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가 된 사람들
김정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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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흔적을 사회에 남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알기로는 세계인구의 5%만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죽어서도 그 이름이 오래도록 각인된다고 한다.비록 5% 안에는 들지 못해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 육신이 없어지는 날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고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면서 삶의 만족을 위해 후회없는 시간을 만들어 가는 주체적인 생각과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 글에 소개되고 있는 인물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하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철학가,정치가,경영자,탐험가,군인 등에 다양하다.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에 영합하기보다는 명분과 혁신,능력과 열정을 최대한 발휘했던 비범한 인물들이다.개인의 명예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파워 넘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심리와 인맥을 이용하여 난세를 극복했던 인물도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극에 대해 진정한 양심으로 속죄를 했던 빌리 브란트,난세랄 극복하고 천하를 덮은 혁신가 오다 노부나가,낭트칙령으로 신구교의 갈등을 해소한 앙리 4세,인맥관리의 대명사이며 경영의 신인 호설암,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 아문센,정치적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실기를 한 흥선 대원군 등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 개인의 명예와 권력을 독차지 하려는 야심이 가득찼던 야심가들임에 틀림이 없다.큰 틀 안에서 보면 그들은 혁명가일 수도 있고 개혁가일 수도 있다.또한 시대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선구적인 면모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반면에 시대는 달라도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만났을 때에는 그 충돌을 최소화 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자세와 배려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이하게 다가오는 인물은 극지를 탐험한 아문센의 탐험 이력이다.그는 성공 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 외에는 모든 것을 중립적으로 보았던 것이다.특히 탐험대 동료들이 자신의 뜻에 거슬릴 경우에는 가차 없이 버렸던 독재와 냉혈한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결국 아문센은 남극 탐험 도중에 조난사로 밝혀졌다.결국 그는 외로운 리더십을 보여 준 풍운아였던 것이다.그 외 꿈을 현실로 보여준 월트 디즈니의 새롭고 독창적인 일의 즐거움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뛰어난 인물들은 당대에 영향을 주고 그 명성이 후대에 오래도록 이어지면서 지난 과거의 역사로 자리매김되어 간다.자신의 삶의 방식 속에서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들이고 그 영향력이 크기에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물론 이 글에 소개된 21인이 완벽한 인물은 아니지만 분명 폭넓은 식견과 안목,풍부한 경험과 인맥을 통해 그들의 꿈과 목표를 향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고 가치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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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멕 문명의 미스터리 - 고대 멕시코에 존재했던 불가사의한
David Hatcher Childress 지음, 김원 옮김 / 한솜미디어(띠앗)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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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남긴 유물과 유적에 대한 발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인류의 시원과 문명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신비롭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하다.그것은 인류의 근본을 발견하는 것이기에 인류사에 남기는 의미와 가치는 크다고 생각된다.

 

고대 멕시코의 신비로운 올멕(Olmecs)문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기에 지적 호기심이 일어났다.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에 산재하고 있는 올멕문명이 어디에서 왔고 그 문명이 남긴 언어,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남겨지지는 않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올멕인들의 모습은 대개가 뚱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반인반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올멕인들이 어떠한 경로로 중남미에 안착을 하고 그 문명을 남기고 있는지는 아직까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아프리카,유럽,아시아에서 넘어왔을 가능성이 농후한데,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인디언과 같은 몽고 인종이며,그들 유전자에 숨어 있던 흑인의 유전자가 나타나고,그들이 수백 년간 지속되었던 대양무역 선단의 선원이거나 배를 타고 올만 지역으로 이주해 온 외래인이라는 것이다.

 

올멕은 바퀴를 발명하고,구기 경기와 상형문자를 만든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부 멕시코의 해안 끝까지 대부분을 지배한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인류학자들은 올멕 문명이 태평양 횡단의 영향으로부터 기원했다면 신세계 문화 발전의 재구성과 문명 진화의 타당한 이론 형성에 중요한 암시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올멕인들은 중국 환관으로서 대양을 횡단하는 왕이었고 지휘자였기에 섹스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음식과 술이었다고 한다.중국계 올멕 환관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토템과 지역의 영혼과 소통하는 반인반수(인간-재규어)로 지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직까지는 가설과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올멕 문명의 유물은 다양하게 발견되고 보존되어 있다.조각상,두상,피라미드,동굴벽화,가면,두개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그들의 다양한 문명을 남겼는지는 인류 고고학자들의 무성한 가설과 미스터리로 꽉 차 있다.지금도 진행중인 올멕 문명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메소아메리카의 문명의 뿌리를 확인하고 인류의 진보를 확인하는 의미있는 일이 될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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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베 난징의 굿맨
존 라베 지음, 에르빈 비커르트 엮음, 장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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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챠오(芦沟桥)에서 일본인 병사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 기화가 되어 중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세력을 상하이,난징 등으로 확대하게 되는데,1937년 12월13일에 시작된 난징대학살 사건의 참상은 보기만 해도 끔직하다.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은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로 인해 25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그 대학살은 10일간 자행되었다.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어린이부터 노약자에 이르기까지였는데 집단총살,생매장,십자가 매달기,근친상간을 요구하면서 죽음으로 몰아갔던 광란극이었다.이는 20세기 최대의 피비린내나는 참극이 아닐 수가 없다.

 

 

난징대학살 당시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장으로 중국인들을 보호하고 의지가 되어준 독일의 존 라베는 난징대학살의 징조부터 난징대학살이 종료되기까지의 과정(1937.9.22~1938.2.23)을 생생하게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될 무렵 쉰들러가 유대인들을 구출하고 보호했다면 난징에서는 존 라베가 중국인들을 보호하려했던 살아있는 부처였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자행했던 노근리대학살 사건이 상기되었다.명목은 다르지만 무고한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일본의 제국주의의 활극이 되살아나는거 같았다.일본은 아직도 군국주의시대에 한국을 비롯한 근린국들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간 아픈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게 된다.

 

 

지나간 일을 잊지 않아야,뒤에 귀감이 된다(前事不忘,后事之师)는 중국의 격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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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 세계적인 인문학자가 밝히는 서구문화의 근원 10 그레이트 이펙트 2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김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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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원형이라할 만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접하게 되어 무엇보다도 뜻깊은 시간이었다.이 작품을 쓴 호메로스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해석,호메로스 이후의 서양의 철학,문학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기만 하다.움베프토 에코 이래로 문학계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알베르토 망구엘에 의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대한 다양한 각도로 해석하고 추적하는 작업은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아를 포위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오디세이아는 트로이아가 몰락한 후 10년 뒤에 시작하고 있다.작가는 호메로스로 알려져 있는데,저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지은 최초의 이오니아인 작가가 서판 대신 이집트에서 수입한 파피루스 두루말에 시의 텍스트를 써내려 갔으리라는 이야기도 있다.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호메로스는 교육자가 아니고 지식도 없었으며 오로지 모방의 기술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독교 및 이슬람 세계 속에서 해석되기도 한다.베르길리우스 이후 헤에로니무스,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기도 한다.무사토,단테,몽테뉴,라신,알렉산더 포프,블레이크,바이런 포프 등의 문학가가 있으며,니체,괴테 등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나아가 율리시스를 쓴 아일랜드의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중의 하나이다.

 

또한 호메로스는 여성이 아닐까 생각한다.왜냐하면 남성이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고대에는 남성적인 오디세이아가 먼저 나와야 하는데 여성을 상징하는 일리아드가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좋은 의도가 담긴 선언과 영웅주의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루어진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전쟁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는 시간들을 보여 주고 있다.특히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일리아드 8권과 오디세이아 10권이라는 대서사시는 유럽문화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호메로스는 기록에 따라 남자,여자,문학계의 신사나 거리의 악사로 모습을 바꾸기도 했으며,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저자가 호메로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어쨋든 말로만 듣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대한 개괄과 알베르트 망구에의 지적 호기심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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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아마코 사토시 지음, 임상범 옮김 / 일조각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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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쑨원에 의한 신해혁명이 도중에 하차하고 마오쩌뚱과 장졔스의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를 함으로써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후진타오가 주석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50년간의 중국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어 중국의 정치,경제 등의 전반적인 얼개를 직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는 중국 인민을 위한 정치를 내걸으면서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입각하여 중국 정치를 이끌어 간다.토지개혁법,한국전쟁 등을 거치고 1953년 사회주의 건설에 따른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농업생산합작사의 발전에 관한 결의>를 채택되고,1954년에는 전인대(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된다.이어 농업합작사화의 문제에 관하여를 보고 하고,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을 1956년에 발표하기도 하며,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앙정치 무대에 등극하게 된다.

 

 

1958년에는 피폐해진 농촌과 농민을 살리기 위해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지만 실정에 의해 결국 식량난과 일용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서 1962년에는 농가 생산청부제를 확산하고 그해 덩샤오핑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개혁개방 정책에 이를 실질적으로 활용하게 한다.문화대혁명이 없었더라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 주장이 중국 경제정책에 즉각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야오원위안이 신편 역사극 <하이루이파관>의 평이 문제가 되어 장칭 등의 4인방들이 중앙정부체제를 비판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키게 만드는데,당시 홍위병에 의한 지식인,부농,지주,반사회적 인사들이 무차별 인권 탄압과 숙청,하방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후유증은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이다.마오의 사망 이후 4인방에 대한 숙청은 당연한 귀결이다.이어 화꿔펑이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실질적 리더역할을 하지만 권력의 역학에 밀려 덩샤오핑이 새롭게 중앙무대에 등극하게 된다.

 

 

1978년 일본 신일본제철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매료되어 중국 동부 연안 14개 도시를 개방정책의 전위대로 삼고 외자 및 기술도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면서 경제성장을 한층 더 끌어 들인다.그러나 그간 정치적 자유,언론탄압 등은 지식인과 뜻있는 인사들의 불만이 후야오방의 서거를 기화로 촉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텐안먼 사건>이다.중국 중앙정부는 획일화된 사회주의체제는 고수한다는 방침 아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되고 망명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대표적인 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이다.

 

 

1992년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중무역 관계가 직간접 투자형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1997년에는 덩샤오핑의 사망이 있었으며,100년간 영국에 할양한 홍콩을 반환받게 되고,1999년에는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되고 동년 중국은 WTO과 관련하여 미국과 합의가 이루어진다.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는 것도 그 해이다.

 

 

마오에 의한 공산당이 창립되고 인민을 위한 사회 계획도 수립되었지만 오랜 세월 구시대적 봉건적 인습과 사회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제도 및 시스템의 한계,그리고 당권과 권력을 둘러싼 공산당 내부의 권력 암투(대표적인 것이 린뱌오) 등이 중국 정치후퇴를 가져 오게 되었던 것이다.다행히 덩샤오핑의 자본시장 도입으로 중원의 '잠자던 사자'는 늦게나마 기지개를 켜고 지구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 들면서 괄목할 경제성장,파워 있는 정치 권력을 보여 주고 있다.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는 있지만 북아프리카마냥 민주화의 조류가 중국에도 태동할 날이 올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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