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무료함이 여름의 복판에서 허덕일 때, 우리를 어디론가 실어다줄 한 줄기 바람은 일상의 터전을 박차는-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불어온다. 그 바람결에 자신의 몸을 되도록 나른하고, 게으르게 맡겨놓으면 우리는 어느결에 더 나른하고 더 게으른 모습으로 파다한 새로움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기대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며, 두 이레 전, 작은 파문을 염(念)하던 나의 바램이기도 하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복잡다단한 일상의 무게가 짐짓 암담하게 여겨질 제면 일단 어디론가 떠나고 볼 일이다. 이색의 정취를 기대할 것도 없이, 선득해진 마음은 이미 당신을 새롭고, 낯선 공간에로 이끌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새롭다. 새로운 당신은 노마드, 당분간 유랑의 자격이 갖춰진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떠났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거창할 것도 없이 하룻밤을 바람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선유도. 그곳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뱃길로 한 시간여 남짓 되는 거리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신선이 노는 섬"(島)이라는 그 명칭의 의미처럼, 한적하고, 조용하다. 다만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맞이하기 위한 약간의 소란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쨌거나 신선이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빼어난 경치는 감탄할 만하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구석 구석 펼쳐진 해안의 정경은-짙푸른 바다와 뻘의 애무는, 안개와 섬의 포옹은, 낙조와 능선의 입맞춤은-'짠한 아름다움'이다. 선유도를 중심으로 뻗어있는 두 개의 다리는 이웃 섬, 무녀도와 장자도를 잇고 있다. 이들은 서로 기대고, 잇대어 '섬'의 외로움을 위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닮아있지 않고, 각기 다른 특유로 끌림의 정취를 선사한다. 한적하고 느슨해보이는 무녀도, 쓸쓸하고, 적막해보이는 장자도, 그리고 다소 소란스럽지만 생기넘치는 선유도까지 이들 섬의 분위기는 각기 다른 풍미를 자아낸다.

 그곳에서는 짧은 여정을 일일이 기록할 기력도 없거니와 그것이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다만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 도착했던 무녀도의 초입에 새겨진 그곳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기록에서 건져올린 단어 한 토막만큼은 남길 필요가 있지 싶다. '서드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 단어는 옛 무녀도 주민들의 생활 방침과도 같이 통용되던 말이었던가 본데 그 뜻이 기막히다.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다." 함께  이 여정에 동행했던 길벗은  낮은 저녁, 헐한 횟집에서 잔주를 기울이며 이렇게 읊조렸다.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한다라고 적혀있었다면 별로였겠지. 허지만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다>라잖아.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살 수 있는건데...내가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에 그만 난감해져 몇 순배 더 돌았다.

 물론 모두가 바쁘게 서둘러 일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또한 서둘러 일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제는 그만 서둘러도 되는 세상이다. 서둘러 먹다보면 체하기 마련이고, 서둘러 걷다보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고,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일이야 오죽하랴. 기다릴 줄 아는 마음과 지켜볼 줄 아는 미덕, 그 들고 나섬의 틈을 두어 '시간보다 더 느슨한'(문태준) 시간을 살아내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무참한 속도 경쟁에 질척해져 버렸다. 단축과 단축의 연속. 그 속에서 이 땅도 소위 '압축(농축) 근대화'를 이뤄냈고, 민주(民主)될 틈 없이 관주(官主)되어버린 이념적 지형도를 그리게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삶도 3축(단축, 압축, 농축)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사실은 서두르니 바쁘기 마련이고, 바쁘다보니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어졌다는 데에 있다. 겨를이 없어 여유도 사라졌고, 여유가 없어 삶은 팍팍해졌다. 팍팍해진 삶이란 별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을 바라볼 줄 아는 삶은 틈과 여백, 관상과 명상이 펄펄히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나 무녀도에 터했전 옛 주민들의 '서두름'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서두름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망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왜란의 파고 속에서 먹을 것도 넉넉치 않던 시절, 그들의 삶에서 바다는 한낮 풍경이 아닌 지난한 삶의 현장이었다. 주림을 면키 위해 그곳으로부터 먹거리를 얻어와야했고, 주민들은 무시로 넘나드는 파도와 짙은 안개 속에서도 바다로 나서야 했다. 이러한 삶의 정황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그들의 생계 수단은 뻘에서 얻어오는 해산물이었으며, 밀물과 썰물의 때가 정해져있는 그곳 바다에서 조개를 따기 위해서는 썰물이 오기 전에 그야말로 <서둘러> 일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논하는 느림이란,  여유란 한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서둘러 일해야 했던 것이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갖기 위해' 서두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옛 무녀도 주민들의) '최소한의 추구'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대한의 추구'라는 각기 다른 지향은 '서두름'의 의미를 각기 다르게 채색한다.

 '서드이'. 이 단어를 하나 놓아두고, 쓸데없는 소리가 참 많아졌다. 그냥 내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에게 얼마나 그 '살 수 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느냐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열심히, 그리고 서둘러 해야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 번쯤은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이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름의 깨침을 안고 돌아온 것이 선유도를 다녀오며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했던 바다와 사람들과 우리들의 풍경. 그 새로움의 풍경은 가차없는 일상의 반복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두 이레가 지난 지금, 그곳에서의 기억은 아득하고, 현실은 여전히 변변치 않다. 어쩌면, 쇠귀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행은 돌아옴"이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우리들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여행인 것이다. 변변치 않은 일상의 남루가 아프지 않은 것은 그 섬이  '고요한 아름다움'(도종환)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며, 무시로 나를 젖어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젖은 마음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과의 대면 속에서, 그리고 그리움을 밥을 먹듯 살고 있는 우리의 사랑 속에서 틔워낸 고요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고 머물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전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7-30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3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