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없는 살인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1990년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교적 초기 단편집. 게이고는 긴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매만지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 보통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더 실력 발휘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탐정 갈릴레오>나 <예지몽> 등의 연작 단편집을 제외하고는 그간 국내에 일반 단편집이 소개된 적이 없기도 했다. 이 타고난 스토리텔러가 단편은 어찌 쓸까 궁금하던 차에 읽어봤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아무래도 20년 가까운 시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 낡은 느낌도 들고, 이거다 하고 서슴없이 내세울 만한 걸작 단편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심심할 때 읽으면 딱 좋은 전형적인 히가시노 게이고 표 미스터리로 큰 부족함은 없는 듯. 수록작 중 '작은 고의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 게이고의 작풍을 대변하는 물리트릭+학원물의 공식을 사용해서 반가웠지만 2프로의 아쉬움이 남고, 표제작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작가가 잘 구사하지 않았던(그래서 이건 못하겠지 했던) 서술트릭을 표방한 작품이라 트릭에 대한 게이고의 천착에는 한계가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내 기준에는 사회파에 가까운 '춤추는 아이'의 안타까운 결말이 가장 기억에 남고, 제일 훌륭한 작품으로 보인다. 각 단편들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어느 선 이상의 재미는 항상 보장하므로 초보 미스터리 독자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표지에 '출간 2주만에 3만부 돌파'라는 스티커를 붙였던데, 솔직히 믿을 수도 없는데다 벗겨버리면 그만인 띠지도 아닌 스티커를 표지에 붙여 표지 디자인을 망치는 행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뒤마 클럽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불리우는(본인만 그렇게 주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레베르테의 팩션 스릴러. 어떤 고서든 찾아주는 책 사냥꾼 코르소가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는 <아홉 개의 문>이라는 고서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편 코르소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육필 원고의 진위를 밝혀내라는 의뢰도 받고 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삼총사>의 악역인 로쉬포르 백작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나타나 살인을 일삼는다. 우리가 흔히 알지 못하는 고서 수집, 복원, 감정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차용하고 있기에 비교적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간략히 줄거리를 설명한 대로 크게 <아홉 개의 문>과 악마 루시퍼, 그리고 <삼총사>와 뒤마에 관한 이야기의 두 흐름으로 진행되는데, 두번째 이야기인 <삼총사>와 뒤마에 관한 결말은 독서가들(특히 추리소설 독서가들)이 저지르는 본능적인 실수와 오류를 파고들어 아주 기발했고 크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다만 전 세계에 세 권만이 남아 있다는 <아홉 개의 문>에 관한 이야기는, 책에 있는 악마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타로카드를 닮은 9장의 그림들이 실제로 그려져 있다)들의 차이점을 조목조목 비교, 분석하는 등 초반에는 무척 흥미로웠으나 결말에 이르러 대충 끝맺었다는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여운이나 독자에게 결론을 맡기는 식의 문학적 테크닉이 아니라, 단순히 작가가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 끝낸 느낌이었다는 말씀. 책을 다 읽어도 시원하게 해결되는 맛이 없다. 개인적으로 반은 재미있고, 반은 허접한 이런 류의 책이 참 추천하기 난감하다. 조니 뎁이 코르소로 나오고,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나인스 게이트>라는 영화로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백기도연대 雨 - 교고쿠 나츠히코>

 

2006년에 <광골의 꿈>이 나온 이래 3년간 소식이 없는 '교고쿠도 시리즈'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스핀오프격인 <백기도연대 雨>를 먼저 읽기로 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헌책방 주인이자 음양사, 더구나 아웃사이더를 방불케 하는 속사포 수다쟁이 교고쿠도와 그의 친구인 염세주의 소설가 세키구치, 타인의 기억이 보이는 미중년 탐정 에노키즈 등의 교고쿠도 패밀리가 협력해 좌충우돌 온갖 괴사건을 해결하는 게 원래 시리즈라면, <백기도연대> 시리즈는 비교적 조역에 가까웠던 에노키즈가 전면에 나서는 연작 단편집이다. 교고쿠도 시리즈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기묘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총출동하는데(그래서 이 시리즈를 캐릭터성을 중시하는 라이트노벨의 원조격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에노키즈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엽기 탐정이다. 본인을 신으로 생각하는 방약무인함과 절대 추리를 하지 않는 기기묘묘한 탐정질(살해 장면이 머릿속으로 보이는데 왜 추리를 하겠는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우왕좌왕하다 끝에 가서는 결국 사건이 해결되니 다행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화자의 선택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나'라는 1인칭 화자는 우연히 에노키즈에게 사건을 맡긴 다음부터 교고쿠도 패밀리를 접하게 되는데, 세상에 이런 잡놈들이 어디 다 숨어 있다 이제 나타났나 싶을 정도라 가치관에 혼란을 겪게 된다. 이제 충분히 시달렸다 싶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에노키즈와 교고쿠도 친구들을 찾는 '나'. 이는 아마 이 시리즈를 접한 독자의 마음이 아닐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런 괴물들에게 질렸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독자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절묘하게 공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창조한 이 인물들에게서 당신들은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작가의 강한 자신감과 이 시리즈를 그토록 사랑해준 독자들까지 작품에 참여시키고야 마는 팬서비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설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매년 그해 출간되는 일본 미스터리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는 발표될 때마다 일본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랭킹이다. 1989년에 시작된 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최초 1위작은 바로 지금 소개하는 후나도 요이치의 <전설 없는 땅>. 욕망으로 꿈틀대는 남미를 배경으로 일군의 거친 사나이들이 거액의 돈과 천연자원을 놓고 격돌하는 일종의 모험소설로서, 작가인 후나도 요이치는 국제모험소설이라 불리는 이 장르의 장인이다. 어떻게 보면 펄프작가 이원호의 <황금의 땅>을 연상시키는 테스토스테론 과다분비 액션활극이라 할 수도 있지만, 30년 넘게 남미와 동남아를 누비며 직접 취재를 하고 당대 제3세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책 속에 담아내는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한 편의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말초적인 재미에만 치중하는 여타의 활극과는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무척 좋아하는 개빈 라이얼의 <미드나이트 플러스 원>을 연상시키는 고독하고 허무한 남자들과 피를 뿜는 총격전. 한마디로 남성들이 즐길 요소가 가득하다. 참고로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휴양지로 유명한 필리핀 세부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 외에 이 작품이 유일하게 소개되었다. 개인적으로 후나도 요이치 또 하나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작인 1992년작 <모래의 크로니클>과 일본모험소설협회 대상<거친 방주> 정도는 더 보고 싶은데, 과연 나와줄런지...

 

 

 

2009년 7월의 미스터리: <전설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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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9-08-1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클럽은 몇년전에 봣는데, 나인스게이츠를 먼저 보고 봣었는데도 영화보다 소설이 별로 였던 느낌이었어요.ㅠ ㅠ 사실 너무 지루해서 죽을뻔....;; 지금은 얘기조차 기억 안나네요.ㅠ ㅠ
그나저나 제다이님 오랜만입니다.^^

paviana 2009-08-1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제다이님 오래간만이세요.
백기도연대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ㅎㅎ

jedai2000 2009-08-1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저는 영화는 못 보고, 소설만 읽었는데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다 막판의 허무한 결말을 보고 급분노를-_-;; 영화를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 정말루 너무 오랜만이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파비아나님...파비아나님도 진짜 완전 반가워요^^;; 잘 지내시죠? <백기도연대 풍>은 아직 안 봤는데 어서 읽어야겠어요. 무더운 여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어요. 건강 관리 잘 하세요^^


쥬베이 2009-09-1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누나도 완전히 히가시노 게이고에 빠졌어요
저는 별론데, 좋아하더라고요ㅋㅋ
<범인 없는 살인의 밤>, 띠지인지 알았는데 아니어서 황당했었는데
제다이님도 그러셨네요^^

jedai2000 2009-09-1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은 난이도도 비교적 쉽고, 스토리가 흡입력이 아주 강해서 미스터리 초보 독자들에게 아주 잘 맞죠. 저도 그래서 추리소설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늘 게이고를 추천합니다 ㅎㅎ 이런 홍보 스티커는 최악이예요. 애써서 표지 디자인 잘 해놓고 상품 광고로 가려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