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서 보내준 짐짝 하나가 도착했다. 무려 2달 반만이다. 아득한 거리만큼 오는 시간도 한참이다. 배에 실려 온 것이니 그야말로 물 건너온 셈이다. 짐을 부려보니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이 눈에 띈다. 단숨에 '느긋하게 걸어라'를 그야말로 '느긋하지 못하게' 읽어버렸다. 이 모양이다. 아직 남미의 생활양식을 몸소 따라가지 못한다. 이래선 Santiago行도 어림없다. 천천히 씹고 또 씹으며 느리게 읽는 것도 중요하다. lentamente! 천천히! 

 어제 밤부터 '예수전'을 들었다. 간만에 리뷰를 좀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탄한 필력, 예리한 시선이 여전하다. 그가 또 만만치 않은 책을 하나 냈다. 어렵사리 인터넷을 찾아 들어와 '알라딘'의 반응을 좀 살폈다.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다. '김규항'이라서 그렇다. 당연하다. 호인浩人에겐 호인好人이 따르는 법이다. 나도 물론 그러한 사람(호인好人) 중 하나다. 반면에 책에 대한 실망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예수전'이라서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이들에게는 좀 버겁지 싶기도 하다.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두루 좋은 책은 없으며, 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책은 묵직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문제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비판이다. 페이퍼 하나를 읽다가 나는 그만 참담해졌다. 비판은 좋은 일이고, 성숙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게 평소 내 지론이다. 하지만 비난은 나쁜 일이고, 성숙을 방해하는 고의적 악의라는 생각 또한 늘 변함없다. 페이퍼의 수준이나 내용은 (안타깝게도) 고스란히 '개신교적'이다.(나도 개신교인의 한 사람이다.) '개신교적'이라는 일종의 '비난 방식'은 늘 합리와 이성 대신에 감정과 맹목을 비판의 축으로 삼는다. 때문에 그들의 '신념 어린' 비판은 대체적으로 무디기 일쑤며, 기껏해야 비난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믿음이라는 비판의 준거는 너무도 태연하게 '사실과 논증'을 초월해버릴 뿐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 결핍'과 '정보 오류'마저도 천연덕스럽게 '진실'이라 주장한다. (예컨대, 마가복음이 AD 1세기 이후에 씌여졌다는 말은 10년 가까이 신학한 사람으로서도 난생 처음들어보는 획기적 주장이었다. 공부를 잘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 상식은 알고 있다.)

더 말하기가 조금 귀찮다. 그리고 조금 버겁다. 실은 어느 분의 페이퍼에 실컷 댓글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돌아왔다. 대신 여기에 나름의 푸념을 남긴 이유가 하나 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마주하시는 '개신교인'들이 있다면, 그리고 '예수전'이란 책을 읽으셨거나, 읽으실 예정이라면 모쪼록 천천히 읽고, 곱씹어서 영혼의 양분으로 삼으셨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그래서 인민의 친구, '참 사람 예수님'이 정말 당신의 '친구'로 여겨질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듯 싶다. 지나친 바램이고, 주제 넘는 얘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고, 아는 것은 곱게 갈아서 잘 소화했으면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면에서 좀 예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종교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만 떠들고, 마저 읽어야 겠다. 느긋하게,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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