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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어느덧 ‘가장 잘 팔리는’ 소설의 작가로 한국 소설계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김훈. 그러나 나는 몇 해 전 발표된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접하고, 적잖이 실망했었다. 세간의 찬사와는 달리 소설이 주는 흥미진진함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운의 끝맛을 뒤로한 채 나에게 김훈의 존재는 어느 정도 잊혀 진 터였다. 그러던 중에 한 선배의 권유로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을 읽게 된 것은 김훈에 대한 일종의 오해를 그야말로 뒤엎어놓게 된 사건(?)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김훈 식 글씨기의 한 단면을 발견했고, 한 줄 한 줄 밑줄을 그어가며 그의 정제된 언어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된 후로부터 나는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는 그의 칼럼들을 찾아 읽으며, 김훈과 화해하고 있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2000년을 전후로 몇 년간 여기저기 게재되었던 김훈의 토막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때문에 이미 접해본 글들이 더러 있었고, 친숙함이 먼저 앞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김훈의 글은 가볍게 읽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덧 마음은 무거워지고, 눈은 충혈 되었다. 더 이상 책을 읽어나가기 버거운 대목에 이르면 책을 덮고,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세상살이가 한스러워 참담함마저 느껴졌다. 그뿐인가! 그의 명문을 마주치게 될라치면 고스란히 후폭풍을 감당해야했다. 역시 ‘정제된 언어와 탄탄한 문장은 읽는 이의 정신을 궁지로 몰아넣는구나’하고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예의 소외되거나 사라진 것들을 바라보는 김훈의 눈은 한없이 너그럽다. 반대로 중심을 향해 증식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제법 가멸차다. 일례로 한국의 현대사가 ‘고통분담이 아닌, 고통전담의 역사’였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느껴지는 억울과 울분은 민초들을 향한 애정이 드러난다. 또한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산골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이 없는 절경은 국토가 아니’라고 한탄한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들이 토해내는 추상의 언어들은 김훈에게 타매의 대상이다. 그들은 생생한 삶의 구체성과는 별리된 채, 오로지 ‘국익’이라는 허상을 뻔뻔스럽게 되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가는 합리주의의 정글’은, 그 보편과 객관의 언어들은, 비로소 극복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서 김훈은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76쪽)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아마도 김훈의 모든 글에서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상성과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보편과 객관, 정의와 합리라는 이름하에 살해되는 삶의 구체성, 현장성, 그리고 언어의 일상성이었다. 그는 정부 자체를, 집단 자체를, 이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 속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초월성, 추상성과 같은 그 막연함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느 ‘쪽’을 자처할 수 없고, 오로지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을 선포한 것이다. 주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구체성 속에 생생히 근거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글을 쓴다는 것도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하여 “글을 쓰는 일은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203쪽)이다. 곧 구체적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말이란 헛것이며, 소음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말은 몸보다 허술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말은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끝없이 주절거린다. 나는 그 허술함의 운명을 연민한다”(5쪽)는 김훈의 말처럼, 본디 말은 허술과 위태의 운명을 지닌다. 때문에 그는 그 운명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허덕지덕한다. 보편적 진술이 아니라 땀 냄새 나는 몸의 언어, 삶의 구체를 성취하기 위한 ‘말’은, 조롱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상성과 구체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글은 그냥 ‘지껄임’일 뿐이다. 그러나 일상과 구체 속에서 세상의 비애와 고통이 보이고, 글을 쓰는 손은 어느덧 그 모든 아픔을 쓰다듬고 있었다. 비록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169쪽)고 김훈은 비통해했지만 그 무참함 속에서 세상의 비애를 쓰다듬는 작은 손의 존재가 느껴졌다. 추상과 보편의 진리 속에서 말살된 몸의 언어들이 다시금 솟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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