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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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은 누구 뭐래도 부족 및 종교간의 전쟁,가뭄과 기아로 저주 받은 땅으로 인식된다.또한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바나 초원 위의 동물들의 생태환경과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자본주의의 물결이 서서히 도입되는 탈바꿈의 대륙이 기대되기도 하는 등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교차한다.인류의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고 화석인 '루시'가 최초의 인류였다는 고증을 통해서도 아프리카는 역사와 문명의 시원(始源)이고 연구해야 말 대상이 아직도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외교관이면서 역사학도인 저자는 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재,미래상을 5개 항목으로 나누어 현실감과 생동감을 균형과 조화있게 풀어내 주고 있다.가난하고 게으르며 굶어 죽어가며 에이즈가 창궐하고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마(魔)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향해 달려 가고 싶은 충동감이 일었다.

 

19세기 중반 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의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며 그들의 영토는 제국주의에 의해 30CM자로 금을 그어 놓은거 마냥 직선과 수직선 일색이다.게다가 적도를 중심으로 그 이북은 이슬람교도가 주가 되고 이남은 기독교가 주가 되는데,둘로 갈라진 종교 세력들의 다툼과 부족간의 학살 사건과 끝없는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만델라를 중심으로 '인종 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반기를 들면서 아프리카에도 민주화의 서광이 떠오르고 만델라는 오랜 세월 옥고를 거치고 보무도 당당하게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된다.

 

아프리카는 '우분투'라는 부족과 부족장을 중심으로 단합과 단결을 보여 준다.환경과 문화적인 요인으로 그들은 나태하고 지능 지수가 낮으며 절대 빈곤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피부색,성기와 두뇌의 크기는 지능지수와 무관함을 알게 되며 문제는 부정부패와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무능하고도 독재적인 아프리카 정부의 썩은 수뇌부에 있고 매년 구호물자와 자금이 아프리카에 유입되고 있지만 정작 힘없는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조족지혈'에 불과하고 그 혜택은 정치권과 관료들의 사복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게 아프리카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의 커다란 맹점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또한 능력보다는 인맥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수한 인재들을 해외로 유출시키기에 인적 부패 구조가 아프리카식 두뇌 유출을 조장(助長)하고 이렇게 무능하고 부패한 사회 인적 구조는 알게 모르게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의식 구조를 썩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이는 멀리 거슬러 15세기 이래 팽창하던 유럽 자본주의의 희생물이 되었고 1960년대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고 아프리카에 대한 특혜 무역 관세와 경제 개발 기금을 제공받고 있지만 유럽이 아프리카에 대한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과 독립 이후 빈곤과 불행의 원이 되고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 지도자에겐 잘못이 없다는 점이다.

 

특이한 독재다도 눈에 띈다.90에 가까운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은 국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독재자인 동시에,대외적으론 백인에 저항하는 흑인 투사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및 리비아 가다피 축출 등 서방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신랄한 비판과 동시에 짐바브웨의 야당으로부터 미국의 유럽의 앞잡이라고 선전된다.

 

그들이 토착신앙으로 믿는 영물들

 

종교적인 문제 역시 그들은 부족장을 중심으로 토착 신앙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현세관과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이 믿는 모든 불행의 근원은 신 또는 죽은 자의 노여움,사악한 정령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겉으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종교가 아프리카 종교를 대별하지만 죽은 조상을 위해 음식과 동물의 피를 땅에 뿌리고 비를 주관하는 정령을 위한(기우제) 의식을 거행하는데 한국의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 의식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들의 토착 신앙은 죽은 동물의 해골가 소뿔,맹수들의 가죽을 통해 사악한 기운을 내쫓고 병자를 치료하는 신비의 약재라고 믿는 것이다.

 

저개발과 빈곤의 대륙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에는 G8 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 대회정책인 NEPAD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서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G8 정상들은 서구의 요구에 부응하고 서구는 원조를 약속했지만 현재 아프리카의 역학 구도는 서구 선진국이 아닌 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Brics) 국가들로 채워지고 있다.아프리카에 대한 선두주자는 당연 중국이다.아프리카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석유와 가스,광물 자원을 선전하기 위한 쟁탈전은 지금도 후진타오를 위시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발 계약과 기간 산업에 대한 건설 붐이 중국 정부 및 민간 기업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노동자들의 비즈니스 개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등 중국은 이제 21세기 경제 대국을 향해 '중화(中華)'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은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서구식 가치가 아프리카엔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먹고살 수 있는 권리(right to subsistence)'라고 생각하며 1970년대 말 떵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 노선이 아프리카르 대하는 중국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되며 아프리카의 정치,사회 문제 등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실익을 챙기려는 중국의 경제 개발 우선주의는 아프리카주의자들에게도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다.

 

이제 아프리카도 복수 저앙제와 선거 제도 도입 등 정치적 자유화도 이루었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의 걸림돌이고 기술 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겐 외세의 불간섭과 경제 성장과 인프라 구조 확보 등 실익이 브릭스 국가의 견해와 일맥 상통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밀월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용없는 성장과 외화 획득을 위해 한국도 이젠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그들에겐 불편한 관계가 아닌 진정한 경제 파트너쉽으로써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익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이를 두고 타산지석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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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천도 - 도쿄의 서울 이전 계획과 조선인 축출공작
도요카와 젠요 지음, 김현경 옮김, 전경일 감수 / 다빈치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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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히데요시의 정한론의 사상이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꾸민 음모와 자료,행위에 의해 섬나라 일본은 그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만천하에 보여 주고 있다.도요토미히데요시,사이고다카모리 등이 눈에 띄게 정한론을 부르짖고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면 이번 <경성 천도>는 도요가와젠요(豊川善曄)라는 흥아연구소 학원장의 치밀한 계획하에 그 전말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비록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경성 천도를 통해 그들은 조선인을 말살하고 그들의 경제 블록을 만주까지 이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고 일본의 침략 발상은 끝이 없는거 같다.또한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 및 정신대 문제 등의 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등 '쿨하게 사과'하는 진정한 자세와 태도를 아직까지도 보여 주지 않고 있기에 한국인의 1원으로서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일본 국내 문제와 도쿄의 지반문제,경제 문제 등을 이유로 한반도의 경성을 일본의 도읍지화하고 부산을 비롯한 철로를 만주까지 연결하여 그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일만(日滿)경제 블록을 구상하고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다.주지하다시피 일본은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대동아공영권','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항구적으로 지배하려 했고 정신과 사상마저도 일본화하려 했던 굴욕의 역사가 있었다.도요가와가 말하는 경성 천도의 핵심은 동양평화의 보전,동서문화의 융합,동아시아의 개발이지만 낱낱이 살펴보면 일본이 안고 있는 인구 문제와 식량 문제,침략을 통한 천연 자원과 경제력 향상을 목표로 조선과 중국을 얕잡아 보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세운 가공할 만한 문서라고 생각된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수호할 수 있는 민족은 일본밖에 없다는 당위성과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대륙의 발판으로 경성으로의 천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경성을 일본의 수도화하고 조선인들을 모두 바깥으로 추방시켜 완전히 일본화하려 했던 점이 참으로 놀라울 일이고 부여족의 남하사(南下史)가 일본으로 건너갔듯 일본이 다시 거꾸로 조선으로 회귀해 간다는 기괴한 발상을 내놓고 있다.

 

일제 강점기 흥아연구소 원장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천도>문건은 말 그대로 강자가 약자를 마음대로 짓밟고 지배하려 했던 저의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아직까지도 일본은 영토에 대한 욕심이 하늘 높은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또한 과거 이웃 나라에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사과도 없는 겉만 선진국이고 속은 추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류국가 일본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일본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한국의 국력를 강화하고 지난 아픈 역사에 대해 청소년들에게도 똑바로 알려 국가의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할 시기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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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 -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G. 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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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역사상 튜더 왕조(1485~1603) 118년간의 5대에 걸친 그들의 치세 및 업적을 살펴보면 개성이 다르고 치세도 다르며 대외관계도 확연하게 다름을 알게 된다.특히 당시의 종교개혁과 신.구교간의 갈등이 가장 크고 영국이 근대화로 이어가는 과도기였으며 '해가 지는 않는 나라'의 기틀을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약 450년간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플랜태저넷 왕조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패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모계혈통인 헨리튜더가 왕위에 오르면서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는데 그가 바로 헨리 7세이다.

 

헨리7세(1485~1509)는 귀족가문의 수를 줄이고 사법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귀족들의 재산압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교회권력과 주교직은 왕실에 공헌한 자들에게 보상이 갔다.헨리7세는 왕권강화와 왕실의 수입을 늘리고 국고를 튼튼히 하기 위해 외국과의 전쟁은 피하면서 국내의 안정을 이루었지만 구두쇠에 폭군같은 이미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헨리8세(1509~1547)는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이며 여섯 명의 부인 중에서 두 명을 처형하는 등 피와 배신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그는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 소송으로 로마교회와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으며 마르틴루터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개신교 확장에 앞장서면서 그가 이룬 업적은 지상권,취임세 폐지법,성직자 복종법 시행,교황 배척하고 영국의 국교를 만들어 스스로 국교의 수장으로 자임한다.대외관계로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적대적인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신중했으며 지방 신사계급 등의 신흥 상류계급을 탄생케 했다.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했는데 그의 실책으로 인해 백성들의 분노와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토머스 울지 등을 처형하고 영국 국교회의 수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토머스 모어,존 피셔 등의 측근들도 숙청하기도 했다.그의 곁에는 늘 크롬웰이 있었다.교회에 대한 지배권은 그와 의논하고 시행했는데 '첫 열매와 십일조 법'은 그에 의해 탄생되었다.

 

에드워드6세(1547~1553)는 9세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생을 마감하면서 짧은 왕권을 행사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오빠에 의해 섭정(攝政)이 이루어졌다.급진적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구.교의 보수주의자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은게 주목된다.

 

메리1세(1553~1558)은 영국 최초의 여왕으로서 당시 스페인과의 합스부르크왕가와 정략결혼으로 조카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하지만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에 펠리페는 스페인에 머무르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섭정에 나선다.그녀는 전통교회로 회귀하고 영국 국교에 반하는 각계각층의 신도들을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하는데 이를 '피의 메리'라고 불리워진다.재위 5년만에 운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탁월한 정치를 펼쳤을 것으로 평가받는다.특이한 점은 남편을 맞이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연애에 대한 관심이나 성적인 흥미를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1세(1558~1603)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장수한 여왕으로서 구.신교를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잉글랜드 국교화의 확립과 국내적 안정을 위해 힘썼으며 근대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칼레를 물리치면서 해상강국으로 부상하고 해외식민지 개척에 대한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일푼의 헨리7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튜더 왕가의 시조가 되고 5대에 걸친 왕가가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종교개혁과 구.교도간의 갈등과 해외식민지의 기초 마련,영국 국교의 수립 및 저항세력 숙청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성향과 기치 등의 면면을 살펴 보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잉글랜드와 주변국에 있었던 프랑스,스페인,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와의 종교적,경제무역,외교적 관계도 다소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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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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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가 발달되었던 서양의 미술을 보노라면 역사적 사건,신화적 영웅들을 주제로 대부분이 스펙터클하면서 장대하며 사실에 가까우리만큼 생생함과 현장감이 농후하다.그러기에 서양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종교 색채,역사적 인물 및 사건,자본주의 정신,인권과 자유 등의 절규를 인식하게 된다.그림은 개인의 생각과 감정도 포함되지만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역사성을 띤 그림 소에는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기에 예술의 경지가 무엇인지도 사유해 보는 시간이 되기에 마음을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서양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 도서는 역사적 인물,기억될 만한 역사 스캔들 및 사건,내면의 정신을 포착한 역사의 정신 요소가 각장별로 그림과 저자의 담담한 해설과 함께 독자들을 매료시킨다.스캔들을 통해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게 하고 독재권력자의 그림을 통해 권력의 달콤함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 세계대전과 같은 그림을 통해서는 전쟁의 참화와 비극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권력을 쥔 통치자는 최고의 통치와 포용의 리더십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달콤한 권력을 쥐고 백성을 공포와 도탄에 빠지게 하는 악군도 존재했다.이는 개인의 머리로 권력의 구도를 그려낼 수도 있지만 그 휘하에 있는 참모들의 역사관,국가관,철학관의 문제도 크게 작용하리라 생각하나다.

 

클레오파트라,퐁파두르부인,오달리스크 등 한 시대를 풍미를 여걸들이다.그녀들은 생존했던 시대적 배경과 생각,감정 등이 달랐지만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경우엔 팜므스탈과 같은 여걸이고 파리 왕족들을 미모와 관능,교양으로 사로잡은 품격의 여인이었고 금남 구역이며 배타적인 공간인 '하렘'은 내외를 따지는 문화에서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 났으며 그림 오달리스크를 보면 요염하고 관능적으로 다가온다.특히 그림 노예시장을 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음으로써 관능의 요소마저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 속에는 우월의식과 계몽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역사적 사건을 대변하기도 한다.유럽 전역을 뒤흔든 흑사병,루이 16세의 처형 장면,피비린내 나는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린 그림을 통해 슬픔과 분노,자책감마저 들게 한다.흑사병,처형,세계대전의 그림은 수많은 인명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인간이 갖고 있는 광기어린 야수성과 자아 도취 정신은 증오심과 분노로 치를 떨게 하고도 족히 남는다.그것은 당대 시대성과 독재 권력,침략의 야욕이 표면으로 분출된 것이고 세계대전으로 자식과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반전운동으로 분연히 분노를 나타내게 된다.

 

그 외에 카리스마,종교개혁,다비드의 역사화,네이처리즘 등을 통해 섬세한 예술의 극치를 맛볼 수가 있으며 벌거벗은 채 태어난 인류의 자연스러운 자유의 표현을 통해 한층 더 고양된 정신작용과 예술의 경지를 읽을 수가 있다.

 

사진이 없었던 먼 옛날 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피사체에 대입하여 그려나가기도 하고 절대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묘사하기도 했던 화가도 있었다.일종의 어용 화가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예술의 자존심을 걸고 창작에 열을 올리는 화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열정과 집념,의지로 진실된 표현 예술을 붓터치의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없는 거장의 혼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비록 고대 서양부터 근대 세계대전에 이르는 서양 역사의 미술사를 통해 생생하고도 현장감 넘치며 관능적이며 네이처리즘에 이르는 그림의 완벽하고 오묘하며 미의 극치를 감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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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퀸 클레오파트라
스테이시 시프 지음, 정경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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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부터 40세까지 22년간 이집트 여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진정한 팜므 파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그녀의 손길과 서명이 있어야 비로소 일이 행해지고 특히 로마,그리스와의 대외 관계 및 동아시아로 세력 확장 등에 있어 외교적 수완도 한껏 발휘했던 인물이다.

 

다만 이 글은 그녀가 재위했던 BC51~30년 무렵의 일이기에 정사(正史)보다는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자료 및 연대기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등을 모아서 그녀의 행실을 편집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마치 그녀의 생전을 잘 반영하고 있어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녀의 대외적인 신분은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서거하고 그 뒤를 프톨레마이오스 13세(그녀의 오빠)가 이어가는데 그녀는 정권야욕과 출세욕에 가득 차면서 로마의 카이사르를 이용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그녀가 이집트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다.또한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5(카이사이온)을 낳고 카이사르는 부루투스 등에 암살 당하면서 클레오파트라는 그녀를 잘 보호해주고 야망을 채워줄 안토니우스와 새 삶을 꾸려 가는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삶의 동반자가 된 이유는 확실치가 않지만 그는 공화정을 복구하려 했고 그녀와 살면서 점점 여성적이고 무능한 이집트인이며 심벌즈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카이사르의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주무대로 로마와 그리스를 자유자재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로마의 두 영웅을 멸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안토니우스를 위해 최대한의 배려도 아끼지 않았으며 그와 오랜 삶을 일구었다.그러나 국정의 주요문제는 자신이 장악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원하는 국정을 세심하게 처리하고 실천하는 실무형으로 보인다.결국 안토니우스는 사망의 원인이 확실치 않은 가운데 생을 마감하고 그녀 또한 철저하게 패했지만 로마 제국에 풍요를 가져오고 신전들을 치장하게 한 장본이었다.로마는 전쟁의 승리로 부와 함게 이집트의 물결이 밀려 들었다.스핑크스,사육 코브라,태양 원반 ,아칸서스 잎,상형 문자가 로마 전역에 퍼져 갔고 그녀의 뒤를 이어 로마에 여성들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면 외관적 미를 추구한다.클레오파트라 역시 입는 의상부터 몸에 치장하는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왕이었던 오빠를 물리치고 로마의 두 영웅을 남편으로 삼았던 불세출의 여인 클레오파트라는 콧대가 너무 높았던지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콧대가 1CM만 낮았어도 세상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한다.그녀는 한 여인에서 일국의 여왕으로 역사를 만들어 갔다.정치,외교,통치에 정통했으며 9개 언어에 능통하고 뛰어난 언변과 카리스마가 그녀를 위엄있게 만들었던거 같다.여왕이며 영웅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영화로 각색되었다고 하니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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