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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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9년생 포항 사람이지만 어려서 부터 해태의 소녀팬이었다.

이것으로 내가 집안내에서 받은 박해만해도 책한권은 낼 법한데, 나에 앞서 만년 꼴찌 삼미의 팬이었던 73년생 저자가 맛갈나는 글로 80년 광주, 김대중, 해태 타이거즈를 키로 우리 사회의 근현대사와 야구사를 훑어냈다. 

나는 스포츠의 묘미는 돈으로도 합리적 전력으로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그 1%의 불가능성에 있다고 본다. 돈과 최강 선수진을 가진 삼성이 해태의 번번히 물먹는 모습, 그 덕분에 우리집 남자들이 펄쩍 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집안네 약자였던 내게 얼마나 통쾌했는지 말로 다할 수 없다. 

여기 광주, 내 가족의 피로 얼룩진 거리에 밥벌이를 위해 매일 나서야 했던, 두사람만 모여도 살피는 눈이 달라붙고, 막걸리 국가보안법이 횡횡하던 그 시절 유일하게 사람들이 모여 목놓아 목포의 눈물을 외칠 수 있었던 그 곳의 소중함을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아무리 3S 정책에 의해 시행한 프로야구일지라도 해태타이거즈가 광주사람들에게 준 위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리라. 

닉 혼비는 피버피치라는 책에서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 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결혼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우듯이 잠깐동안 토튼햄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축구팬에게도 이혼은 가능하다. 그러나 재혼은 불가능하다. 나의 경우 지난 23년 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라고 언급했다. 

내게도 10년의 해태 팬을 생활 중 말미의 몇년, 모기업 부도로 주요 선수들을 모두 팔아치우고 시즌 최하위를 맴도는 해태를 보면서도 떠날 수 없었고, 진정 해태를 위해서 안타까웠고 어떻게든 이름이라도 지키기를 바라는 애끓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해태가 기아로 바뀐 이후 나는 야구와 이혼을 했다. 더이상 돈이 아니라 긍지로 이기는 스포츠는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20년간의 한국 프로야구의 부침과 명승부는 근성이라는 건 무엇인지, 약자라도 한번 강자의 발꿈치를 물기 위해 도전하는 용기는 어떤 것인지를 눈물겹게 보여준다. 우리나라 아마와 프로 초창기의 선수 혹사는 전설처럼 떠돌지만 그래도 팀의 한승을 보태기 위해 했던 그들의 피나는 노력을 선수 한사람 한사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언급하며 정리해 준다.

광주, 김대중, 해태타이거즈 어느 하나라도 당신의 마음을 흔든다면 이 책은 매력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나는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처절하게 싸웠던 그들을 기억하며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흐르는 눈물을 누가 볼새라 훔치며 읽었다. 

<책 속의 몇 구절> 

P252~254

 그러나 한국 야구는 다르다. 거의 해마다 팬들에게 단순한 꼴찌 이상의 비애를 맛보게 했던 나의 사랑 삼미와 후계자도 없이 증발해버린 쌍방울은 물론이고 막강한 정치력과 자금력을 가지고도 항상 슬픈 골리앗 역을 맡아주었던 무관의 제왕 삼성, 서울을 연고지로 가졌지만 별 볼 일 없었던 LG와 두산, 그리고 가장 많고 열성적인 팬을 가졌지만 그들에게 짙은 한만 쌓아준 롯데. 그리고 그 시절 '대한민국의 양키즈, 혹은 요미우리'라고 믿어왔던 9회 우승의 해태 타이거즈 마저 IMF의 직격탄을 맞고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며 깊은 상처를 주고 사라진, 저마다 한과 꿈과 좌절과 낙담의 역사 속에서 웃음과 눈물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고만고만한 난장이들의 모자이크. 중심이 없는 주변들의 세계. 그래서 저마다 한 편으로는 각자 경험했던 승리의 위대함으로 우열을 다투다가도 때로는 반대로 각자 감내해야 했던 뼈아픈 굴욕과 비애를 가지고 순위를 가리려는 팬들의 사회. 당장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한 세월 지나 떠올리면 서로를 동정하고 공감하며 함께하고 나눌 것이 있는 이야기 덩어리. 

 그래서 꼴찌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 한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빠르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우아한 야구를 보여준 삼미슈퍼스타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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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5-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프로야구에 관한 또 한권의 책이군요.
근데 휘모리님은 포항분이네요^^ 제 고모가 포항근처 구룡포의 사시고 계시거든요.뭐 예전에 과메기 자주 얻어먹었는데 휘모리님도 과메기 좋아하세요?

무해한모리군 2009-05-22 16:29   좋아요 0 | URL
과메기는 별로 안좋아고, 돈배기(고래고기를 다져 산적모양으로 만든 것)은 좋아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9-05-2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와닿습니다.광주 광역시에 살거든요.
포항 하면 저는 보경사 골짜기 폭포가 생각납니다.방송에서 봤는데 정말 멋지더군요.가보셨는지요?

무해한모리군 2009-05-24 20:05   좋아요 0 | URL
어머 보경사를 가보셨군요..
제가 즐겨가는 나들이 코스랍니다.
저는 무등산이 참좋아요.
고3때 광주를 처음 갔을데 그 잔잔한 풍경이 어찌나 좋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5-25 15:20   좋아요 0 | URL
방송에서만 봤어요.자주 가다니 좋겠습니다.
무등산은 가물어도 골짜기 물이 안 마르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카스피 2009-05-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반대휘모리님 돔베기는 고래고기가 아니고 상어고기인데요^^;;;

무해한모리군 2009-05-24 20:04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상어였단 말입니까 ㅎㅎㅎ
제수로 늘 쓰면서도 뭐 잘 몰랐다는거..

비로그인 2009-05-2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순철, 한대화, 조계현, 이강철, 선동렬 그리고 당시 막내 이종범. 당시 저는 예를 들어 빙그레 이글스와 경기가 있다면 빙그레에서 나오는 바나나 우유를 마시지 않고 해태를 응원하곤 했었죠. 굳이 지역연고에 따라 팀을 응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저도 해태를 응원한 이유가 이성적이라거나 합리적이었던 건 아니죠. 서울 살면서도 LG트윈스를 무지하게 싫어하기도 했고요.

무해한모리군 2009-05-24 20:07   좋아요 0 | URL
저는 장채근을 좋아했어요~
아하 리플리님께는 반골의 피가 흐르는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