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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해리포터7 > [퍼온글] 하늘에서 보이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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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푼 : 유독 싫은 남자 스타일 있으신가요? 59.5.xxx.245

오늘..하도 시간이 많이 남아 또 한자 남기네요^^;;;

갑자기 생각난건데요

유독 싫은 스타일의 남자 있으신가요?

스타일이 아니더라도 소소한거 ...

전..맨발에 구두신은 남자가 싫구요

바지에 허리띠 안한 남자도 싫구

검정구두에 하얀 양말의 남자도 싫구

손작고 두툼한거 싫더라구요^^;;;

하긴 저도 남자들이 딱히 좋아할 타입은 아니지만서두...

그냥 생각나서 적었어요

너나 잘해라 하시면 할말 없구요ㅡㅡ;;; 저도 왕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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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달린 리플들...

저는... 간단한 맞춤법 자주 틀리는거랑... 말 자르고 자기말만 하려는 사람.. 남녀를 불문하고 싫더라구요.. 굳이 남자 스타일을 꼽자면.. 금팔지 금목걸이 큰거 번뜩이게 하는거..^^;; 05/29 22:23


손작고야리야리한남자(예전에 키크고듬직한남자 괜찮은맘으로 만나다가 몸에비해 매우작고고운(?)손을보고 정이 뚝떨어짐) 또 뭐가있더라..생각이 잘 안나네요.ㅋㅋㅋㅋ 05/29 22:24


팔자걸음에 금연구역임에도 담배 뻑뻑 피우고-_- 말끝마다 여자가~ 어쩌구.. 음..적다보니 무례한 남자에 가깝네요. 다른 무엇보다 말..네가지 없이 하는 사람!! 윽;; 05/29 22:26


저 여자. 맨발에 구두 신는데요;;; 왜 이상할까...참고로 전 뚱뚱한 사람 싫어요..숨 거칠게 쉬는 사람도 싫고.. 05/29 22:26


손짧고 두툼한 남자..저두 싫어요;;;; 가운데 가르마에 머리 기른거(예전 젝키의 강성훈머리스탈) 진짜 싫구요 몸에 착 감기는 깊게 파인 브이넥 니트에 굵은 체인목걸이한 남자 쏠려요...;;; 다리떠는 남자 싫고, 술강요하는 남자 싫어요 흠흠..;; 05/29 22:29


전 입술두껍구 입술에 개기름 흐르는 사람이랑..입에서 담배썩은내 나는 사람.. 05/29 22:29


말 많은 남자....아니, 남 말할때 끊고 자기얘기 하는 남자. 왕재수요..인간적으로 존경할수 없음. 05/29 22:33


전 머리 긴 장발이 싫어요 05/29 22:42
211.195.xxx.117


길에다 침뱉고, 욕이 입에 붙은남자.. 사고방식이 완전 고루해서 집안일은 여자일이다 라고 생각은 하면서 또 맞벌이를 원하는 남자. ㅋㅋㅋ 전 외모는 어케든 카바하는데요 인간성 안된 사람은 싫어요. 05/29 22:43


말 많고 모든사람에게 친한척하는 남자, 입술이 검은 사람, 깍두기(양아치) 스타일 특히 혐오함. 05/29 22:44


전 여자 밝히는 남자요..안그런 남자가 없나-ㅂ-? 근데 저질적으로 밝히는 남자요.. 돈으로 성도 사고..근데 이게 스타일인가요..ㅋㅋㅋ 05/29 22:45


수염기르는남자, 입술 까맣고 두꺼운남자, 마르거나 뚱뚱한남자, 촐싹대는 남자, 허풍떠는 남자, 음식먹을때 쩝쩝대는 남자 (이렇게 따지는게 많으니 남자가 없는겨 ㅠㅠ) 05/29 22:53


얼굴에 기름흐르는 남자, 너무 마른남자(특히 허리 가늘은 남자 왤케 느끼한가요), 머리올빽한 남자, 시도때도없이 느끼한 멘트 날리는 남자, 말많은 남자...저도 왤케 싫은 스탈이 많은가여....ㅠ.ㅠ(저도 잘난거 하나 없으면서...ㅡ,.ㅡ;;) 05/29 23:06


아무리 스타일이 좋아도 마초맨은 싫어요. 05/29 23:13


얼굴 동그랗고 쌍꺼풀 진~하면서 얼굴에 기름흐르고 머리스탈은 고슴도치고 배나오고 느끼한멘트 날리고 뒷짐지고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요....ㅡㅡ;; 그리고 먼저 전화해놓고 말수가 없어서 내가 대화를 리드하게 만드는 남자요.. 게다가 끊자고 하면 시간많다고 끊지도 않는 남자..ㅡㅡ;; (사실 저도 잘난건 하나도 없어요;; 헤헤..ㅡ,.ㅡ;;) 05/29 23:16


조선시대 사고방식의 가부장적인 남자. 05/29 23:25


저는 외적으로는 입술 얇은 남자요. 악세서리 많이 하는 남자 싫고... 05/29 23:30


마초하구요 여자 외모로 판단하는 남자요 05/29 23:33


수염기르고 장발 05/29 23:39


쌍커풀 찐한 거하고, 뚱뚱 더워보이는 스탈 05/29 23:47


굵은 목걸이나 팔찌하는 남자, 멜빵바지입은 남자 05/29 23:47


스모커, 길거리에 침 뱉는 사람, 나이 먹고도 욕하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 쥐뿔도 없으면서 허세 부리는 사람.. 많네. 05/29 23:49


공중도덕 지킬 줄 모르는 남자. 뒷담화 즐기는 남자, 비관적인 남자, 예의없는 남자. 삼척동자 ㅋㅋ 05/29 23:52


궁금한데...왜 입술까만남자가 많을까요?? 05/30 00:10


머리긴 남자. 마초같은 남자. 질색팔색.... 05/30 00:12


전 능글능글한 아자씨들이 싫어요..왜 있잖아요..스마트한 아저씨들도 많치만 유별나게 기름지고 능글맞은 아저씨들..생각만 해두 웩~ 05/30 01:01


저는 여자 남자 안 따지고 인터넷에 각종 유행어들이 생길대마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 05/30 01:03


잘난척 하는 남자요~ 05/30 01:18


전 콧털 삐져나온 남자요. 면도잘 안하고... 코딱지 보이고... 암튼 지저분한 사람 싫어요. ㅋㅋㅋ 05/30 01:25


전 밥 허겁지겁 빨리먹는남자... 05/30 01:28


저도 입술 까만남자,콧털 삐져나온 남자,얼굴에서 개기름 흐르는 남자,굵은 체인 목걸이 하는 남자,손 작고 두툼한남자,말할때 입가에 거품무는 남자-.-;;키작은남자,키큰데 너무 마른남자..외적으로만 보면 이래요 ^^;; 05/30 01:50


무식하게 털이억세게난 남자. 상체는 마장가젯인데 하체는 마른 나뭇가지...싫고요, 다리 넘 두껍고 알통 팍팍튀어나온남자도 삻어요. 새다리 남자는더 싫거요. 건강하게 자신을 다듬는 남자가 좋아요. (너나 잘~하세요. ㅋㅋ) 05/30 01:59


'멜빵바지 입은 남자' <----- ㅋㅋㅋㅋㅋㅋㅋ 넘 웃겨요..넘 싫을거 같애요-ㅁ-; ㅋ 05/30 02:04


입 작은 남자...쫌생이같아요. 제가 싫어하는 아저씨 두명이 딱 그런스타일...실제 성격도 더러움. 05/30 04:33


마초, 맞춤법 틀리는 남자, 밥 허겁지겁 먹는 남자 싫어요~~ ^^; 05/30 07:59


건방진 뚱보.(정형돈은 그런대로 귀여운 맛이있는데... 하여튼 전형적인 건방진 뚱보 넘 싫어요ㅋㅋ) 05/30 08:28


길거리나 버스정류장에서 담배피우는 남자.뒷통수 한대 때려주고 싶어요,,ㅋㅋ귀고리한남자.욕하는남자..이정도네요,, 05/30 08:52


쫄 나시티에 양복바지 입은 남자요.... ㅠ.ㅠ 05/30 09:00


모자 쓴 남자..-_-ㅋㅋㅋ 일본문화에 푹 빠진 사람 05/30 09:06


여자한테 욕하는 남자,주제파악못하는 남자,계산적인 남자 05/30 09:16


저는요..대머리 하구요..코가 큰 남자 싫어요. 이거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었는데 울부서에 코가 큰 분이 계신데...이분을 알게 된 후로 싫어 졌어요. ㅎㅎ 05/30 09:31


다리심하게 짧은 남자,뚱뚱한 배 한가운데로 벨트 매고..그안에 티넣어서 입는남자.ㅡㅡ 05/30 09:40


주걱턱--; 예전에 잠깐 만났던 엽기적인 넘이 주걱턱이어서 완젼 편견생겨버렸어요.그전까진 없었는데..주걱턱 주제에 자신이 정말 잘생긴줄 알더라구요.자기 엄마랑 친척들이 자기더러 외국영화배우같이 생겼다고 햇다면서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보이는데..참..할말이 없더이다.상처받을까 말도 못하고..쫌생이에..계산적이고..지금도 주걱턱만 보면..그놈 생각이 치가 떨린다는.. 05/30 09:46


쪼리 신거나. 혹은 스리퍼 신거나....암튼간에 양발안신고 발가락 보이는 신발 신은 남자들...여름에 더운건 이해하겠는뎅...발가락에 털이 보송보송 한거보면.....웩 05/30 09:50


저도 손이 두툼한거 싫어요. 욕 잘하는 것도 싫고... 그냥 예의모르고 인간성 별로인 사람이 싫어요-0- 05/30 09:51


남자라는게 벼슬인 양 구는 남자, 금 목걸이 굵은 거 한 남자, 아무대나 담배피는 남자, 스킨십 예사로 하는 남자, 남자들간의 우정이 제일인양 하는 남자(행님~ 뭐 이러면서 남자들간의 의리~~ 이러는 거 정말 싫어요. ) 05/30 09:53


스타일 안 나오는데 머리 기른 남자, 꼭 끼는 청바지 입었는데 몸매 안되는 남자, 말 많은 남자. 05/30 09:55


쫄티입은남자..게다가..굵은체인목걸이까지 하면.완전 정떨어짐...전 이상하게 왠만큼 몸매되도 쫄티입은 남자 싫어요.. 비나 소지섭정도 되어주셔야..감당이 된다는...-_-;; 05/30 10:11


얄밉게 틱틱대는 사람이요 -ㅁ-;; 05/30 10:14


난 혀 짧고 뚱뚱한 남자.무식하고 교양없는 남자도 싫어요 05/30 10:21


말끝마다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남자,,,,,,,,,,,,,,,증말 시러여,,, 05/30 10:35


코 들이마셔서 가래뱉는남자.소리내서 먹는 남자. 손톱에 때낀남자ㅋㅋ특정인을 두고 하는말같아서 미안하네여 05/30 10:46


악세사리한 남자. 장발.다리꼬고 앉는 남자. 마르고 체격 작은 남자. 새다리.공중도덕 안 지키는 남자..절대 용서할수 없는건 대충 이정도 05/30 11:24


여자를 노리개로 이용하는 인간. 여자밝히는 쓰레기.키너무 작은 남자. 05/30 11:29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남자. 엉덩이가 심하게 커서 바지 터질라고 하는남자.. 밥먹을때 쩝쩝대는남자.. 숨소리 완전 큰남자. 05/30 11:30


싸가지없는 새끼. 05/30 11:30


길가면서 담배피는 남자 싫어요 05/30 11:33


길거리에서 담배피는 놈 ..살인충동 일어남.이것 하나만 봐도 열개넘는 단점가진 놈임을 안봐도 알수 있음. 05/30 11:36


여자한테 쌍욕하는 사람, 소리내면서 개걸스럽게 먹는 남자, 안씻고 냄새나는 남자, 손톱긴남자.. 05/30 11:55


외모는 얼굴 검고 왕곱슬에 키까지 작으면 정말 정말 보기도 싫어요 글구 저도 길에서 담배피는 사람. 05/30 12:03


청결하지 못한 남자, 미적감각 떨어지는 남자, 건방진 사오정스탈(무례하고 상대방 말에 동문서답하고 지말만하는 인간 )잔인한 성격, 멍청한 사람 05/30 12:05


밥먹고 이빨사이 낀거 빼는 소리내는 사람. 길가다 스치듯 팔로 내허벅지 툭치는 아저씨들 05/30 12:11


긴머리하고 다니는 남자, 큰쌍꺼풀있는남자, 키작고 퉁퉁하고, 머리벗겨진 남자. 매너없고, 소심하고, 운동못하는 남자. 05/30 12:26


여기 거론되신 스타일 남자분 모두다요 특히 콧털 으악~~ 05/30 12:38


작은 손, 뚱뚱한 몸, 관심없는 자기얘기 하길 (지나치게)좋아하구... 본인 걱정을 해주길 바라는 사람...짜증... 05/30 13:18


슈렉같이 거구에 뚱뚱하고 얼큰이! 증말 싫어요~ 지금도 우리학교에 이런벽돌같은 남자가 들이대고 있어서 환장하겠다는 ㅡㅅㅡ 05/30 13:21


두상안이쁜데 거의 빡빡에 가깝게 미는 사람(어릴때.ㅎㅎ), 주로 화장실서 애용하는 슬리퍼, 것도 찍찍 끌어신는사람, 길거리 아무데나 침 찍~뱉는남자... 모을래야 모을수없는 이 세가지를 모두가진 남성이 있었더랬죠.. 기겁했답니다..ㅡㅡ;;


초면에 담배 피워대는 사람, 키가 170이하인 사람, 배 불룩 나온사람, 들창코인사람, 05/30 14:18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나도 몇건 있다. ㅋㅋㅋ
하지만 어찌 이것을 다 알고 생활하랴.
여자들이 싫어해도 할 수 없지 뭐
내 멋에 사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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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6-0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지저분한 남자, 옷 지저분하게 입는 남자, 책 안 읽는 남자, 매너 없는 남자, 인상쓰고 있는 남자, 부정적인 남자, 소극적인 남자, 남 흉보는 남자, 주관없이 사는 남자, 케세라세라형 남자 등등 셀 수 없이 많지만 이 정도로~~~

전호인 2006-06-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세라 세라는 될대로 되라형인가여?
휴우~~~ 세실님이 싫어하는 유형에는 다행이 속하는 것이 없는 것(있나?)같은데......
괜히 올려가지고 찍힐 뻔 했네.
ㅋㅋㅋ
땀 삐질.... ^-^;;;;;;

Mephistopheles 2006-06-05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이런 내용에 댓글 달리는 내용을 보면 많이 웃겨요..^^
남자 여자를 떠나서 혐오대상을 나타내는 듯 한데 말이죠..^^

전호인 2006-06-0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게 말입니다. 다들 이러한 내용만 찾아다니는 듯한 인상이 듭니다. 아마 칭찬하라는 글이었다면 어땠을 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ㅎㅎㅎ

뚱뚱 2016-11-0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뚱뚱해서 미안하다
 
 전출처 : 히피드림~ > 알라딘 서재에서도 채팅창을 열 수 있다?!

방금 네이버 메인에서 본 기사인데요.

자기 블로그 주소의 앞부분에 http://gabbly.com/ 만 쳐넣으면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채팅창이 열려요.

너무 신기해서 알라딘에 들어와서 해봤는데

되더군요. 근데 현재 제 블로그에 접속하고 있는 알라디너 분들이 없으셔서

채팅은 못해봤어요.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47&article_id=0000081501§ion_id=105§ion_id2=226&menu_id=105

 

위에 링크된 곳에 들어가서 기사 한번 읽어보세요.

너무 신기해요.

우선 gabbly.com 을 자신의 알라딘블로그 주소앞에 쳐서 넣으면 

자신의 아이디가 gabber+숫자

형태로 뜨거든요. 창에 자신이 원하는 아이디를 쳐넣으셔서 아이디를 바꾸면 되요.

알라딘에서 쓰시는 닉네임을 아이디로 하시면 되겠죠.

우리 이거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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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05-2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거 정말 된다. 으흠 덧붙이면 아래와 같이 하시면 되여 요 위에 마이페이퍼 링크주소 있져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86593 이것과 결합하면 됩니당.
요렇게 http://gabbly.com/blog/mypaper/880191 그러면 채팅창이 정말 뜨네여. 우후~~~~

세실 2006-05-29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이건 고단수가 아는건데~~~ 화이팅입니다!

전호인 2006-05-2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그런가여?
메인화면에서 보았슴다. ㅎㅎㅎ
세실님과 채팅하고 싶은 맘에 얼른 퍼왔져! ㅋㅋㅋ
 
 전출처 : 잎싹님의 "잎싹 첫 이벤트 공지"

잎싹 님의 이벤트에 참여하세요. 오늘 49, 총 24975 방문 에지 25명 남았습니다. 첫번째 하는 이벤트가 성황리에 끝날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제가 25000명의 힛을 찍긴 어려울 듯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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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파란여우 > 스무돌 맞는 1987년 6월 항쟁, 그 때 그 사람들

아픈 과거이면서 그래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갖고 생활할 수 있게 끔 하는 절대 잊어서는 안될 과거이기도 하다.  아픈만큼 성숙된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아직 성숙된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어떻게 흘린 피와 땀이었는 데....... 그때 순수했던 정신과 정의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 지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혼란스럽다.
나는 87년에는 군에 있었다. 87년 3월에 쫓기다시피 군에 입대를 했으니까 그 시기에는 아마도 광주 상무대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었던 때다. 쫄따구로서 하늘만 바라보고 빡빡 기어야 했던 훈련 초년병시절이다. 군대가기 전인 86년 8월 퇴계로 세종호텔앞에서 지독하게 당하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서울까지 상경하여 시위를 하다가 쫓기고, 다시 모여 시위하고 그러다가 그늘진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쉬고 있던 전경들 틈에서 고향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막는 자와 시위하는 자가 아닌 친구로서 말이다. 그 녀석이 하던 말이 생각이 난다. "너무 힘들다고 그러니 살살 좀 하라고." 서로 어찌나 복받치던지. 영화같다면 영하같고 소설같다면 소설같았지만 전혀 서정적이지는 못했다.

87년 6월항쟁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참 많다.
6월항쟁이 혁명이 되진 못한 것이 안타깝고, 항쟁을 통해 이룬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민주인사(?)들의 개인욕심에 의해 도로 군사정권이 된 것이 슬프고, 3당 야합으로 민주세력을 분열한 것도 모자라 군사정권과 결탁한 것은 분노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다.

특히 87년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 투표를 군대에서 하면서 고참 몇명과 지시대로 찍을 수 없어 기권하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노태우를 찍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가 개탄스럽기도 하다.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권을 행사할 때였으니까 더욱 그러했다. 군인 표가 60만표라고 하니까 당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노태우가 8백만표, 김영삼과 김대중이 합쳐서 120만표가 넘었으니 군인표가 아니라도 민주인사끼리 통합을 이루고 국민이 염원하는 길을 선택했더라면 진정한 국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는 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젠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피 끓어오르던 20대가 40대가 되었으니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자명하지만 민주화의 핵심이었던 386세대가 천대받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기도 하다.
아직도 독재의 망령을 가슴에 품거나 그들을 등에 업은 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판을 치고, 그들의 지지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민주세력을 자칭하는 족속들은 지리멸렬하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하기도 한다. 이건 아닌 데 라고 자위해보지만 언제 다시 정상적인 세상으로 돌아올런지 그때의 올바른 사고와 정의가 있다면 모든 것이 되돌려 질 줄 알았는 데..........

그리고 경남합천에 전두환의 호를 따서 일해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족속들은 뭐고, 추진을 성사시키기 위해 투쟁한다는 족속들은 또 뭔지. 투쟁이란 말을 이런 곳에 사용해도 되는 건지. 참말로 복잡한 세상이다. 전두환의 호는 "오늘"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순자의 호는 "다음"이고 말이다.
독재정권 당시 각 방송국의 9시뉴스의 시작은 "오늘 전두환***는 어쩌고 저쩌고", "다음 이순자**는 어쩌고 저쩌고". 썰렁한 개그라도 해야 심란스러운 마음이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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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승리였고 시린 상처였다”

스무돌 맞는 1987년 6월항쟁, 주요 대선주자들은 당시 무엇을 했으며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

올해 6월은 1987년 6월 항쟁이 꼭 20년 되는 때이다.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이 분출된 6월항쟁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항쟁의 자식들’은 여전히 현실에서 ‘오늘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을지로 고층빌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던진 회사원과, 하이힐을 벗어들고 구호를 외친 직장인과, 애를 둘러업고 김밥을 말아 나온 아주머니와,자식 걱정에 거리로 나섰다가 시위대 맨 앞줄에 서게 된 할아버지까지.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이 6월 거리의 주역이었다. 대선 주자들도 직·간접적으로 6월의 한 자락을 잡고 있었다. <한겨레21>은 당사자의 증언과 주변 취재, 관련 자료를 토대로 주요 대선 주자들의 6월을 재구성해봤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경제·사회 민주화’와 ‘보편적 인간성의 획득’이라는 6월항쟁의 ‘성과의 한계’를 보살피고 발전시킬 책무를 환기하려는 목적에서다. 보통 사람들의 6월은 어떠했는지 <한겨레21> 기자들의 기억을 통해 되돌아봤다. 6월항쟁에 이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도 점검했다. 편집자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깡마른 서울대 법대 휴학생 원희룡은 6월10일 하루 종일 친구들과 거리에 있었다. 해가 지면 명동성당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거리로 나섰다. 명동성당 농성장에는 얼굴이 하얀 간호대생들과 의대생들도 많았다. 더 이상 80년대 초·중반의 어둡고 비밀스런 소수 운동이 아니었다. 청년 원희룡은 가슴이 뛰었다. 최초로 경험한 ‘승리’의 예감이었다.

명동성장 농성장의 깡마른 청년, 원희룡
“그냥 시위대의 ‘원 오브 뎀’이었죠. 그럴듯한 팀의 멤버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모두가 주인이었죠.”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을지로 고층 오피스 빌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날렸고, 사람들은 음료수를 건넸다. 상인들은 콜록대며 쫓기는 학생들을 문 안으로 옮기고 셔터를 내렸다. “이런 것이었구나.” 뭉클한 느낌에 가슴 한쪽이 아렸다. 주변을 둘러싼 화이트칼라들은 넥타이를 매고 ‘호헌 철폐’를 외치고 박수도 쳤다.

“뭐! 회현동 쪽 경찰이 뚫렸다고?” 이해찬 민주통일민중연합(이하 민통련) 총무국장은 전화를 받으며 벌떡 일어섰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312호 사무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진행 중인 시위 현장 속보가 전화기 너머 다급한 음성과 팩스의 굉음을 타고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사무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녁 7시30분. 회현 고가를 점거한 시위대는 투석전 끝에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해냈다. 뒤처진 태릉경찰서(지금의 노원경찰서) 소속 전경 40여 명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무장해제당했다. 국본 사무실에는 순간 환호성이 넘쳤다. 이해찬은 의자 위로 몸을 무너뜨리듯 쓰러졌다. 한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 대학생의 어이없는 죽음에서 시작됐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1월13일 신림동 하숙집 앞에서 경찰에 불법 연행된 지 11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그는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밤새 이어진 물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댈 것을 추궁받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스물한 살의 젊은 죽음이었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민통련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2월7일(2·7국민추도대회)과 3월3일(3·3평화대행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남대문시장 앞에서 기를 쓰고 소리를 질렀다. 인천을 근거로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동료들과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그는 83년부터 수배 상태였다. 그해 여름을 감색 겨울바지 한 벌로 났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대규모 야외집회를 부담스러워했다. 두 번의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에 막혀 작게 사그라졌다. 박종철의 주검은 한 줌의 재로 변해 얼어붙은 임진강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 회원들이 수련회를 나섰다.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선 이가 이해찬 전 총리다. 왼쪽에서 두 번째는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오른쪽에서 세번째는 성유보 전 방송평가위원장.


군사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4월13일 전두환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호헌 선언’을 내놓는다. 이틀 뒤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4·13 결단을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야 운동권의 ‘꾀돌이’ 이해찬

반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겼다. 5월18일 저녁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미사가 끝난 뒤 김승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됐습니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3320자 분량의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저놈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 열기를 한 곳으로 결집할 도화선이 필요했다. 흩어졌던 민주화 세력은 하나로 뭉쳐야 했다. 5월27일 아침 8시 서울 향린교회에서 모인 재야·학생·종교, 야권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사들은 국본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다. 국본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이하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8일부터 전단이 거리를 뒤덮었고, 시내 곳곳에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중무장한 경찰이 배치됐다.
서른여섯의 이해찬은 재야 운동권의 살림꾼이자 ‘꾀돌이’였다. 그해 시위 기획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2·7과 3·3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지난 두 번의 집회로 경찰이 움직이는 논리를 알게 됐습니다. 경찰 1개 중대는 160명인데, 3개 중대가 한 팀으로 몰려다니죠. 전체 경찰이 100여 팀이라고 한다면 가용 병력은 4만8천 명입니다.” 그는 이 병력이 서울에 동시에 깔리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지만, 전국 분산 시위로 병력이 2만 명 정도만 된다면 뭔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 앞의 사회과학 서점 ‘광장서적’을 운영하면서 책 운반용으로 고물 ‘브리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했는데, 그 차를 끌고 서울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고물 브리샤는 그해 여름 민주화운동권의 ‘이동 상황실’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날이 밝았다. 민청련 초대의장 김근태는 경주교도소에서 6월10일을 맞았다. 그는 삼민투 배후조종 혐의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의 머리·가슴·사타구니를 소금물에 적셔 전기로 지졌다. 그는 고문 사실을 부인 인재근을 통해 폭로했고, 양심수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옥중에서 동료 재소자들과 바깥 일정에 맞춰 민중의례를 하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도 외쳤다. ‘집회와 시위’ 방법은 문짝 두드리기였다. 나중에 그와 함께 옥중 생활을 했던 김영진 현 이기우 의원 보좌관(중앙대 총학생회장 출신)은 “섣불리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러 의견을 취합해 가장 현실적인 ‘처방’을 내놓곤 했죠.” 청년 고진화도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공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항쟁의 승리로 양심수들이 석방됐을 때 그는 나가지 못했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87년을 프랑스에서 <서울신문> 특파원으로 보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그의 어깨 너머 에펠탑이 보인다. 그는 88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날은 두 개 행사가 겹쳐 있었다. 하나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뽑는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당대회였고, 다른 하나는 국본의 범국민대회였다. 전당대회는 정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다. 체육관에는 꽃가루가 날렸고, 치어리더들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범국민대회가 예정된 서울시청 앞 성공회성당은 경찰에 봉쇄됐다. 성당 밖으로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같은 시각 대성당에서는 분단 42년의 독재 타도를 기원하는 종이 42번 울렸다. 인파 속에 노동운동가 심상정이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5년 구로노동자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 500만원, 그를 잡은 경찰에게는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이 걸려 있었다. “역사는 결국 민중의 힘으로 발전한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었죠.” 그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일을 하루 앞둔 1990년 1월21일 경찰에 연행돼 만삭인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징역 1년6개월, 2년 집행유예 형을 받고 풀려나왔다.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한 노회찬
경찰은 6월10일 전국 20개 도시 104곳에서 4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 중 338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지만,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국본 집계로는 시위 참가자가 30만 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밤새워 시위를 벌였고, 남은 이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서울 명동성당으로 숨어들었다. 투석전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또 하나의 젊은 죽음이 예고돼 있었다. 6월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은 오후 5시 ‘범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가해 교문 앞까지 진출했다가 건너편 길에서 전경들이 날리는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았다. 그는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 빠졌다. 국본은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대회’로 정했다. 다시 한 번 대규모 집회가 계획됐다.

날이 밝았다. 6월18일 여성운동가 한명숙은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종로 네거리에 서 있었다. 한국의 진보 여성단체들은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을 결성했다. 그날 여연 회원들의 손에는 꽃이 들려 있었다.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전경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일을 맡았죠.” 어머니들의 뒤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쏘지 마!” 어머니들이 외쳤다. 전경들은 움찔했지만, 호소로 폭력을 막진 못했다. 다시 대규모 충돌이 이어졌다. 빌딩에서 두루마리 휴지와 서류들이 날아왔고, 청년들은 기침을 쏟아내며 돌을 던졌다.

투쟁의 물결은 지방으로도 이어졌다. 노회찬은 인천 부평역 앞에 있었다. 인천에는 조직화된 넥타이부대나 학생운동 세력이 없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밤 9시께 시작돼 새벽 2~3시까지 이어졌다. 그가 이끈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창립된 것은 5월18일 부평역 앞 아스팔트 위에서다. 그는 “가로등만 켜진 부평역 앞을 가득 채웠던 그 함성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현대건설의 회장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았다. 1984년 기자회견장에서 정 명예회장과 함께한 모습.(사진/ 연합)


“저건 뭐지?” 학교에서 돌아온 정동영 <문화방송> 기자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영국 웨일스대학과 카디프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BBC〉의 ‘나인 어클락’ 뉴스였다. “〈BBC〉는 한국 대통령의 영국 방문도 단신으로 취급하는, 영국 중심의 보도로 유명한 방송이거든요.” 86년 그는 민정당을 출입하던 정치부 기자였다. 피 끓는 8년차였다. “전두환 독재의 폭압성이 극에 달해 무척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현장에 있지 못해 아쉽고 죄송했다”고 말했다. 권영길 <서울신문> 프랑스 특파원도 서울에서 날아온 팩스로 고국의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6·8혁명과 비교하는 보도가 많았죠.” 권영길은 “79년 9월 서울을 떠났을 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88년 2월 귀국했다. 손학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원장은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고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의원과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라 불렸다. 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영국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홀연히 유학길에 떠났다. 87년 7월 기사연에서 발행한 <6월 민주화 대투쟁>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는 “선한 세력들이 이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고, 합심해서 악의 세력들을 이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박근혜, 오랜 유폐에서 벗어나다

독재정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국본은 결정타를 준비했다. 6월26일로 예정된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경찰력은 성난 시민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국의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탔다. 국본은 6·10 대회 때의 3배가 넘는 100만 명이 이날 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고 추산했다. 결국 3일 뒤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항쟁은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은 오랜 유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에 이어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육영사업을 뺀 박근혜 일가의 활동을 가로막았다. 그는 국립묘지에서 부친의 공개 추도식도 열 수 없었다. 그해 여름 박근혜는 신당동 집과 능동 어린이회관을 오가면서 지냈다. 87년 7월 어린이회관 안에 어린이 생활교육기관 근화원을 세웠고, ‘근화원’과 정자 ‘목련정’, 교육장 ‘영혜루’의 이름을 지었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부친의 공개 추도식을 열 수 있었고, 10년 뒤인 1997년 정계에 데뷔한다.

투쟁은 끝났고, 6월항쟁의 불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국민들의 관심은 이제 직선제 개헌 이후의 정치 일정으로 옮겨갔다. 넥타이부대가 떠난 대오에 남은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급속한 산업화 기간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울산의 대공장들은 앞다퉈 노조를 세우려 했고, 회사는 결사적으로 이를 막았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6월항쟁으로 오랜 유폐 기간을 마감했다. 1989년 10월26일,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장으로 향하는 그의 주변에 추종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사진/ 한겨레)

6월항쟁 뒤 어느 날 밤 부산과 울산의 판·검사들이 모여 회식 자리를 가졌다. “공안영장 문제로 검찰이 법원과 실랑이할 일은 이제 없겠다”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나왔다. 수긍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모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울산지청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아닙니다. 더 많아질 겁니다. 6·29 선언에는 노동자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잖습니까. 울산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약담당이던 홍 검사에게도 공안 사범이 배당됐다. 공안부 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서였다. “현대중공업 노동자 36명이 송치됐을 때 ‘전원 구속 전원 기소’가 방침이었는데, 내가 맡았던 한 명만 유일하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죠. 대검 공안부장에게 쌍욕까지 들었지만, 한 명이라도 나가야 노사 간 협상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 뒤 공안 부적격자로 찍혔죠.“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은 전국을 뒤흔든 혼란 속에서 열심히 일했다. 6월 한 달 동안 현대건설이 벌인 착공식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카심 가공송전선공사, 쿠웨이트 움구다이르 송전선공사, 쿠웨이트 파하힐 고속도로 교차로 공사 등 여럿이었다. 그는 지난 2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해 “요즘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인데,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는 말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 시절 그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도 맡고 있었다. 위원회는 6월항쟁이 올림픽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호사 천정배는 시국 사건 변호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애초 그의 꿈은 판·검사였지만, “전두환이 주는 임명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변호사가 됐고, ‘김&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사람들은 잡히고, 감옥으로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결국 죽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85년 10월이었다. 2년 남짓 바쁘게 일하던 중 6월항쟁이 터졌다. 이후 시국사건 변호 업무가 줄을 이었다. 87년 대선 때 벌어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을 시작으로 그 뒤 임수경 방북, 문익환 방북, 리영희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받았다.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창립됐고, 창립 멤버가 된다.

시국사건 변호에 숨 쉴 틈 없던 천정배
젊은 이한열이 숨진 것은 7월5일 새벽 2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였다. 7월9일 아침 8시, 연세대 교정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바로 전날 감옥 문을 나온 문익환 목사가 목이 멘 소리로 열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한풀이 춤을 췄다.

장례 행렬은 우리 현대사의 최대 집회로 기록될 만큼 실로 장대한 규모였다. 선두가 서울시청에 다다랐을 때 후미는 아직 연세대 교정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군사정권은 낮게 숨죽여 있었다. 모인 인파가 100만 명이었는지, 200만 명이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그 현장에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 협의회도 없었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은 광화문 쪽으로 머리를 돌렸고, 침묵하던 전경들의 최루탄이 불을 뿜었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다시 모이지 못했다.

이후 양김은 분열했고, 군사정권은 5년 연장됐으며,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세력은 둘로 쪼개졌다. 넥타이부대가 빠진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정권의 탄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20년이 지난 2007년 여름, 깡말랐던 청년 원희룡은 한나라당 재선 국회의원으로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있다. 그는 “6월은 가슴 벅찬 승리이기도 했지만, 가슴 시린 상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달변 정치인으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있다. “6월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이 한데 이어졌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나아졌을까요?” 진보는 길을 잃었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이들은 이따금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해 여름은 찬란했던가. 20년이 지난 일의 성패에 대해 공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때 시민들은 청년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하며 노래를 불렀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그날이 오면> 중) 우리의 수많은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벅찬 함성들이 한밤의 꿈은 아니었으리!

출처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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