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의 추억에  

꿈은 그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생각하고 
모두 잊었다는 것조차 잊었을 때 
꿈은 한겨울의 추억처럼 얼어붙으리라. 

원추리에 붙이다, 타치하라 미치조 

 진부하기 짝이 없는 비유지만, 인간의, 특히 여자의,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연령 변화는 자연계에서 봄의 도래와 많이 비슷하다.(중략) 못생기고 단단한 꽃봉오리를 단 울툭불툭한 가지가 어느 날 갑자기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심약한 말라깽이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틀림없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여자임을 깨닫는다. (중략) 나는 사물을 주의 깊게 보고, 듣고,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늦게나마 자아가 싹튼 것일지도 모르고, 자립심이 움튼 것일지도 모른다. - 75~76쪽 

아이를 밴다는 것은 하나의 그릇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궁만이 한없이 확장되면서, 어머니의 내장은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살과 지방은 점점 얇아진다. 고열로 녹인 유리에 공기를 불어넣어 부풀릴 때처럼 혼신의 힘이 담긴 위태로움과 강인함. - 193쪽 

게이스케 씨 같으면 알겠죠? 달걀은 원래부터 멀쩡하게 설 수 있는 형태라는 걸(중략)
집중력에 끈기라. 둘 다 귀찮은데요. 게이스케 씨, 달걀을 세우려고 열심히 애쓰는 게 인생이란 생각 안 들어요? 개중엔 겨우 한개 갖고 애먹는 사람도 있고, 혼자 다섯 개, 여섯 개씩 세우는 사람도 있어요. (중략) 
세상은 원래 꽤 불공평 하니까요. 처음부터 달걀을 세우기 쉬운 평평하고 튼튼한 테이블을 갖고 있는 사람이랑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요. 핸디캡 레이스에서 약한 말이 더 무거운 중량을 달고 뛰는 일도 부지기수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애써도, 몇 번을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은 한번 에그스탠드에 달걀을 맡겨보라고, 그런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에요. 
-232쪽

타치하라 미치조라는 작가가 쓴 저 책은 아마 번역되지 않았나보다. 연애시인 모양인데 꿈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니 멋진 표현이다.  

손안의 작은 새에는 멋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빨간 원피스가 멋지게 어울리고, 오피스룩에 파티룩에 어울릴 악세사리를 멋지게 배치할 수 있고, 운동신경이 좋은데다 길에 떨어진 아이의 장화가 밟히지 않게 우체통에 올려놓아주는 마음씨를 가진 여자. 쉬크한 매력이 풍기는 여자 바텐더.  

나는... 구질해지지 않는게 목표다.. 그런데 오늘도 머리도 안감고 세수도 안한채 박스 스무개를 혼자 번쩍 들어서 재활용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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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4-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안의 작은 새. 괜찮았어요? ^^ 아기자기하지요?

무해한모리군 2011-04-04 08:42   좋아요 0 | URL
정말 여자가 쓴 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감성적이고 좋았어요 ㅎㅎㅎ

하늘바람 2011-04-0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그릇이 되는 일
그러면 좀 글쎄 어감이 좋지는 않아요
그릇보다는 그냥 엄마라는 느낌이 좋았던거같아요 엄마가 되는 것은 정말 큰 그릇이 되어야 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
아기자기한 책 같네요

무해한모리군 2011-04-04 12:31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굉장히 수동적인 느낌이니까요.

아이를 갖어보지 않아서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안되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와 온전히 함께인 느낌은 무척 경이로운 경험일듯 합니다.

아기자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