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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과 틱낫한 - 참여하는 영성
로버트 H.킹 지음, 이현주 옮김 / 두레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1. 自序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라는 종교적 울타리 속에서 양육되고, 성장해 온 나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문화는 아주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념이 내 삶의 중심적 가치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신념을 지켜온 것은 생각처럼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말하자면 기독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나의 신앙을 가꾸고 지켜내기란 퍽 지난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여정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스물의 나이에 나는 그동안 내가 몸담고 있던 ‘전통적 기독교’가 갖고 있는 온갖 문제와 오류들에 더불어 싸워야만 했다. 그 중심엔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내적 고투의 근본 동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로 볼 때, ‘전통적 기독교’(혹은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예수적 가치’와 부합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예수적 가치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삶에서 염출되는 유일무이한 가치, 즉 ‘사랑’이다. 그런데 ‘전통적 기독교’는 마치 교리를 수호하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에만 골몰할 뿐 예수의 삶은 살려고 하지 않는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사상과는 정면적으로 배치되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강자들과 손쉽게 야합하였으며, 사회의 온갖 병폐들과 부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데 관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감추고, 사회의 문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높은 곳에 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을 위해 철저히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당시에 힘 있는 사람들, 서 있는 사람들한테서는 미움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 쓰러져 있는 사람들한테서는 사랑을 받으셨어.”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강의 1- 예수의 삶과 길, 이현주, 48쪽, 삼인>

 예수의 모습은 마치 인간세상의 불의와 악으로부터 대항하는 혁명가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다수의 교회들은 예수가 걸었던 ‘좁은 길’보다는 오히려 ‘넓은 길’에 수월한 듯 보였고, 온갖 사회적 문제들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성공과 출세만을 기복(祈福)하는 매개로 기능하고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바랐고, ‘구원’이란 단지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하여 예수를 단순히 ‘믿음’의 대상, 혹은 ‘축복의 수여자’, 그리하여 ‘신’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만 하지, 살려고 하는 이들은, 혹은 교회는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오는 불만과 답답함은 나에게 일종의 반감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내가 믿고 따르던 ‘전통적 기독교’와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기존의 신앙을 허물고, ‘나의 신앙’을 써내려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나는 대학생활의 기간 동안 ‘전통적 기독교’의 작태를 비판하고, 사회 운동(movement)에 참여하는데 몰두하였다.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나는 거리와 기독교 사회 운동 단체를 오가며 오늘날의 세상 가운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답답하였고,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종교적 갈증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이 답답과 갈등이 소위 ‘사회 참여’를 부르짖으면서도 내 종교적 신념을 온전히 삶으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평화’를 위해서 많은 집회와 시위에서 투쟁한다고 하지만 하고보면 내 안에 평화는 없었으며, 나의 삶은 온전히 평화롭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롭게 써내려간’ 나의 신앙에 대한 발본적 성찰을 종용하고 있었고, 때문에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예수의 삶을 몸소 살아내겠다고는 하였지만 결코 나의 구체적 일상에서 사랑과 평화와 같은 가치들은 증발된 채로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고, 내 삶과 신앙의 비루함에 멜랑꼴리했다.

 사실 문제는 ‘영성’에 있었다. 나는 오로지 사회에만 관심을 둔 채 ‘나’를 들여다 볼 틈이 없었다. 내면의 아무런 수양과 변화 없이 나는 나의 종교적 신념이 세상 가운데 온전히 펼쳐지고, 성취되리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와 투쟁의 뒷맛은 늘 씁쓸했고, 갈수록 공허와 불안에 휩싸였다. 그렇다. 나의 내면이 온전하지 못한 채로 나는 외면이 온전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파하게 된 것이다. ‘나의 신앙’은 다시 백지상태가 되었다. 

2. 영성에 대한 소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종교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말하자면 영적 지각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영성’이 종교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웰빙’ 열풍은 일반 대중들이 마음수련과 같은 일종의 영적 행위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영성’ 운운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본디 ‘영성’이란 자기 안에 있는 에고(ego)를 비우고, 자기를 버림에 있지, 자기 만족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기중심성에 이르는 영성이란 무엇이든 돈으로 바꾸는 ‘자본주의 연금술의 마지막 작품’(이현주)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영성 마케팅’이란 신조어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영성이란 종교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마케팅하고 있는 영성은 진정한 의미의 ‘영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 ‘영성’은 오로지 자기 충족적(기복적) 성격이 짙다는 면에서 과연 참다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러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자기 개인적 의미에서만 한정되는 ‘영성’이란 개념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또한 발생한다. 그동안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영성’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여왔지만 너무 개인적 측면으로만 축소된다 싶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설명은 아마도 ‘안과 밖의 조화’라는 말일 게다. 이는 영성을 단순히 개인적인 영적추구에 머무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삶의 통일성을 기해야 한다는 의미겠다. 그러므로 개인의 영적 수련과 함께 행동과 실천을 조화롭게 할 때 비로소 ‘영성’의 참 의미가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의 종교적 번민의 주제였고, 동시에 더 낫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종교의 근본책임이기도 하다. 

3.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갈 종교적 책임, 참여영성

 이 책 <토머스머튼과 틱낫한>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저자 로버트 H. 킹은 서두에서 이 책이 “명상과 활동이라는 주제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당대의 가장 탁월한 영성가라고 할 수 있는 토머스머튼과 틱낫한의 생애와 사상을 비교적으로 검토하며 그 나름의 해설을 풀어낸다. 여기에서 특별히 그가 그리스도교와 불교라는, 각기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 두 지도자를 택한 것은 ‘종교 간의 대화’라는 두 번째 주제와 부합한다. 그는 일견 다르게만 보이는 이 두 걸출한 인물들을 묵상과 행동이라는 주제에서 하나로 묶는다. 나아가 머튼과 틱낫한이 보여주었던 종교 간의 일치와 협력에의 노고는 각기 다른 종교에 속해 있더라고 종교라는 더 큰 차원의 맥락에서 ‘더불어’ 읽힐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자칫 각 종교 간의 특수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자기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신앙에 대하여 좀 더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두 인물이 속한 종교 간의 특성을 존중하면서도 오늘날의 시대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종교의 공동책임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따라서 두 인물의 만남은 종교 간의 교리와 가르침의 문제 너머의 ‘지구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써 조화와 협력, 일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매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토머스 머튼과 틱낫한은 딱 한번,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만났을 뿐이다. 그 잠깐의 만남 뒤에 머튼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이미 공통분모를 찾기에 충분할 정도로 유사했으며, 그 유사함은 묵상과 활동이 통일된 ‘참여영성’적 모습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교수직을 버리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 묵상가의 삶을 살다가 참된 묵상은 사랑의 완성임을 깨달아 세상을 향해 돌아선 머튼. 그리고 조국 베트남의 전쟁 상황 속에서 망명하여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틱낫한의 삶은 짐짓 달라 보이기도 한다. 머튼이 사회 참여에 대해 비교적 느즈막한 나이에 관심하였던 것과는 달리 틱낫한은 젊은 시절부터 사회 참여적 불교인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인정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하나같이 참여 영성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참여영성이란 세 가지 기본요소를 지니는데, 그것은 묵상수련과 사회활동,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였다. 둘은 이 요소들을 소화해낼 만큼 묵상과 활동이 조화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종교가 추구해야 할 바는 궁극적으로 앎(seeing)과 함(doing)이 본디 하나임을 깨닫고, 그처럼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영성은 생각이나 말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위에서도 진실한 것이었고, 따라서 밖으로 드러나 그들의 삶은 내면의 원천에서 그대로 흘러나온 것이었다”는 저자의 주장처럼 책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조화로운 것이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머튼의 묵상과 틱낫한 마음 모음 수련은 내면을 가꾸기 위한 영성 수행이었고, 전쟁의 세상에 대한 외침은 그들의 내면에서 비롯된 응축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참여 속에서 그들의 영성은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머튼은 아마도 “성스러운 사람이란 자기가 아는 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본디 내면을 ‘앎’을 통해 외면의 ‘함’이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두 ‘지구의 영웅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은 21세기 문명의 총체적 위기로 명명되는 오늘날의 시대에 온당한 치유 방법은 묵상(명상)과 활동의 통일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변화를 추구함 없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기대는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리라.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는 명상(자기 비움)과 사회 참여적 실천은 종교인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4. 다시 自序 

 지상태였던 ‘나의 신앙’에 대한 길잡이를 만났고, 나는 다시 참된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였다. “21세기 인류가 붙안고 씨름해야 할 대명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그 길을 모색하고 몸소 삶으로 실천한 선구자”들을 통해 참다운 종교인, 옹근 신앙인의 자세를 무릇 깨닫게 되었다. “현세와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저버린 채 하느님과 관계된 일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이비 관상적 영성은 오늘날 분명 필요치 않다”고 일갈했던 머튼의 말이 오래도록 맴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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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12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예전에 물무늬라는 닉네임의 서재가 있었어요. 기독교신앙이 독실한 분이셨고
진지하게 공부하는 분이었는데 님의 글들을 읽으면서 분위기가 일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그분?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님, 글이 너무 좋습니다. 앎과 함을 생각하다
갑니다..(이런 또 생각만 하는군요, 제가^^)

바람결 2007-08-12 17:30   좋아요 0 | URL
저...물무늬 아닙니다ㅎㅎ 그 분처럼..저는 기독교 신앙에 독실하지 않아요. 아직 멀었지요. 독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서 이렇게 발버둥치고 있는 중이랍니다. 다만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써 (종교 혹은 기독교가)지금 이 모습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꾸만 요로코롬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너무 잘 봐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글도 항상 서툴고 모자란데...(글보다 삶은 더 하죠ㅠ)

그나저나 혜경님의 '무비프리즘'은 몰래 몰래 잘 읽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 분 댓글처럼, 모아서 책으로 내기에 손색이 없을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