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방불명자 - 오리하라 이치>

서술트릭으로 유명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작년에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도착 시리즈'의 1편 <도착의 론도>가 나와 반응이 좋았는데 나오라는 2편 <도착의 사각>은 안 나오고, 다른 출판사에서 의외의 작품이 출간된 셈이다. 참고로 <행방불명자>는 <유괴자> <실종자> 등 <OO자> 시리즈의 최신작이란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리 차일드의 작품 제목을 <추격자> <탈주자>로 역시 <OO자>로 내고 있는데, <노숙자>를 누가 먼저 쓸지 귀추가 주목된다. 언제나처럼 장기인 서술트릭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지방의 명문가 4인 가족이 어느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사건을 조사하는 르포라이터의 이야기와 우연히 여성들을 습격하는 괴한의 정체를 알게 된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서술트릭이란 독자들이 오로지 작가의 서술을 통해서만 정보를 제한적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다는 문학 텍스트의 구조적인 한계를 이용하여 함정을 파놓은 걸 뜻한다. 오리하라 이치는 '나'라는 1인칭 주인공을 사용해 서술자의 성별을 숨긴다든지(독자는 '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 소설은 영상처럼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재-과거-미래를 마구 뒤섞어 사건의 선후를 오독시키는 등 다채로운 서술트릭의 테크닉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읽는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며, 결말도 명쾌한 맛이 부족한 것 같다. 같은 서술트릭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나 <살육에 이르는 병>을 보면 결정적인 트릭은 단 한 가지고, 그게 공개되는 순간 뒤통수에 한 방 제대로 팍 맞는 느낌이 시원스럽다. 하지만 <행방불명자>는 결말을 확인하는 순간조차 웬지 막무가내로 억지를 쓰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든다. 여러 사건이 얽히고 섞인 게 너무 혼란스러워, 사건의 복잡한 전말 역시 작가가 그렇다면야 그렇겠지, 하고 더 생각하기도 싫어지는 것이다.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굴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쓰다. 아무리 먹고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지만 즐겁자고 보는 추리소설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추리소설가의 쥐어짬을 보는 기분은 안타까울 뿐이다. 

 

<예지몽 -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흥행 '보증수표화' 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연작 단편집.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명한 <용의자 X의 헌신>의 물리학 조교수 유가와와 형사 구사나기 콤비다. 이들의 활약은 첫번째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에서 시작되며, <예지몽>은 그 두번째다. 나오키상을 타고 영화화되는 등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용의자 X의 헌신>이 제3편으로, 이 시리즈는 현재 <갈릴레오의 고뇌>와 <성녀의 구제>까지 총5편으로 한일 양국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예지몽>은 이공계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 게이고가 야심차게 준비한(요즘 보기 드문) 물리트릭 지향의 작품이다. 수록된 다섯 개의 단편들 모두 최신 과학에 기반을 둔 기발한 트릭들이 사용되며, 폴터가이스트 현상, 도깨비불, 예지몽 등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숨겨진 비밀을 거침없이 파헤치는 유가와 교수의 활약이 짜릿하다. 다만 이 시리즈의 약점은 독자가 추리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 단적인 예로 표제 단편 '예지몽'에서 선보인 교살 트릭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발한 것이지만,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가 맞출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이런 식이라 명탐정 갈릴레오(유가와의 별명)의 명쾌한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박수를 치는 것 말고는 독자가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시원스런 전개와 신기한 트릭으로 인해 읽는 맛은 아주 뛰어나다. 1시간 30분 정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독자에겐 최고의 선택일 듯.   

 

 

 

 

 

 

 

  

<은폐수사 - 곤노 빈>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유독 경찰소설의 인기가 많다. 일본에서는 국가고시를 통과한 엘리트들(캐리어)과 진급에 한계가 있는 평경관(논캐리어) 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으므로, 두 계층 사이에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생할 여지가 높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왜 경찰소설이 안 될까를 생각해보면, 역시 건국 이후 줄기차게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며 많은 국민들에게 폭력적이고 말이 안 통하는 모습만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우리나라의 경찰 이미지는 최근까지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으니 친근한 시민의 지팡이로 국민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은폐수사>는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 등과 함께 일본 경찰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 곤노 빈의 류자키 시리즈 제1작으로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큼의 수준작이다. 보통 일본의 경찰소설은 현장을 잘 모르면서도 젊은 치기와 엘리트주의에 빠져 수사를 망치는 캐리어에 맞서는 일선 형사들의 활약을 많이 그리는 편인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르다. 주인공 류자키는 도쿄대를 졸업한 경찰 관료로 뼛속까지 캐리어의 사고방식을 가진, 어떻게 보면 보기만 해도 올라오는 재수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전국을 뒤흔든 연쇄 살인사건과 그 배후에 숨겨진 경찰 조직들 간의 파워 게임에서 그가 보여주는 원칙과 소신은 '왕비호' 류자키를 어느새 국민 훈남으로 변화시키고 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란, 상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사회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는 남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도 굽힘이 없는 그의 원칙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또 감동하게 되었다. 이런 인물이 소설 속에만 있지 말고, 우리 주변의 경찰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류자키의 다음 활약을 어서 빨리 보고프다. 추리소설이라기엔 이렇다 할 미스터리가 없지만, 꽉 막힌 경찰 조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신경전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에도, 인정에도, 심지어 가족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 류자키의 매력이 환상적인 독서를 보장한다.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이 달의 미스터리다. <은폐수사>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하지만 대진운이 좋지 못했다. <방해자>를 이번 달에 잡았다는 게 <은폐수사>의 유일한 패인이라고 할까. <공중그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폭소탄 유머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오쿠다 히데오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작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살림에 보태는 평범한 주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당시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 있던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되며, 소박한 행복에 서서히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이들은 손가락질 받고,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되어 집 대출금조차 갚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고민은 언제든지 한순간에 아찔하게 추락해버릴 수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 공포를 놀랍도록 날카롭게 자극한다. 한편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교통사고로 임신 중인 아내를 잃고 불면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데, 야쿠자와 결탁한 선배 형사를 감시하는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운 일을 하다가 우연히 동네 불량소년을 폭행해 목이 잘릴 판이다. 커다란 금전적 피해나 인명 사고도 없는 자그마한 방화 사건에 얽힌 주인공들의 내일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며, 누구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는 우울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전3권으로 출간되어 금전적인 부담이 있지만, 일단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지 못하는 페이지터너다. 내 경우 이틀 만에 봤다. 회사에서도 몰래 읽었을 정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같은 해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느낌이 비슷하고, 어느 주부의 어쩔 수 없는 일탈 행동을 그려 강렬한 독서 체험을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도 생각나는 줄거리다. 하지만 공히 인정받은 이 두 작품과 비교해 절대로 부족하지 않은 소설로, 이 정도 재능을 가진 작가가 왜 계속 추리소설을 쓰지 않고 유머소설을 쓸까 하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책 띠지에 이츠키 히로유키라는 동료 소설가가 '이 작가에게는 어딘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재능이 느껴진다'라고 한 코멘트를 담았는데, 제대로 본 듯하다. 정말이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책으로, 2권 마지막 장에서 돋은 오싹한 소름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다만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우익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작품에서도 노동 운동가들에 대해 그들의 위선을 맵게 풍자하는 장면이 있어 그 점에서 신경이 쓰일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는 건 미리 말해둔다.







2009년 6월의 미스터리: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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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7-18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신 순으로 하신거죠? 이달의 미스터리라길래.. 이달 출간된 건줄 알았네요. ^^

오쿠다 히데오의 <방해자>는 양장본에 권당 200페이지대 책에 책 사이즈도 작은데 3권으로 나오는 무리수를 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추리소설 중에서 이렇게 적은 분량이 분권으로 나온건 정말 처음인듯해요.

은폐수사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 경찰소설 좋아해서,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괜찮다니, 요즘 읽을 책도 없는데 ( ...응?) 읽어봐야겠네요.

이매지 2009-07-1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해자>는 정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더군요. 하이드님 말씀처럼 3권에 양장본 출간이라는 무리수를 왜 둔 건지는 참 -_-;; 오쿠다 히데오의 네임벨류를 믿고 이래도 산다고 생각하고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탐정 갈릴레오>는 드라마로 먼저 봐서 그런지 내용이 심심하던데, <예지몽>은 어떨까 궁금하네요. <은폐수사>는 보관함에 담습니다 ㅎㅎ

비연 2009-07-1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지몽>은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비슷해서 좀 김이 빠졌었넨ㄷ.
<방해자>는 오쿠다 히데오가 쓴 의외의 작품이라는 평이 많더군요^^
<은폐수사>는 괜챦을라나...경찰소설이 재미나죠 사실~

Koni 2009-07-1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쿠다 히데오의 미스터리라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전 <은폐수사> 쪽도 끌리네요.^-^

jedai2000 2009-07-1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네, 이번 달에 제가 본 책들입니다 ^^;; 실은 매달 출간된 책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 달, 그 달 가장 추천하는 책들을 알려드리고 싶은데, 경제적 여건상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다 소화할 수가 없네요ㅠ.ㅠ <방해자>는 일본에서 2권으로 나온 책인데, 우리나라에서 굳이 3권으로 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은폐수사>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이매지님...저도 소비자 입장에서 썩 유쾌하지는 않은데, 어떻게 내도 책이 잘 나간다면 무리수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아요. 2권으로 내도 권당 15,000원을 책정하면 어차피 그게 그거기도 하구요-_-;; 제가 보기에 <예지몽>은 <탐정 갈릴레오>보단 각 단편들 수준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비연님...전 드라마를 못 봤는데, 드라마는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이 합본된 내용인가 보네요^^; <은폐수사>는 일본에서 반응이 굉장히 좋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보신 분들은 다 만족하신 것 같더라구요. 시작 출판사에서는 2편 <과단>까지 계약했답니다. 근데 속편은 내년에 나온대요 ㅠ.ㅠ

냐오님...오쿠다 히데오는 오히려 대박을 쳤던 <공중그네> 같은 유머소설을 제외한 작품들이 괜찮은 것 같네요. 국내에 나온 것 중에서는 <방해자>와 <남쪽으로 튀어>를 제일 잼있게 봤습니다. <방해자>를 너무 괜찮게 읽어서 <최악>도 샀어요^^

쥬베이 2009-09-1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해자>가 저 정도로 명작이라니...
저는 사실 무시하고 있었거든요. 장바구니 직행~
<최악> 볼만해요ㅋㅋ

jedai2000 2009-09-14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방해자>는 현재까지는 올해 본 책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새로운 오쿠다 히데오를 느끼실 수 있을 듯. <최악>은 아직도 안 읽었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