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 정치학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정배 옮김 / 대화출판사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매스컴에서는 이 타결의 장면을 정말이지 ‘극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협상장인 하얏트 호텔을 배경으로 진행된 뉴스의 분위기는 이미 중립성을 잃은 상태처럼 보였고, 진행자는 FTA가 마치 민족적 과업인 양 흥분된 어조로 협상장의 분위기며, 협상 진행 과정이며 하는 것들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타결의 순간엔 FTA의 실익을 꼼꼼하게 따지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돈으로 환산된 지표는 여과 없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미 숫자는 의미와 가치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측 협상단 대표는 득의만면하게 “이제 무한 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노라”고 선포하고 있었고, 익명의 지지자들은 그 순간 환호작약하고 있었다.

 그 시간 한 택시운전사는 협상장 부근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하였고, 민주노동당의 의원들은 여전히 단식 중이었으며, 농번기에도 불구하고 FTA를 막기 위해 서울에 상경한 농민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쏟고 있었을 터였다.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씨는 지난해 한 강연회에서 “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FTA가 추진되고 있었던 정세 속에서 침묵의 카르텔을 계속하고 있는 지성인들을 보며 내 쉰 한숨이요, 탄식이었다. 그는 그러한 지성인들의 모습을 보며 파국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도 산업주의, 자본주의에 속박된 채 일상의 톱니바퀴 속에서 파국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현대의 인간형을 보았고, 깊은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생태주의를 표방하며 지난 몇 해간 한국사회의 생명∙생태 담론을 주조하고, 이끌어 온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그에게 있어서 FTA는 ‘경제중심주의와 에콜로지(생태주의)의 갈등’으로 환원될 만큼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그가 느꼈을 실망감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FTA가 생태주의와 연관되는가? 그것은 바로 FTA-뿐만 아니라 IMF, WTO 등도 포함하여-의 본질이 ‘초국적 기업들이 지난 수십 년 간 추구해 온 자본 증식 수단’(김종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였던 세계화의 논리가 존재하고, 발전과 성장, 자율과 효율이라는 기제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필연적으로 제3세계의 빈곤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고, 빈부격차는 더 커졌으며, 지구 온난화는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의식과 연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 실천적인 지성으로도 널리 알려진 제레미 리프킨의 「생명권 정치학」을 만나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생태나 환경의 문제 등을 위시하여 지구적 위기를 다룬 일단의 책들이 허황된 이념적 구호를 필두로 한 채 그 논리나 밀도있는 이론은 빈약했던 반면에 리프킨의 이 책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의 발전과 그 이면을 에콜로지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통찰하여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안정’의 개념을 중요한 핵심어로 제시하여, ‘안정’을 현대 세계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삶의 가치로 인식한다. 그리고 나아가 “지구를 구하는 일이 안정에 대한 우리 생각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나아가 인류가 깨달은 생태학적 의식과 보다 잘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23쪽)임을 밝힌다. 이를 위해 그는 인간의 문화사를 통해 ‘안정’의 개념이 어떻게 변이되어 왔고, 그 와중에서 안정의 개념과 자연의 개념이 어떻게 서로 분리되어 다루어지게 되었는가를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먼저 1장 <지구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다>에서 그는 베이컨, 데카르트, 아담 스미스, 존 로크 등 서양 사상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고,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게 되었는지, 그 세계관적 근거들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 아래서의 역사적 추이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바로 인클로징 운동이었다.

 인클로징(enclosing: 구획화)은 인간과 동물의 자유로운 통행을 막기 위해 일정한 땅을 울타리, 도랑 등의 격리물을 사용해서 둘러싸는 것“을 뜻한다. 구획화는 땅을 사적인 통제 아래 두었고, 공동체가 예전에 땅을 사용하기 위해 가졌던 어떠한 권리도 차단해 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사적 통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자들의 혁명’이라고 불려질 만큼 인간과 자연의 사이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을 한 마디로 한다면 지구의 땅, 바다, 대기권에 대한 범세계적인 사유화와 상품화 과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땅과 사람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해버렸고, 이제 안정은 기계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며, 안정성은 믿음이나 선행보다 기술적 위업과 토지 소유에 따라 측량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 운동은 축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새로운 인클로저 운동의 추동 원인인 초국적 기업들은 날로 자기 증식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은 수출용 소고기를 살찌우기 위해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해저와 대기권과 전자파, 심지어는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구획화, 즉 사유의 과정과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지구와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며, 인간은 상품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의 문제 또한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지구의 운명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2장 <지정학과 자연>에서는 민족 국가, 즉 존재 가치를 거의 경제적 사항에만 의존하는 기업형 국가들의 본질과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기업체와 더불어 민족 국가에게는 효율성과 물질적 진보가 최고의 가치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클로저 운동은 군산복합체의 출현, 온갖 무기와 무장,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지구 공유지를 경계 짓고,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을 부상하였으며, 또한 지정학 이론의 구상은 지구 공유지의 정복과 사유화에 대해서, 그리고 국경과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민족 국가들 사이의 점증하는 군사적 분쟁에 대해서, 이상적인 합리성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민족 국가들은 지정학적 게임에서의 승리를 위해 최첨단 무기들을 개발하고, 핵을 소유함으로써 전 세계를 그야말로 잠정적인 ‘집단 자살’의 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이제 안전은 지표면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핵 시대에 안전이란 그저 벼랑 끝의 춤사위가 되었을 뿐이다. 또한 생물학전을 위한 유전자 개발의 전쟁 상황은 이제 정말로 ‘생명의 끝장’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3장 <프라이버시의 문화>는 한 마디로 근대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으로 고립된 존재가 되었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의 기록이다. 침대와 의자와 욕탕, 잔디, 거울과 같은 일종의 물체나 자연은 개인 삶의 사사화로 인해 철저히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개인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중세의 가치관과는 달리 근대인에게 안정감을 제공해주었다.

 자동차는 어쩌면 현대인들의 안정감을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율성과 효율성의 측면에 있어서도 자동차는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게 익숙했던 원초적 안종, 즉 자연과의 깊고 본능적이고 신체적인 관계로부터 오는 안정감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만의’ 도구들에 대한 소비는 이제 현대인들의 신앙으로 대체되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자기의 것을 소유하기 위해 집착하게 되었고, 이 ‘합리적 자기 관심의 세계’, 즉 소비는 마치 개인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문화사가인 제임스 트위첼은「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라는 퍽 흥미로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물건을 사면 구원 받으리라. 그대는 오늘 휴식할 자격이 있도다. 당신, 당신, 당신은 모두 하나다. 우리는 당신을 염려하는 벗이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 우리가 보살핀다. 우리를 믿어라. 당장 사라.”

 이제 인간과 인간의 속 깊은 연대는 사라지고, 개인화된 인간의 벗은 소비가 되었다.


 4장 <몸의 정치의 안정 보장> 또한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동물성으로부터 이탈, 분리된 근대의 인간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가? 이제 근대인들의 식사 예절이 바뀌었으며, 인종 이론을 채택하여 인간을 짐승화하여 길들이기 시작하였고, 미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 등을 희생시켜 시각 위주로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들을 변형시켰다.

 이제 사회는 촉감을 잃어버렸고 자연은 인공으로 몸은 탈화되고, 원초적 동물성은 인간성으로 분리, 대체되었다. 말의 문화는 인쇄의 문화, 즉 시각화되어 인간의 창조성을 감소시켰고, 세계를 수용하고 아우르던 귀의 문화로부터 공격적인 눈의 문화로 전이시켰다. 이와 같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즉 애초에 우리에게 부여된 조건들로부터의 이탈은 리프킨의 말처럼, “지구 위에서 인간을 이방인으로 전락시켰다.”

 이제까지 살펴 본 바를 종합해보면, 리프킨은 땅에 기대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온 인간 공동체를 여지없이 파괴한 것은 기술문명이라고 본다. 그는 또 생태계의 파괴, 핵전쟁의 위협, 민족·종교분쟁 등은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생겨난 피치 못할 재앙으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5장 <생명권 시대의 도래>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존속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 혹은 생명체로 파악하는 이른바 '생명권 정치'를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인류의 가치관과 사고가 지구전체를 거대한 쇼핑몰과 공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물질중심주의에서 생물권중심주의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이 궁극적으로 개인적 평온함과 안정이 보증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에 입혀왔던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자율과 효율의 미명 하에 상실했던 생명과 평화의 전 지구적 공동체에 대한 태고의 기질을 업수이 여기지 않고, 지구 안에서의 옹근 자연으로서, 전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무릇 용기는 선택이고, 선택이란 어느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버림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신영복) 그동안 집단 자살체제를 만들고, 진보와 발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길을 버림에서부터 생명은 살고, 자연은 숨 쉰다.

 

 핵전쟁의 위험을 알리는 ‘심판의 날’시계라는 게 있다. 이 시계는 인류 멸망의 위험도를 가늠케 하는 상징물로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1947년 시카고 대학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 시계를 관리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 당국은 지난 2002년 2월 28일 이 시계의 분침을 2분 더 앞당겨 11시 51분에서 11시 53분으로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9∙11 테러사태, 부국과 빈국간의 불균형 증대, 미국의 ABM 탈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계의 바늘이 밤 12시, 곧 자정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지구상의 핵전쟁 위기가 그만큼 임박했다는 뜻이다.(매튜폭스)

 이처럼 오늘날의 전 세계적 상황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프킨은 새로운 세대의 생명권적 의식이 이전 세대와는 사뭇 다른, 긍정적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바야흐로 생명권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발판은 개인의 주체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이다. 그리고 결단은 궁극적으로 자연에 대한 겸손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만물萬物이 여아동근與我同根이라고 하였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하느님과 나는 하나-라는 뜻이다. 곧 자연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자연이 있다. 만물이, 이 우주와 나와 한 몸인데, 지금의 우주는 참 많이도 상처 입었다. 치유의 손길이 필요할 때이다. 덧나지 않게, 덧나지 않게......

 

 사실 인간의 ‘문화(culture)’는 어떤 의미에서 '땅을 간다'(culture)'는 사실에서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내팽개친 방향으로 발전해 오며 일관되게 흙을 봉쇄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부수고, 자르고, 파헤쳐서, 짓고, 세우고, 만드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문화는 이제 극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1972년 <성장의 한계; Limits to the Growth>라는 로마클럽의 보고서에서는 종래와 같은 성장 논리에 입각한 경제발전이 이 추세대로 계속된다면 1972년을 기점으로 100년 안에 인류문명은 자연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며, 문명사회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충격은 지속되지 않고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35년이 흘렀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만 작금과 같은 전 지구적 파탄과 멸망의 기로에서 우리는 또 다시 선택을 유보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우리의 바탈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진보와 발전과 결별하자. 그리고 지금-여기에서 ‘지구 크기로 생각하며, 지역적으로 행동하자Think Globally, Act Locally’ FTA는 체결되었지만 FTA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도 작별하자.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문명 속에 나의 존재 의식까지 내맡기진 말자. 그렇게 생명권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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