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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1.
온갖 신변잡기가 소설의 주요 테제로 자리 잡게 된 지난 수년간, 소설의 진정성에 대한 논의들이 다발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그 지난한 속에서 거대와 미시, 총체와 구체라는 이분적 도식에 의해 사람들은 이합하거나 집산하였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에 따르자면, 신변잡기적 소설들의 다양한 양산이 진정성을 담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형태로 무수히 쏟아지고 있으며, 이는 끝없는 해체와 비체(非體)라는 포스트모던식의 ‘목적 없는’, 말하자면 한가로운 글쓰기에서부터 기인한다. 반면에 목적성에 함몰되어 소설 나름의 태도, 즉 이야기의 충실성을 거세한 채, 자신의 신념 따위를 주조해내는 일군의 사실주의적 소설들에 대한 심기불편 또한 없지 않았다.
때문에 ‘광장’(거대)과 ‘자기만의 방’(미시)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와 같은 독자에게 있어서 지난날 황석영의 소설 몇 편은 일종의 해방감과 더불어 두 간극을 해소해나가는 소설가의 전형으로 비추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가 출소 이후 발표했던『오래된 정원』,『손님』등의 소설은 그러한 층위들에서 파악된다. 사랑과 현실,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라는 보편적 주제들은 그의 연금술에 의해 역사와 시대 속에 배치되고, 인간과 그 삶 속에서 빚어졌다. 그리하여 거대와 미시, 총체와 구체와 같은 이분적 도식들은 붕괴되고, 인간의 구체적 삶 가운데 성취되어야 할-이성 혹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보편적 주제들이 안전하게 정착함으로써 마감되었다.
물론 이러한 황석영 예찬은 그의 새 소설『바리데기』를 읽고 난 후에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그에 대한 긍정이 나로서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이전의 작품들과의 발전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공간이 (이전 소설들의 주요 공간적 배경인)한반도라는 소위 민족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현실인 ‘이동과 디아스포라(diaspora)’를 인류 보편의 문제로 주제화시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지녔던 국소적 한계, 즉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형적 공간 안에 머물지 않고, 소설의 주인공 ‘바리’를 ‘오래된 제국’, 영국의 어느 모퉁이에 위치시킴으로 공간적 배경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차이가 민족적 현실을 초월한 것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나타나듯이 ‘세계’로의 확장은 바로 ‘한반도’의 시대적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고민이자 오늘날 세계 현실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한반도의 삶을 세계인과 공유하고 싶었다”는 그의 야심찬 의도는 비교적 적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불우는 그야말로 참담하다. 더 이상 자신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비관적 확신이 경계 없이 스며든다. 그 참담의 자리에서 하릴 것 없는 인생이란 그저 떠돌고, 떠돌아 티끌처럼 대지에 얹혀 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결코 뿌리는 없고, 색 바랜 낙엽처럼 뒹구는 꼴이 그 ‘꼴’일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바리가 그렇다. 아! 가엾어라. 그러나 바리의 영묘는 차라리 그녀의 불우가 숙명이 아니라 운명임을 보여준다. ‘영매(靈媒)’ 혹은 ‘중보자(中保者)’로 택정 받은 그녀의 인생은 지난한 것임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는 살았고, 또 살아남았다.
이 불우한 자의 인생이 어찌 혼자의 것일 수 있으랴! 그가 밀려난 생의 변방마다 수많은 상처들이 널려있었고, 한(恨)많은 인생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그네들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모진 인생의 굴곡을 가늠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자신의 삶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인생에게 다른 이의 회한 맺힌 인생을 위로하는 일은, 어쩌면 이중의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바리할미는 자꾸만 그 길을 가리키고만 있었다. 그 길은 끝없는 나락이며, 생지옥이다. 절규와 몸부림이다. 인생의 하방으로 내쫓긴 자들은 그 길을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걷는다,(아니 오히려 수동형으로) ‘걸어진다.’ 바리도 그렇게 걸었다. 별 수 없이, 자신의 운명으로 체념하면서.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늙은 제국’의 후미진 그늘이 운명이라고 할 수 없듯이 바리에게도 그러했다. 그 모진 시련을 버티는 것은 그녀의 운명이었지만 자꾸만 인생의 하방으로 밀려나는 현실은 ‘운명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건 다만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예요?"라는 바리의 탄식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고통은, 기실 신에게서 발본하지 않았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예컨대 전쟁이 그러했다.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었고, 그 지옥은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겪어야 할 우여곡절이었다. 이 풍진 세상을 굳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할 터였다.
“생명수 약수를 달랬더니 그 놈에 장승이가 말허는 거라. 우리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 약수다. 기럼 공주님이 헛고생한 거라? 바리야, 기건 아니란다.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었지비.”(81쪽)
바리는 다시 일어섰고, 또 걸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고통은 ‘우리 속에 살아계신’ 바리 큰할미의 마음을 깨우치도록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바로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고통 속에서라도 밥해 먹구 빨래하던 그 평범한 물속에 길이 있었다. 생명수는 다른데 없었다. 고통스럽지만, 평범한 그 삶 속에 있었다. 그것은 미움과 절망으로 점철된 생이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눈물 속에 꽃피는 희망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 폭발 속에 피 흘리는 살풍경 속에서 아기에게 미안하다고 읊조리며 흘리는 바리와 알리의 눈물은 눈물과 희망(새생명)의 중첩이었다. 비로소 생명수는 그 모진 세월을 거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압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던가 보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었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286쪽)
3.
“아직도 세상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맘 편히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217쪽)
사람들은 국경을 넘는다. 살기 위해서. 하루라도 맘 편히. 그리고 죽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도처에서. 완성된 문장을 해체해서 역순으로 떼어놓고 보니 짐짓 섬뜩하다. 그 뿐인가? 작가가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보듯이 전쟁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287쪽)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진저리쳤다. 여전한 현실이었지만 그것이 지구 반대편, 혹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자위하며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들이 ‘난이나 차파티 빵을 먹고 우리는 쌀밥을 먹는’다는 것 뿐, 그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다를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어느 추운 산길 어딘가를 헤매며, 떨고 있는 바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도시의 뒤편, 초라한 건물의 한 켠에서 설거지하고 있을 또 한 명의 바리를 생각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밀입국을 감행하고 있을 또 여러 명의 바리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불우를 넘어 생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을 어느 뒤란의 바리들 또한 생각해본다. 전쟁도, 테러도, 기아도 그칠 줄 모르는 시대에 나는 자꾸만 눈 앞이 흐려진다. 바리의 눈물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리가 찾았던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 조금씩 움튼다. 비로소 연민의 눈물로 세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