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관 살인 사건, 비상구 - 김영하의 섹시한 글쓰기에 관하여

 

 

 

  김영하의 작품은 자극적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글은 언제나 섹시한 맛이 있다. 아마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부터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간혹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나의 오감은 항상 비슷하게 반응한다. 마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를 꿈꾸면서 극대화된 쾌감의 짜릿함을 느끼는 기분과도 같이 제 혼자 달떠 올라서, 글을 다 읽고서는 항상 사람이 간혹 지나다니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폐허에서 몰래 자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대한 내 시선이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이번에 읽은 그의 여러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던 ‘사진관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 내가 크게 주목한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살인과 치정이라는 상황,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론은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 비단, 이 글속 화자의 직업 자체가 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의 글속엔 언제나 살인과 치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와 같이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살인과 치정이야기니까, 당연히 치정을 통한 살인이야기로 종국을 내야할 것 같지만, 살인자는 전혀 뜻밖에 곳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굳이 무슨 까닭으로 살인이야기에 치정극을 섞어서 글을 쓴 것일까? 이 글 속에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김영하는 그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조형사야 신참이니까 알 수 없을 테지만 내 코엔 그 냄새가 난다. 그것은 청결한 화장실과 비슷하다.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 미미한 방향제 내음, 개방된 은밀함,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인과 치정이야기인 까닭에 여자의 인상에 대한 이 묘사는 소설에서 하나의 풍미적인 작용으로 끝나야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과 분위기로 자리매김해버린다. 즉, 소재와 주제와 별도로 풍미가 주체가 되는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청결한 화장실 같은 느낌이라니? 또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섹시한 단어선택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묘사에 묘한 상상을 덧댄 내 개인적 기호와 취향이 소설의 해석 자체를 오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괜한 장치적 기능으로 작용하는 소설의 풍미에 발정한 개새끼처럼 혀를 내밀고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껄떡거리는 우를 현재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그다운 소설이라고 느낀 소설이 이 소설인 것을, 그래서 그 풍미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더 좋은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대체······.

 

  두 번째로 내가 유심히 본 소설은 ‘비상구’였다. 이 역시 ‘사진관 살인 사건’과 비슷하게 여자의 질을 비상구로 표현해내는 풍미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빼고서 이 글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90년대식 쌈마이들의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뭐 이 정도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굳이 이 이야기의 ‘비상구’를 각박한 현실에서의 탈출구라는 풍유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나는 대충 수긍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굳이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온당한 해석이긴 할 터이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 작품집 내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고압선’ 등이 훨씬 풍유적인 글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김영하의 문학적 풍유와 비유에 관해 말하고자한다면 그 두 작품들을 뽑을 것이다. 그에 비해 ‘비상구’는 문학적 풍유를 들먹이기엔 그 끈이 너무 엷다. 아니, 사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니 거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자라는 그것도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한정하여 그 특유의 판타지를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 글은 ‘사진관 살인 사건’ 보다 풍미 그 자체를 위해서 쓴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조금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엔 청결한 화장실이라든가, 갓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서 표현하는 ‘비상구’라는 직유법적인 비유가 내 취향이 아닌 탓인 듯싶다. 하지만 재미와 가독성의 측면에서 이 글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제까지 내 개인적으로 몰랐던 김영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섹시함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때론 너무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만을 꿈꾸어 그 여운이 길지 못하다는 사실. 그래서 그의 발칙한 상상력과 사변들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긴 하였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었는지 나는 이제껏 김영하를 따로 파고자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이번에 읽게 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경우는, 만약 문자 그대로 자전소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읽은 김영하와는 완전히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그 글속에서 그는 글에 영혼을 판 대가로 아마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줄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단순히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함께 나눌 여자가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그렇게 같이 생활인으로써 함께 살 수 있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아쉽게도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글이 그에겐 나름 의미 있는 자전적 소설일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 특유의 풍미인 자극적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김영하는 언제까지나 젊고 파릇한 감성으로 섹시한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섹시함이 불변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란 작품집이 오래된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성이 아쉽게도 조금은 올드하다는 사실이었다. 삐삐와 채팅 이야기, 오래된 영화와 오래된 음악 이야기, 그 주된 감성의 뿌리는 거의 90년대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와 같은 90년대 학번에겐 감성팔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게 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도 이제 슬슬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에서 조금 더 오래 기억될 정사들로 이야기를 바꾸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더 깊은 풍미의 섹시함을,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각인될 그런 섹시함을 추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그다운 글을 추구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가 ‘피뢰침’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이란 아주 짧고 순간적이기에, 그래서 전격을 맞은 듯한 느낌이기에, 그 뒤에 남는 것은 일종의 요의 현상뿐일지는 몰라도, 단지 그런 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일지는 몰라도, 섹시함이라는 것에도 일종의 농도가 있다고, 그래서 그 뒷맛도 다양할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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