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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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네 가지 코드로 읽고, 비교해 보는

 

 

 다 읽고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문장도 유려하고, 무언가 여성풍, 그리고 젊은 층을 대변한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델마와 루이스가 생각났다. 물론, 너무 올드하고, 매체 자체도 소설이 아닌 영화이지만, 왜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이 났을까? 그런데 중요한 건, 너무 오래전에 보아서, 기억이 희미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다시 보고서, 조금 숙고한 뒤, 이제야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일단은,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을 네 가지 코드로 분석해서 살펴보려 한다. 여성 코드, 동성애 코드, 일탈 코드,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 관한 코드이다. 먼저, 여성 코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누가 봐도 여성의 전유물인 냄새가 풀풀 난다. 문장 하나하나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주인공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라든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 여성 코드를 표현하는 방식이 기존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여성 코드는 남성이라는 주적 하에 이루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만 보아도 마찬가지로, 강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남성은 주적도, 그렇다고 동반자도 아닌, 그저 하나의 도구처럼 설정되었다. 그것도 그나마 아람이 조금 이용하는 도구이거나, 삶은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이 소설에서 다른 부분에서는 그 역할 자체가 너무 미비하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이 소설은 동성애 코드로 성 코드의 전환을 이행한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에서도 미비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동성애 코드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두 여자는 짧은 입맞춤을 하고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를 훌쩍 넘어, 어느덧 2020년대를 넘어서는 지금 동성애 코드는 더욱 적나라해지고, 더더욱 진일보 하였다. 끈적끈적한 여름밤 소영은 벗은 몸으로 주인공 강이에게 똑같이 벗을 것을 강요한다. 그렇게 더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훌훌 모든 실오라기를 털어버리고서 까무룩 잠이 들면 그만인 것을 깨어나 보니, 소영이 어느새 주인공 강이의 가슴을 핥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름 둘은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밤이면 서로를 만지며 탐닉해 들어간다. 그런데 이 표현엔 한 가지 어패가 있다. 서로라는 말이 다소 버석거리는 감이 있다. 무언가 탐닉하는 이는 소영이라는 건 확실한데, 주인공 강이의 경우는 조금 두려워하는 느낌이다. 아니, 뭐랄까, 소영을 동경하면서도 무서워한다고 할까? ‘델마의 루이스에서 보여준 평등의식이거나 우정에 가까웠던 동성애 코드는 이렇게 무언가 계급 차이를 보여주는 동성애 코드로 다소 복잡하게 변모했다. 이 때문에 두 세대의 일탈도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는 거의 전적으로 남자에 대한 복수로 일탈이 구성되어 있다. 처음 여행을 출발할 때부터 델마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한마디도 없이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루이스가 총을 들어 델마를 강간하는 남자를 죽이는 장면, 그리고 거의 종반쯤 계속 마주치는 화물차 운전자의 성적 희롱과 폭언을 참지 못하고, 두 여자가 총을 들어 화물차를 폭발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왜 남성을 향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지 전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동성애 코드에서 계급 차이를 보여준 이 소설은 그 둘의 대립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누군가는 그 계급을 유지해야 하고, 누군가는 전복해야 한다. 주인공 강이 눈에 어른거리는 하얀 몸의 예쁜 소영은 언제나 자신을 학대할 뿐, 단 한 번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빈부의 차이까지 둘은 양극에 위치에 있다. 만약, 어떤 시발점만 주어지지 않았다면, 착하다 못해 약간 멍청하고 무딘 주인공 강이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읍내동 사는 주제에라는 말에 강이의 방아쇠는 당겨진 것일까? 모두 잘 사는 동네인 전민동에 사는 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혼자만 읍내동에 살았기 때문에, 줄곧 자신도 모르게 콤플렉스로 무의식에 박혀있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동경했던 소영에 대한 공포의 근원을 그 말을 발단으로 찾게 된 것일까? 동성애 코드와 엇물려 공포심을 동반한 동경이라는, 경외라는 그 감정이 순식간에 증오와 원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소영을 칼로 찌르고 감옥으로 가는 것이 왜 최선의 삶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이의 일탈은 이렇게 전적으로 소영이라는 대상 하나에 집착하고 있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사실, 마지막 장면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젊은 세대를 보여주는 코드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 코드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내 뇌리를 때리기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로, ‘델마와 루이스가 문득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델마와 루이스가 보여준 일탈은 주적인 남자인 나조차도 전율을 느끼면서, 짜릿함을 느꼈으니까. 동시에, 그 일탈의 코드가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로 충분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여운도 넉넉했다. 그런데 이 최선의 삶이 보여준 청춘 군상들의 일탈 코드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나로선 당최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절망이 청춘이라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기에도, 주인공의 집착 대상은 너무 협소하다. 물론, 여기에 이미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쌓인 계층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화두로 받아들이기에 이 소설이 그만큼 충분한 여운과 감동을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소설이 꼭 어떤 화두를 던져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그저 상황 묘사를 잘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 씁쓸함은 무엇일까? 정말 내가 라떼는하는 꼰대로 변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이 소설로서 그 자부심을 잃어가기 때문일까? 여러 생각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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