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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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집을 구매하고 가장 먼저 중국편을 뽑아 들었다.  
어느 한 편 할 것 없이 단편으로서 밀도 있는 구성과 선명한 주제의식을 선보였다. 전통사회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공간 그 어수선한 급변기의 풍경속에 개인들은 어떤 고민을 가졌을지 살짝 엿본다.  

<노예의 마음>편에 아비의 목숨과 어미의 정조를 판 댓가로 노비의 자식의 굴레를 벗고 대학의 다니게 된 인물이 나온다. 그는 '자기 행복을 모두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노예의 마음이야'라며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박혀있는 노예의 마음때문에 고통받는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여성성 이라고 말하는 관계지향적이고, 남의 감정에 민감하며, '나의 행복' 보다는 '우리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배웠던 마음안의 윤리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길을 찾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인으로서 여자로서 내가 가진 이런저런 노예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 작품이다. 

<린 씨네 가게>는 적은 분량인데도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되어, 린씨와 함께 화를 내고 가슴이 조여듬을 느꼈다. 그만큼 탄탄한 구성이다. 대를 이어 시골인근 읍내에서 작은 잡화점을 하는 린씨는 전쟁과 썩어빠진 관료, 사채빚쟁이들 등살에 장사마저 나날이 안되니 죽을 맛이다. 이와중에 병약한 아내와 철부지 딸 모르게 어떻게든 가게를 살려보려고 하지만 상황은 점차 린씨의 뜻과 다르게 꼬여만 간다. 그저 성실하게 나날을 살아왔을 뿐인 소시민에게도 전쟁과 정국의 불안은 삶을 파탄내고 마는 과정이 적나라 하게 드러나있다. 

표제작인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은 한 유부남이 퇴근길 아주 짧은 순간 낯선 상대에게 매료되는 모습을 제목 만큼이나 맛깔나게 그려내고 있다. 


나조차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급할까? 저 사람들도 지금 내리고 있는 것이 비이고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다급하게 피하는 것일까? 옷이 젖을까봐 그렇다고 하겠지만,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나 비옷을 입은 사람조차 서둘러 피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무의식적인 혼란이었다. 빗속에서 한가롭게 산책하는 재미를 몰랐다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다급하게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221쪽)



이처럼 주인공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상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초승달>은 따로 밑줄긋기를 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여성이 왜 몸을 팔게 되고 어떻게 피폐되어가는지를 주인공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 담담한 어조가 마음을 더 아린다. 하루밤 잘 곳이 없어 잠자리를 위해 어른들의 성노리개가 되고 있는 가출 청소년들이 떠오른다. 결국 우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나보다. 

9작품 모두 무척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었다. 단편을 이런 맛에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다. 이 시기의 중국 장편들의 무거운 분위기와 주제의식 때문에 선뜻 접하기를 망설여왔다면, 이 다양한 개성을 가진 단편집이 좋은 선택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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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0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이런 내용을 이 시간에 읽고 계시는군요!!! 역시 집중하는 에너지가 넘치시는 휘님!!! 이 책 내용과 쬐끔 관련이 있는 듯 싶은데..붉은 수수밭 다시 보고 싶네요~

무해한모리군 2010-02-02 08:31   좋아요 0 | URL
그 시간에 읽지는 않았고 정리만 해보았습니다. 졸려서 그마저도 하다 말았습니다 ㅋㄷㅋㄷ

그 영상이 기억에 선명하네요. 저도 보고싶습니다.

글샘 2010-02-02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국어 초급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나라예요. 중국...

무해한모리군 2010-02-02 09:05   좋아요 0 | URL
글샘님 제 꿈이 중국어로 시를 읊는건데, 중국어로 시 읊는걸 들으면 머리속에 바람이 이는 듯 해요. 아~ 그런데 공부를 안해요 ㅠ.ㅠ

람혼 2010-02-02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러시아편을 가장 먼저 뽑아들었는데...ㅎㅎ
어쩌면 <창비 세계문학 전집>은,
어떤 '국가'의 문학을 먼저 뽑느냐에 따라,
나름 '세계문학'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점검해볼 수 있는,
일종의 '근대[문학]적' 척도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2-02 08:30   좋아요 0 | URL
아 너무 재미난 생각입니다.
그런듯도 합니다.
전 두번째로 러시아편을 뽑았습니다 ^^
아마 루쉰의 두작품이 실려있다는 걸 알아서 였을듯 합니다. 루쉰을 좋아해서 제 서재 제목도 루쉰에서 가져왔으니요. 희망이 없음을 객관으로 이해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꿈지럭거릴 수 있는 양심이 늘 새롭습니다.

fiore 2010-02-02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란드를 집었어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 ^^
문학에 대한 취향과 상관은 전혀 없이(취향대로라면 프랑스를 꼽았을 것 같군요)
전혀 모르는 폴란드'를 집었습니다.

곰브로비치는 작년가을 읽었었군요. 읽고 나니 폴란드였지만요. ^^

무해한모리군 2010-02-03 08:22   좋아요 0 | URL
무사히 잘 도착했군요.
폴란드 소설과 영화를 몇번 접해본적이 없습니다만,
그곳도 아주 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나라니 그들이 본 현대도 기대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