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에 아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인간이다.  

일전에 우울이 나를 거의 죽일뻔 했기 때문이고, 

우울은 생각보다 치사율이 높다. 

하긴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 

아주 사소한 상실도(타인이 보기에) 한 인간을 꺽을 수 있다. 

여하간 내가 해본 시도는 다양한데, 

목표는 심신상실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심신상실 상태가 되기위해 술을 잔뜩 먹거나, 

음식을 잔뜩 먹기도 했으나,   

후유증으로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오기에 한 이년 정도 하다 포기했고,

집중이 잘 안되는 관계로 드물게 성공하긴 하지만 영화나 음악 감상에 도전하기도 했고,

천부적으로 재능이 없는, 그래서 미칠듯한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한 

바느질, 뜨개질 등 각종 만들기에 도전해 집에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싾이기도 하고, 

가장 최근에는 오래 걷고 좋은 곳에서 차마시는 것을 시도해보았으나, 

이 도심에 도대체 '오래' 걸을 수 있는 곳 까지 가는 과정에 내 우울이 의욕을 이겨 좌절되기 쉽상이었다.   

여하간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나의 우울 대처법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내가 그로칼랭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 목요일에 책의 주인공이 미국적 감정의 잉여를 풀어놓고자 하는 유일한 대상인(감정의 잉여를 매우 절식하는 동물인 그의 반려동물 비단뱀 그로칼랭을 제외하고) 인간여성 직장동료가 드디어 주인공의 집으로 놀러오겠다고 하는 대목까지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다음을 읽기가 너무 두려워서 내버려 두었는데 보나마나 주인공이 무척 난처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사나 하던 여성이 비단뱀 구경 오겠다는 말을 데이트로 여길 만큼 이 극도의 감정잉여에 시달리는 여리디여린 남자사람 말이다. (이 남자사람은 사실 도마뱀 먹이로 사온 생쥐에게도 감정의 잉여를 나눠줘버려 결국 동거에 들어간다)

여하간 오늘 아침 도저히 더 미룰 수 없어 다음을 읽었고, 몇 가지 개인적인 머리 아픈 문제와 더불어 우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현재 나는 여기서 그로칼랭의 주인공이 도마뱀에 대한 책을 쓰듯이 우울에 대한 페이퍼를 쓰는 것으로 극복 시도중인건가?  

주인공의 미국적 감정의 잉여나 나의 우울은 소통을 통해 극복 가능할까? 내 휴대폰엔 가까운 몇 명의 번호가 삭제되어 있는데, 너무나 자상한 그들에게 혹여나 내가 우울할 때 전화해서 인간관계를 망치게 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약간 덜 자상한 이들에게 전화하는 위험을 감수하기엔 나는 무척 소심한 성격이라 이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 주인공은 우울도 아닌 감정의 잉여를 나눌 대상을 생쥐나 기니피그나 도마뱀이 아니라 인간 중에 발견하기가 넓디 넓은 도시에서 얼마나 어렵겠는가. 

여하간 나는 아직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왜냐면 가학적으로 그의 난처함을 조금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고, 실용적으로는 회사일을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흠, 이상한 일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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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2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제목의 책이 있잖아요. 그 제목의 형식대로 말하자면 '살아있으니 이렇게 우울하기도 한거지' 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우울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우울함을 이겨내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이런 생각도 하고요.
생쥐, 기니픽, 도마뱀이 때때로 인간보다 더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휘모리님, 오늘도 비가 안 온다면 잠깐이라도 꼭 산책을 다녀와야겠어요.

무해한모리군 2011-06-28 10:41   좋아요 0 | URL
hnine님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몇 번 산책을 한적이 있어요. 상사와 함께 친절한 가면을 쓰고... 역시 업무시간엔 무얼 하든 자유롭지 않아요. 퇴근 시간에 한번 해볼게요.

스틸 라이프라는 책을 읽었어요. 진정한 사귐이라는 글을 보는데 눈물이 날거 같았어요. 퇴근길에 데이트할 친구가 간절히 필요한거 같아요.. 우울 극복과는 별도로 말이지요.

다락방 2011-06-2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다 읽고 그간의 로맹 가리보다는 좋지 않군,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휘모리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갑자기 울컥 해요.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구요. 무엇보다 어제까지 '수키 김'의 [통역사]를 읽었는데 책 속에서의 화자, 수지가 반복적으로 내뱉던 말이 떠올랐어요.

'그에게 부담을 지울 수 없다' 하는 말이요. 수지는 자신의 어려움이나 난처함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요. 부담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요. 휘모리님께서 가까운 몇명의 번호를 삭제한 것과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무해한모리군 2011-06-28 10: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맹가리 작품이 되진 않을 듯해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주절주절 적어놓은 그 글이 그냥 내가 사는 이 도시 같아요. 티브이 같기도 하고.

통역사는 정말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 다섯개 안에도 들어갈거 같아요. 왜 다음 작품을 쓰지 않을까요? 앵무새죽이기 처럼 한 작품에서 끝나는 걸까요? 음 번호를 삭제한 이유는 우울을 말해버렸는데, 제가 그사람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다는 느낌, 조금도 나눠가질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그 사람을 제가 그런일을 벌이기 전만큼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인거 같아요. 그리고 다들 저보단 큰 짐을 들고 살아가는 듯 해요... 그리고 한번 기대면 너무 자주가 될 거 같아요...

굿바이 2011-06-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용적으로 회사일을 해야하는데 저는 이 페이퍼를 몰래 읽고 있습니다.
제 처지를 생각하니 급하게 우울해집니다~^^

고고씽휘모리님 글을 읽으며 나는 어떻게 우울에 대처하는가 생각해 봤더니
딱 한 가지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조건 잡니다!!!! 나도 남도 괴롭히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죠. 휘모리님이 어떤 이들의 전화번호를 삭제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6-28 17:09   좋아요 0 | URL
저는 화가 날때는 잡니다 ㅎㅎㅎ
굿바이님께 댓글을 다는 지금 세시간 동안 회사에서 놀고 있어요.
내일부터 바쁠 예정인데 오늘은 일이 많지 않네요.
얼른 집에가서 만두국 끓여서 먹어야지 하면서 말이죠.

그나저나 굿바이님 좀 더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우리 되지 않을까요? 너무 자주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아 그런데 한번 하면 자주가 될 거 같아요.. 그죠?

... 2011-06-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번뜩 생각났어요. 제 책장 어딘가에, 이 책이 있다는 것이. 찾아봐야 겠군요...

휘모리님의 적극적인 우울증 대처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무해한모리군 2011-06-28 17:13   좋아요 0 | URL
그때 그때 달라요 ㅎㅎㅎ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수건으로 곰인형을 만드는거요. 가장 어려운 과정은 눈코입을 만들때예요. 개성을 부여하는 작업이지요. 균형을 잘못잡으면 곰이 아니라 솜뭉치가 되어 버리거든요. 그런걸 막 만들고 있으면 생각이 없어지고 좋아요.

책 앞에 길고 긴 책 소개가 붙어 있는데 지루했지만 딱 하나 건질만한 건 아마도 로맹가리 본인과 가장 닮은 소설이 이 책이 아닐까 하는 얘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