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를 낳고서, 아이의 갑작스럽고도 완벽한 존재를 보면서 루마는 생전처음 경외감을 느꼈다. 아카시를 보면 아직도 놀랄 때가 있다. 그저 아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몸의 모든 장기가 제자리에 들어 잇다는 사실이, 저 작고 단단한 몸속으로 피가 조용하면서도 제대로 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카시가 태어나던 날 어머니는 아이가 루마의 피와 살이라는 말을 했다. 다만 어머니는 "아이는 너의 고기와 뼈로 만들어진 거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그 말의 의미가 더 새롭게 들렸다. 이로 인해 루마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 또한 경외감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 사람이 몇 년이고 살다가, 생각하고 숨 쉬고 먹으며, 수백 가지 걱정과 감정과 생각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조그만 공간을 차지하고 살다가 한순간 존재를 그치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p60)
자고 있는 손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긴 속눈썹과 둥근 뺨이 아이들 어릴 때 모습을 닮았다. 문득 아카시가 어른이 되는 건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시가 중년이 되는 걸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늙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서글퍼졌다. 몇 년이 지나면 아카시가 바로 이 방을 차지하고, 루마와 로미가 했던 식으로 문을 닫아놓을 것이다. 그건 피할 수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도 부모에게 등을 돌려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 야망과 성취라는 것 때문에 그들을 저버렸었다. 아카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곱슬곱슬한 금발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 전등의 불을 끄니, 어둠이 금세 방을 채웠다.
(p65)
한참을 던져두었던 소설을 오늘 왜 읽을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후회가 된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예민한 감성에 내 마음이 베일 듯 하다.
사랑스런 아이지만 아이와 둘이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녀의 힘겨움도, 홀로 남겨진 나와는 너무 다른 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도 글이 그대로 마음에 와 박힌다.
도대체가 한문장 한문장이 이러면 어떻게 책을 끝까지 읽으란 말인가.
지금은 더구나 가을인데,
자취방에 홀로 누운 날더러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