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선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선 페인이 주축이 되어 신환경하에서 철학자들의 양식과 스코틀랜드의 지식인들이 강조하던 양식을 절충하고 '미국'대중화 상식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는 국왕과 신하와 같은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닌 모든 인민주권이라는 공화국의 개념 내놓게 되었다.이로 인해 미국 흑인노예들의 삶이 질적으로 향상되었고 이는 벤저민 프랭클린으로의 영향이 컸던거 같다.실용적이고 반귀족인 지혜와 도덕성의 영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나아가 미국의 독립전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인지하게 된다.페인의 '대중'적인 상식은 로널드 레인건 대통령도 참고로 했을 정도라고 한다.

페인의 필라델피아 선언과 헌법이 결국은 평등화와 신격화를 교묘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근대적 형태의 정당화가 '신격화'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포퓰리즘은 '인민'과 상황(진리)을 정확히 이해할 줄 아는 인민들의 능력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또한 포퓰리즘에 대한 반성으로서 러시로 하여금 지혜와 사회적 지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게 했는데 '인간은 모두 똑같이 현명하고,정의로우며,시간적 여유를 누리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상식을 과학과 도덕의 바탕은 물론이고 정치의 바탕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회의적이었다.이것은 인간의 본능인 이익이나 명성,선동의 잠재력을 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즉 인간이 보통 인식하고 있는 상식이 진리인 경우가 드물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정치와 상식의 결합은 재앙이라고 지적했듯 상식은 어느 특정계층의 잘못되고 삐뚤어진 전유물이 아닌 사회 대다수가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지혜와 양식(良識)이 담긴 진정한 포퓰리즘이 사회전반에 형성되고 기류가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즉 대다수의 대중의 인식 능력과 보다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고조하기 위한 설득의 한 유형으로도 상식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해서는 안될 것으로 사료된다.아울러 인터넷 등 웹과 스마트 폰이 발달되면서 사회적 언어와도 같은 상식이 사회적 평준화로 자리매김되어 가고 있으며 사회적 일원인 '나'자신도 상식다운 상식을 몸과 마음에 골고루 입력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보려 한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의 요청과 부름은 언제 어떠한 형태로든 밖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그것은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과 선각자들에 의해 개혁이 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역사는 늘 그래왔다고 생각한다.이런 관점에서 성지 가자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머나먼 여정과 투쟁은 가히 서사적인 장관이 아닐 수가 없다.로마인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시오노나나미(鹽野七生)의 역작 십자군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그녀가 이끌어 내는 스토리의 다양한 배경과 관점이 함께 어우러지고 다양한 인물과 사건,1차 십자군 원정들이 남긴 얘기는 당시의 로마 황제,교황 ,전사들의 성전(聖戰)이 퍽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 반도에 세를 불리던 이슬람세력에 의해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은 중근동(中近東)국가 이를테면 시리아,팔레스티나,이집트,북아프라카를 잃게 되면서 그들의 정신적인 본향인 예루살렘의 해방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던 차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비잔틴 제국 황제 특사를 접견하면서 시대적 요청과 부름을 받고 클레르몽 평의회에서 발현된 결정과 함께 서아시아를 통해 가자와 예루살렘까지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은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로 수많은 전사가 희생되지만 23년간의 기나긴 성지 탈환과 성도 해방은 역사의 멋진 장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그래서인지 예루살렘은 지금도 여전히 성도로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식지 않는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는거 같다.

중세인들의 신앙심이 남달랐고 카노사의 굴욕에 의해 파문에 처한 교황 세력들로 이루어진 성도 탈환은 그만큼 종교의 위력과 깊은 신앙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1096년 8월 15을 출발일로 민중 십자군과 제후 세력들이 하나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 공방전,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전투와 예기치 않았던 상황들로 발생한다.니케아 공략,도릴라이움 전투,험난한 타우루스 산맥 넘기,에데사 탈취,십자군 대 투르크의 전투,이집트군과의 공방전,아데마르 주교의 죽음,식량으로 인한 인육사건이 벌어지고 물부족 등으로 인해 허기진 병사들이 시신이 길바닥에 너부러질 정도였다고 한다.당시 소아시아를 지키던 투루크와의 치열한 전투가 주요 기록일지가 되고 있으며 십자군은 성도 해방을 위해 장애물이 될 만한 적군은 모조리(유대교인까지)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시리앙에서 팔레스티나로 진입하면서 십자군은 합류하고 그들이 바라던 성도 해방은 이루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신이 그것은 바라신다'는 말처럼 그들은 종교과 신앙이라는 커다란 사명하에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을 해방한 후 유럽으로 돌아간 장수들을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으로만 뭉친 기사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는데 저자는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이에 반해 1100년 이슬람 세계를 환호케 한 십자군측의 3대 불행이 눈에 띈다.고드프루아가 죽었고 보에몬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잡혀 있으며 레몽은 콘스탄티노플로 가버렸다(비자틴제국 황제의 부름을 빌미 삼아)는 것이다.이슬람 세계에선 눈에 가시인 존재들이 사라졌으니 기뻐할 만한도 하다.

1118년 23년간 성지 탈환과 성도 해방을 위한 십자군 전사에 의한 에데사 백작령,안티오키아 공작령,트리폴리 백작령,예루살렘 왕령 등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연방국가가 성립되었다.그 해 십자군 핵심 인물 보두앵과 십자군 주역들과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던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이슬람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십자군 1세대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십자군 1세대들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연방국가를 어떻게 지켜 나갔을지가 궁금하다.또한 이슬람측에선 원정을 무릎쓰고 가자와 예루살렘을 지키려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그들만의 체제정비와 방어태세를 어떻게 해 나갔을지도 시대적인 배경과 사명,종교와 신앙심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만하다.개인적으론 시오노나나미작가가 풀어낸 십자군 이야기는 십자군의 여정과 인물,알기 쉽게 풀어 쓴 역사적 견해와 요점,십자군의 이동 경로에 대한 지도 설명 등이 어렵게 느껴졌던 기대치를 벗어나 학습과 흥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가 있어 다행이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 이야기 - 인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리수충 지음, 양성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사필귀정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다.우주의 삼라만상이 나서 자라고 일정 시기에 이르러서는 자연사이든 사고사이든 생명을 다하고 이승과 작별을 고해야만 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일 것이다.또한 ’오는 것은 순서가 정해져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듯 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막연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나 싶다.나 자신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감에 따라 막연하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여 입신양명을 할 것인가’보다는 가족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으로 아끼고 배려하며 신세지고 보답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인간 구실의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쪽으로 삶을 들뜬 자세보다는 좀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며 넓게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해 가려고 한다.

 살면서 병이 들어서 죽고,천재 지변,사고,전쟁,굶주림등으로 죽어가고 죽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나도 언젠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삶을 마감할 날이 올텐데,그나마 살아 있는 동안 몸과 마음이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게 될지는 내 자신과 사회  환경,운명등과 깊게 연관되어 죽음의 시간도 정해지지 않을까 한다.죽음이란 섬뜩하고 공포스러우며 생각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참다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살아 있는자인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인류 역사이래로 어떠한 형태로든 죽어간 사람의 숫자는 850억이 넘는다고 하니 과히 천문학적인 숫자임에 틀림이 없다.현재,앞으로도 계속 인류는 태어난 만큼 생을 마감해야 우주는 건전하게 발전하게 되고 새로운 문명과 문화가 이어져 나가리라 생각한다.동서양의 죽음,죽음의 세계를 지배한다,죽음과 타협하기등 크게 3가지로 분류한 ’죽음 이야기’는 그리 딱딱하고 학술적인 관점이 아닌 이승에서 바라본 죽음과 죽음에 얽힌 갖가지 사연,사고 및 참다운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흔히 죽음에 맞이하게 되면 혼불이 날아가게 되고 육신은 굳어지게 되면서 고요하고 적막한 명계의 세계에 안착하게 된다고 하는데 고대 이집트 및 중국을 보면 죽어서도 이승을 관조하고 다스린다는 신권 사상마저 있음을 알게 된다.파라오의 이름을 풀어라와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면 죽어서도 산자 못지 않은 권력과 카리스마를 감지하게 되는데 이는 살아서의 절대 권력을 죽어서도 그대로 갖고 가겠다는 권력욕에 치우친 욕망의 발화가 아닌가 싶다.비단 이집트,고대 인도,중국,그리스,로마 뿐만이 아닌 전세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특이한 점은 고대 로마,그리스의 권력자들은 죽음에 대해 너무 두려워했던거 같고 중국의 경우에는 유,불,도의 사상의 영향 탓인지 생사초월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과 죽임을 당하는 것도 목불인견의 처참하고도 끔찍한 장면도 수없이 등장하는데 프랑스의 대혁명과 관련 단두대 처형을 위시하여 중국의 어리석은 황제와 형리들의 잔혹한 사형 장면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도 끔직하다.그들은 정권 야욕을 불사르고 배신감을 일소하기 계책으로 그 잔당을 아예 일소하려고 했던거 같다.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할 땐 죄를 지었든 누명을 씌우게 되었든 두려워 사지가 마비되리라 생각한다.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극한적인 ’자살’을 택하여 생을 마감시키는 것도 타인에 의해 처참하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안심입명’이라는 말이 있다.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잘 먹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유족과 남은 사람들에게 가장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살아서 자비를 많이 베풀고 선을 많이 쌓아 감으로써 생전 존경을 받으며 죽어서도 남은 사람들에게 숭앙과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요 죽음이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