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깨달음 - 박성배 교수의 불교 철학 강의, 카르마총서 6
박성배 지음, 윤원철 옮김 / 예문서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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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꾸 '너'와 '나'를 일치시키려고 한다만,
그 둘이 '하나'를 어둡게 하는 것이 보이잖느냐?
_<루미 지혜-위대한 수피 스승의 사계>, “10월 4일” 전문

 13세기 수피 시인인 루미(Mevlana Jelaluddin Rumi)의 글이다. 나는 이 글을 너와 내가 따로 있다는 그 그릇된 논리부터 집어치우라는 말씀으로 읽는다. 이미 그 분(The One, 한님)과 나는 옹근 하나인데, 그걸 일치시키겠다고 하니 그건 분명 그 분이, 혹은 그로부터 내가 외따로운 존재라는 망상을 진작부터 상정해놓고 가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로인해 본디 ‘하나’인 신과 인간의 불이적(不二性) 관계엔 균열이 생기고, 암운이 드리운다.

『깨침과 깨달음』을 읽으면서 700년 전 루미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비교적 적확하게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갈수록 신과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의 거리가 아득해지는 종교적 통속성을 두고 보면 무릇 앞으로의 종교적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비교적 루미와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한 현대 신학계의 주목과도 일견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 꼼꼼한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어쨌거나 ‘범재신론’으로 규명되는 에크하르트류의 신관이나, ‘신과의 합일’에 몰두하였던 루미 등과 같은 수피들이 걸었던 그 길이 오늘의 21세기 문명에 있어서 (종교 안팎의) ‘해방과 구원’의 새 영성적 지평을 열어갈 가능태임은 자못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쯤에서 잠깐 멈추고, 다소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자. 위에서도 언급했던 루미나 에크하르트에 대한 개인적 관심의 궤와 같이 하여 ‘신과 세계의 동일성’, 혹은 ‘신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주제는 몇 해 전부터 나의 신앙(학)적 입장이 되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갈마드는 기존의 신앙 양태는 꽤나 뿌리 깊은 것이었던지 나의 신앙이 일쑤 보편과 통속의 범주 속에서 표류하곤 하였다.(예컨대, 때때로 기도의 언어 속에서, 그리고 그 발화의 심층 속에서 나는 철저히 타자화 되었거나, 대상화된 하나님께 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보다 깊은 직관에 의해서가 아닌 단지 이성의 의지적 작용을 통해서 구성된 신앙이기에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 나름의 지난한 신학 여정 속에서 알음알음 부수고, 갈았고, 엎었던, 그리하여 그 토대 위에 세우고 싶어 했던 신앙의 결실이 때때로 무참히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고보면 이 비애의 반복 속에서 가까스로 부여잡으려 했던 것은 결국 신앙의 토대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보다는, ‘살이’의 차원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수행’을 화두 삼아 부족한대로 공부하며, 참 살이를 궁리하여왔다.

 이러던 중에 마주하게 된『깨침과 깨달음』은 불교의 오랜 논쟁의 주제인 ‘돈오점수(頓悟漸修)’론에 대한 전면적 검토의 성격을 지니는 글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특별히 ‘돈오’, 즉 ‘몰록 깨침’이 불교적 신앙의 온당한 토대임을 주장하면서 ‘점오’를 통한 깨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조신(祖神)과 교신(敎信)-‘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이라는 믿음의 존재론적인 두 측면을 대비하여 참다운 불교적 믿음의 형태가 전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보기에 조신, 즉 ‘나는 이미 부처’라는 믿음은 결국, 닦음과 깨침의 출발이자, 정점이며, 그것들이 아울러 본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신의 믿음 없이는, 그 여하한의 깨침과 닦음 또한 존재할리 없다. 말하자면 온갖 깨달음과 수행이 하나의 몸짓(用)이라면, 믿음은 바로 그 몸(體)이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체용불이(體用不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은 마치 내게 죽비를 후려치듯 했다. 조금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믿음의 문제에서 오는 온갖 혼동과 갈등에 대해 애써 외면했고, 간단하게도 ‘살이’(行)의 문제로 성급하게 이연(異緣)하고자 했던 나의 못난 시도들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물론 내 안의 그 분과 오롯이 마주하고, 이미 하나임을 확신함으로부터 내 신앙의 벼리를 다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 데에 의미가 있다. 한편 ‘의심 덩어리 명상’이라 할 수 있는 간화선의 경우를 통해 흔들리는 믿음, 회의하고, 의심하는 믿음의 역동성을 기술한 대목은 마찬가지로 더 치열하거나, 더 고뇌하지 못한 자의 부끄러움을 상기시켜주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진정 없을 터인데, 오히려 그 ‘바람으로 인하여 뿌리는 더욱 단단해지고’야 말텐데, 나는 그동안 흔들림을 두려워했고, 서둘러 보편과 통속의 신앙으로 유야무야 귀환하였던 듯싶었다. 그야말로 퇴신(退信)이었다. 그러나 조신을 통한 믿음에서는 오직 불퇴전(不退轉)을 고집해야한다는 주장에 나는 다시금 내 믿음의 유약함을 쓰라리게 응시하였다.

 하지만 책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질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죽비를 얻어맞고, 정신이 번쩍 든 어느 선 수행자의 토끼눈처럼 사실 나의 마음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행이란 것도 결국 온전한 믿음의 확신이 전제되지 않을 때, 무릇 진리와 멀어질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 불퇴전의 믿음을 곱씹으며, 참 찾아 가는 길에는 유보가 없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_함석헌 선생님의 시, “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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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0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종교는 다 '참'으로 통하는 길이라 볼 수 있을까요.
참,참, 생각해보니, '참나'는 무언지.. 저도 바람결님도 '한님'과 하나되어
있는건지요. 제가 너무 오래 유보하고 있는건지요. 생각이 또 겹쳐 옵니다.

바람결 2007-10-10 23:28   좋아요 0 | URL
그래요, 혜경님.
종교는 '참'으로 가기 위한 인간의 지혜이며,
조물주의 크나큰 은총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조물주를 역사의 뒤안으로 유배시킬 때,
무릇 '만물 안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계신
그 분은 설자리를 잃어버리시겠지요?

혜경님,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에요.
여전히 저 또한 그 '참'의 길을 유보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언젠가 내 안의 그 분이 눈뜰 때,
그리하여 그 분과 내가 옹근 하나가 될 때를 기대합니다.
다만 지금-여기에서 그 분 뜻대로 살고자 애쓸 뿐입니다...

여전히, 혜경님의 속깊은 마음이 절절히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