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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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의 중요성 새로운 권력의 탄생과 막장의 지평 확대에 대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에 관련된 병을 얻고 난 후유증 탓인지, 어떤 책이든 읽고 쉬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다. 그래선지 읽는 순간, 무언가 강렬하게 꽂히는 글은 어떻게든 기억에 남기고 싶은 이유로,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이 저절로 끓어오른다. 이 글이 그랬다. 사실, 별 기대 없이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와일드란 작가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란 작품이 내 20대 때에는 분명,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피어오르게 했지만, 지금 다시 봤을 때 너무 과장된 미학이 아닌가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들을 보면서도 너무 감정의 결이 날뛰고, 풍자와 해학이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너무 극에서 극으로 널 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간극처럼, 혹은 이 사람의 무언가 종잡을 수 없는 삶처럼, 불안하게 널 뛰는 대부분 작품을 그냥 대충 흘려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오스카 와일드를 붙잡고 보았느냐면, 또 그 널뛰기의 간극에 대한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견한 작품이 이 진지함의 중요성이다. 일단,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지극히 유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풍자와 해학을 담은 희곡이며, 무언가 절묘한 막장에 대한 재해석으로 내게 읽혔다. 물론, 그 시대에 막장이란 개념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막장은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이복 남매의 사랑, 혹은 드라마의 흐름을 떠나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주인공의 출생 비밀 등이 발견되는 그런 류의 막장이니까, 오스카 와일드의 시대에 더군다나 영국에서 그런 개념이 있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오스카 와일드가 막장의 근원을 건드리고, 통쾌하게 희화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일까? 지금부터 살짝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크게 두 명이다. 한 명은 잭이란 청년으로 시골 태생의 상인에게 길러졌는데, 어니스트 워딩이란 다른 이름으로 런던과 본인이 자란 시골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앨저넌이란 청년으로 런던의 귀족 출신인데, 형식적이고 점잔빼는 귀족 생활의 권태로움에 번버리되기란 놀이로 지방을 다니며, 약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번버리되기란 이 글에서 창조한 언어인데, 지금은 영어사전에 관광여행을 즐기다.’란 뜻으로 등록되어 있다. , 여흥을 즐기는 삶을 어느 정도 표방한 의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서 번버리되기는 앨저넌의 독특한 이중생활을 의미하고 있다. 시골에 아픈 친구인 번버리를 설정함으로써 따분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벗어나는 핑계로 자주 삼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은 교묘하게 이중생활이라는 접합지점이 있다. 하지만 성격적인 차이와 태생의 차이는 무언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잭은 조금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인 반면에, 앨저넌은 다소 자유분방하고 방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신분 구조상으로 볼 때도 잭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신분이 상승한 상인을 대표하고, 앨저넌은 형식만 남은 귀족층을 대표하는 구도를 띠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진다. 사실, 잭이 런던에서 어니스트 워딩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시골의 따분한 생활을 벗어나려는 방편으로도 언뜻 보이지만, 실은 앨저넌의 사촌동생인 그웬델린 양을 열렬히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웬델린 양의 이상은 어니스트란 이름의 청년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 잭은 런던에서 어니스트가 되어 뜻하지 않은 이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청년의 태생은 우아한 귀족과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그냥 부유한 상인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웬델린 양도 어니스트란 이름의 잭을 사랑했고, 흔쾌히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정말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 브랙널 부인이 여기에 딴지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기어이 잭의 태생의 비밀을 파고들어, 잭이 어릴 적 가방 케이스에 넣어져 빅토리아 역에서 발견되어 토마스 에듀라는 상인에게 키워졌다는 사실을 실토하게 하고, 격이 맞지 않다며 사달을 내버린다. 그런데 불 난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그의 친구 앨저넌은 그의 본가에 찾아가 그 주특기인 번버리되기로 그가 후견하고 있는 토마스 에듀의 딸 세실리 양과 새롱거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약혼까지 맹세하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부아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름 그에게도 책임은 있다. 일단, 그가 이중으로 생활하면서 본가인 시골에 자신이 어니스트란 망나니 동생 때문에 런던을 오간다는 핑계를 댔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 사실을 앨저넌에게 들켰다는 점이다. 그러니 번버리되기의 달인인 앨저넌은 급기야 자신이 잭의 동생인 어니스트가 되어 세실리 양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 세실리 양도 이상이 어니스트란 이름의 청년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어떤 면에선 분명 제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긴 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런던에서 생활할 수 있는 모든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그웬델린 양과 결혼할 수 없다는 그 사실로 이미 그는 가상의 동생인 어니스트의 죽음을 설정하고, 상복까지 차려입고 왔는데, 버젓이 앨저넌이 어니스트가 되어 살아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번 번버리되기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게, 그 방탕한 앨저넌이 세실리 양의 미모에 반해 어니스트란 이름의 세례명까지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가는데, 여기에 갑작스럽게 그웬델린 양까지 찾아온다. 등장과 동시에 그웬델린 양은 잭과 앨저넌이 없는 상태에서 세실리 양과 마주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바로 여기서 둘은 서로 적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둘이 동시에 약혼한 사람이 어니스트라고 하니, 당연히 서로 아니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둘의 태생도 어찌나 다른지, 한 명은 고상한 귀족 출신의 여성이고, 다른 한 명은 시골에서만 자란 18살의 어린 처녀이니, 서로 비꼬는 방식도 매우 볼만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들의 두 남자가 돌아와 그 둘의 오해는 풀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알고 보니, 두 남자 다, 본명인 잭과 앨저넌이란 이름이 아닌, 어니스트란 이름으로 그동안 자신들을 속여온 것이다. 이에 매몰차게 두 여자는 두 남자를 내쳐버린다. 이제 두 남자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방법은 어떻게든 세례명을 어니스트란 이름으로 받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둘에게는 각자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 하나씩 주어져 있다. 먼저 잭은 그웬델린 양의 어머니 브랙널 부인이다. 아무리 그웬델린 양이 사랑을 찾아 그 시골까지 왔다고 하지만, 그 극성맞은 브랙널 부인이 가만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딸을 찾아 브랙널 부인은 기어이 그의 본가까지 왔고, 이제는 급기야 세실리 양을 탐내기 시작한다. 비록 시골 출신이라도 13만 파운드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시골에 적지 않은 땅과 그 당시 부를 대변하는 상인 계층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잭이 잠자코 가만히 있다면 말이 안된다. 일단, 누구보다 그는 앨저넌이란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다. 그의 번버리되기란 일종의 방탕한 놀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해 왔을지 그가 직접 겪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웬델린 양과의 결혼은 반대하면서, 돈을 이유로 자신이 후견하고 있는 세실리 양을 데려가려고 하는 브랙널 부인의 심보를 어떻게 곱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는 후견인으로서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 일단, 그는 작고한 세실리 양의 아버지로부터 법적 후견인 자리를 양도받았다. 그 권리는 세실리 양이 35살이 될 때까지이다. 다시 말해서, 세실리 양이 35살까지 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결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잭과 앨저넌 둘 다 모두 쫑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급작스런 반전이 등장한다. 잭과 앨저넌 모두 마지막 수단으로 세례를 부탁했던 지역 사제 채저블 신부가 와서 세실리 양의 가정교사 프리즘이란 이름을 우연찮게 흘리는 순간, 브랙널 부인이 격하게 반응하며 반전의 서막이 드리운다. 아니, 막장의 공식이 드리운다. 30년 전 브랙널 가문의 한 여인이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서 사라졌는데, 그녀가 바로 프리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을 법한, 브랙널 부인은 소설책이라고 명명하며 이를 가는 3권 분량의 일기가 유모차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불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브랙널 가문을 도망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가방에 담아 빅토리아 역 임시 보관소에 숨겨놓은 후, 발견한 토머스 에듀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어, 먼발치에서나마 늘 아들 곁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 실제로 잭과 앨저넌은 이복형제였고, 잭이 앨저넌의 형이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존 장군의 세례명이 어니스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둘은 어니스트란 이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꿈인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과 짝을 이루며,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글을 다 읽고서 떠오른 문장은 처음에도 밝혔듯이 막장의 새로운 지평이란 생각이었다. 비록 그 당시 그런 개념이 없었을지라도, 서구 사회의 기반이 되는 그리스 신화가 거의 막장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과 친부 살인 등으로 이루어진 설화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서구 사회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신화는 이런 막장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내가 이런 막장이란 개념을 인류학적으로 확장시킨 이유는 그 근간을 분석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막장이란 개념이 이렇게 모든 인류에게 친근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보고자 함이다. 이 때문에 모든 문학과 드라마는 막장을 기본으로 하여, 재탄생하고, 또 다시 재해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왔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또 이 때문에 막장이 우리 안에서 진부함이란 등식으로 성립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의 진지함의 중요성은 이 막장 공식을 이용해서 아주 유쾌하게 그 당시 사회계층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있다. 앞에서도 줄곧 조금씩 언질을 준 것처럼 이 희곡이 쓰였을 당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서 지위만 남은 귀족과 자본이란 막대한 권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상인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허위의식과 그 당시의 세태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읽는 이에게 통쾌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본질은 매우 씁쓸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희곡이 보여주는 것은 각각 명예이거나 지휘가 필요했던 상인 세력과 돈이란 흐름으로 뒤바뀐 새로운 시대의 이해가 부족한 귀족 계층이 협력함으로써 또 다른 지배권력으로 등장하는 진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도 매우 그럴듯한 합리성을 부여한 것처럼 대중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 이유로 제목을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라고 만들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물론, 이 글에서 그런 합리적인 이유가 드러나는 지점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다. 오히려 어니스트란 이름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는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합리성 혹은 진지함이거나 정직함에 대한 집착이 그 당시 두 계층을 하나로 엮는 명분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제목의 풍자는 결코 해학적이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 소름이 끼친다고 할까? 더 이상 지위가 아닌 돈이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기존의 권력 체제와 새로운 권력이 하나로 될 수 있는 명분은 간단하다. 없는 합리성을 만들면 그만이다. 자본주의란 이름을 빌려서 노력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당연히 일반 사람들에게 그 논리는 통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반노예나 다름없는 농노도 아니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을 갖고 돈을 벌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물론, 실제로 그랬고,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지금도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합리성이 더 이상 깰 수 없는 구조를 공고히 갖추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 희극에서 그웬델린과 세실리 양이 그토록 비합리적으로 합리와 진지함을 구하는 게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지, 잠깐 생각해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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