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도 반이 지났는데 8월 걸 쓰고 앉아 있네요 -_-;;
<46번째 밀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신본격 추리소설의 1세대 작가로 꼽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 등의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대학생 에가미 지로 시리즈와 본서 <46번째 밀실> <달리의 고치> 등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범죄심리학자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 두 시리즈에서 탐정의 보조 역할이자, 작품의 화자를 맡은 인물들이 바로 작가와 같은 이름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가미 지로 시리즈는 주인공들이 대학생이다 보니 어딘가 풋풋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면, 주인공들이 성인이고 직업상 범죄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은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는 더 전문적이고 냉철한 탐정소설의 흔적이 묻어난다. <46번째 밀실>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45가지 밀실 트릭을 선보여 '일본의 존 딕슨 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노 추리소설가의 집을 방문한다. 궁극의 추리소설을 구상해냈다는 그 추리소설가는 그날 밤 밀실에서 얼굴이 불에 탄 채 발견된다. 궁극의 46번째 밀실 트릭에 그 자신이 당한 것일까? 비교적 소품이지만, 다른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처럼 역시나 깔끔한 맛이 있다. 다만 핵심 트릭이 중동을 배경으로 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모 작품과 굉장히 유사해 보이고, 커다란 반전이나 추리소설 독자들이 헉하고 놀랄 의외의 결말이 없어 조금 심심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아리스가와 아리스 추리소설은 모든 단서를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시하고, 그 주어진 단서만을 철두철미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해 진상에 접근하는 페어플레이 게임이라 여러 번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다른 신본격 추리소설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길. 무엇보다 이 작가 작품의 최대 매력은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호감가게 그려진다는데 있는데, 시크하지만 은근히 속정이 깊은 히무라 히데오와 잘난 친구에 경탄하다가도 가끔 한번씩 툴툴대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콤비가 보여주는 귀여운 우정에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2 - 에도가와 란포>
우리나라에서 출간된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 없었던 에도가와 란포의 전단편집이 마침내 완간되었다. 1, 2권은 '본격추리', 3권은 '기괴환상'이라는 주제로 분류되었는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단편집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세계에 경도된 일본인 하라이 타로가 포를 연상시키는 필명을 사용한 것인데, 그는 한마디로 일본 추리소설의 천황 격인 존재. 1923년에 암호 미스터리인 '2전 동화'로 데뷔한 그는 1965년에 타계하기까지 수십 종의 추리소설을 남겼고, 일본탐정작가클럽을 창설해 에도가와 란포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의 시상식을 주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의 발전에는 란포의 그림자가 짙겨 드리워져 있는 셈인데, 그는 관음증이나 사드-매저키즘 등의 이상 심리를 소재로 한 일종의 '변격' 추리소설로 일가를 이뤘다. 작가 본인은 본격추리소설을 더 선호했지만, 독자들이 변태, 괴물들이 등장하는 기괴한 추리소설만을 원하는 데서 나오는 괴리감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개인적으로도 란포의 참맛은 3권 '기괴환상' 편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본격추리도 요즘 보기엔 어쩔 수 없이 트릭이 좀 단순한 감은 있지만 꽤 볼 만한 편이다. 무엇보다 맨 뒤 작가 코멘트 읽는 맛이 쏠쏠한데, "한번 인기를 끌었던 1인2역 트릭을 또 사용해 부끄럽다.", "딕슨 카의 트릭을 차용했다." 등등 굉장히 솔직한 편이라 거장 란포의 창작 비결을 듣는 재미가 컸다. 2권에서는 '호반정 사건', '나는 누구인가', '음울한 짐승' 정도를 추천하고 싶다.
<산 자의 땅 - 니키 프렌치>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는 잘만 사용하면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없는 듯하다. 어릴 적에 아동용 축약본으로 읽었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공포의 검은 커튼>도 기억이 사라진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내용이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부적인 내용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날 정도니까. <산 자의 땅> 역시 기억상실과 납치가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 20대 여성인 주인공이 눈을 떠보니, 외딴 창고에 온몸이 묶여 있는데 이 일을 저지른 복면 남자가 하루에 한번씩 찾아와 물과 약간의 먹을 걸 주며 그녀를 사육한다. 복면 남자가 자신을 죽이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한 주인공은 병원에 입원하고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사건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상실에 빠져 핵심적인 사항을 거의 떠올려내지 못한다. 더구나 주인공은 가정폭력의 희생자로 우울증 약물 치료를 받은 전적이 있어, 경찰과 의료진의 결론은 아무래도 이 여자가 쇼를 하는 것 같다, 로 내려진다. 혹시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면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노리는데, 주변의 어떤 사람도 주인공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시작부터 강렬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납치된 순간부터 탈출 과정을 그린 초반 80페이지는 순전히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되는데, 궁지에 몰린 주인공의 안타까운 모습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바쁜 일을 하던 도중이었지만 한번 잡고 그대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 읽고 내린 결론은 중반부까지의 놀라운 재미에 비해 결말이 조금 아쉽다는 것.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복면 남자에 맞서 오히려 그의 정체를 먼저 찾아내 역습을 가한다는 대강의 플롯은 좋은데, 범인을 발견하는 과정이 좀 쉽고 단선적이라 맥이 좀 빠지는 걸 느꼈다. 작가들이 흔히 소재 자체가 너무 매혹적이라면 결말까지 탄탄하게 구상해놓지 않고 집필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역시 그런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 이시모치 아사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본격 미스터리 대상'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히트작 <용의자 X의 헌신>과 마지막까지 1위를 다투던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우고 있다. 사실이라면 꽤 흥미로운데, 두 작품이 은근히 유사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둘다 범인의 범행 과정이 처음부터 제시되는 도서추리소설이라는 점과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하는 자와 그 범행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두 천재의 지략 대결이 핵심이다. 추리소설을 범인을 알고 보면 무슨 재미? 하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잘쓴 도서추리소설의 재미는 본격추리소설 못지않다. 범인과 범행 수법이 처음부터 제시되니, 핵심인 탐정이 '어떻게' 범인의 철벽 같은 트릭을 깨부수는지를 차근차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탐정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사건의 행방을 미궁으로 유지하려는 범인의 처절한 노력과, 범인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단서를 모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탐정의 활약, 그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마치 탁구 경기를 보듯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게 도서추리소설을 즐기는 가장 큰 포인트. 이시모치 아사미는 촉망받는 신예 추리소설가로 과연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산뜻한 맛과 더불어 상당한 몰입감이 있었다. 다만 범인의 지력이 탐정보다 한 수가 아닌 두세 수 이상 떨어져, 이 점에서는 <용의자 X의 헌신>만 못한 것 같다. 대체 범인이 왜 그렇게 뻔한 실수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나중에 곤란할 텐데, 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정말로 뒤에 가서 다 범인의 발목을 잡더라. 무엇보다 최고의 패착은 동기가 너무 허황되다는 점. 해설을 쓴 미쓰하라 유리도 그 점을 지적했지만, 나도 거기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핵심과 아예 무관해서 따로 노는 동기(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등)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인 왜 범인은 살인 현장의 문을 그토록 오래 닿아두려 했는가, 와 직결되는 부분이라 더 보아넘기기가 곤란했다. 그래도 모처럼 기대해볼 만한 작가가 나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다른 작품들도 계속 출간됐으면 좋겠다.
<페이드 어웨이 - 할런 코벤>
전직 NBA 선수 출신이자, 현재는 스포츠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마이런 볼리타의 세 번째 이야기. 시리즈 제1편 <위험한 계약>에 이어, 2권은 건너뛰고 3권 <페이드 어웨이>가 먼저 나왔다. 이번 편에서 마이런은 NBA팀 뉴저지 드래건스(실제로 뉴저지의 팀은 넷츠Nets다)의 간판 스타 그렉이 실종된 사건을 맡게 된다. 마이런과 그렉은 대학 시절 라이벌이었지만, 마이런이 그렉의 여자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적이 있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기에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선수로 복귀해 팀원들 사이에서 나도는 소문들을 바탕으로 서서히 그렉에게 접근해가는 마이런. 사건의 배후에 감춰진 진짜 실종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소설도 좋아하지만, TV의 스포츠 중계도 놓칠 수 없다는 사람이 마땅히 봐야 할 책이 할런 코벤의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다. 이번 작품에서 마이런은 NBA 선수로 활약하는 한편 탐정으로서의 업무도 게을리하지 않는데,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화려하게만 보이는 NBA 스타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나 라커룸의 풍경, 들뜬 경기장 분위기 등등이 낱낱이 스케치되어 있어 NBA 팬으로서 너무 재미있었다(실제 선수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을 모티브로 한 선수들은 여럿 발견된다). 더구나 할런 코벤은 제프리 디버 못지않은 반전의 제왕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가 쓰는 다른 스탠드얼론 스릴러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유쾌한 재담꾼 마이런 볼리타의 농담 한 마디 한 마디는 배꼽을 간질이고, 독자들의 짐작을 철저히 배반하는 결말도 한 방 제대로 뒤통수를 때린다.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대작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이번 달에 본 작품들이 어딘가 한 군데씩 아쉬운 데가 있어 개중 가장 나은 이 작품을 이 달의 미스터리로 결정했다.
2009년 8월의 미스터리: <페이드 어웨이 - 할런 코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