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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ㅣ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조선조 15대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넓지가 않다.선조의 뒤를 이은 군주로서 당시 명나라와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 정책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조선 국내 사정은 사색 당파의 횡행과 관료들의 부패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정책 실천적인 면에서 판단이 흐렸던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또한 선조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등극하는 과정에 많은 잡음과 암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감지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하나인 <광해군 일기>는 그가 폐위된 군주 시대의 실록이기에 실록이 아닌 광해군 일기로 명명하고 있으며,이 글은 <광해군 일기>에 기초하여 원문을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광해군 시대의 전.후기의 시대상황을 저자의 해설과 함께 들려 주고 있다.그가 즉위하고 폐위되기까지(1608~1623)의 과정을 3기로 나뉘고 있다.1기는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이고 2기는 1613~1618년 무렵까지이고 3기는 1618년부터 인종반정까지이다.
반정(反正)의 의미는 바른 길로 다시 돌아가 생활하자라는 의미로서 광해군이 군주로서 어떻게 치적을 하고 평가를 받았길래 중도하차하는 꼴불견의 폐위를 당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1기는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대동법을 통해 재정 및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는데,즉위초부터 임해군(광해군의 형) 옥사 문제가 커다란 흉사가 되었다.
2기는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민생(대동법)을 외면한 채 백성들의 혈세로 궁궐을 짓고 경연보다는 친국에 맛을 들이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사건이 2기에 발생했다.3기는 불안안 정정이 극대화되면서 윤선도,이이첨,허균 등의 사대부들이 반목질시하면서 악화일로의 상황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을 뿐아니라 명의 뒤를 이은 후금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도 수습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보여 주지 않았기에 그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인종 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금,부역,신분제의 개혁이 개량적 조치로 폄하되고 탈주자학,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했는데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은 상황의 타개 능력,시스템의 혁신 능력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문제가 아닌 20세기 근대주의자들이 아닌가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그리고 광해군은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 시점에서 운 좋게 부각되는 존재가 된다.
광해군 대 굵직한 현안에는 정인홍이 관여하고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부각하면서 결정적인 인조 반정의 구실을 사게 되었다.대표적인 것은 의병을 핑계로 지방에서 세력을 부리고 괴이한 학문을 주창했고, 이언적과 이황 배척(회퇴변척),사친을 종묘에 들이는 데 앞장서고,경연에서 풍수설을 하는 시문용을 추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고,계축옥사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악언을 퍼붇고,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 외교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매관매직,여알 정치는 알파로 따라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궁궐 토목 공사의 진행과 더불어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광해군 4년(1611년)에 있었다는 점이다.한양의 기운이 쇠진되었으니 술관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른 것이었는데 중론이 한꺼번에 일어나 성사가 되지 못했다.교하의 지세는 풍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평사낙안(平砂落雁)의 형국이라고 한다.현재는 교하신도시로 지정되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허약한 왕으로 인식되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피폐해진 민생과 재정,사회적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론 모든 것이 정지 내지 후퇴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민생 회복,사회 통합,재정 확보,군비 확충,문화 발전 등 내치에 더욱 힘을 썼어야 성군으로 숭앙을 받으며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외교에서 역량과 운신의 폭이 넓었으리라 생각된다.광해군 재위 15년이 남긴 실기(失機)의 업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대통령을 맡고 이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