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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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집중했고 결핍을 보았다. 구원에의 갈구를 들었지만 모른 척한다. 나는 구원을 모른다. 외로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어보았다. 살아내는 방법을 듣기 위해 처내미는 귀는 불순했다. 가까스로 떠올려진 기억. 고독했을 때가 까마득했다. 지나친 낙관과 애처로울 정도의 당당함은 가난에서 나오고, 그외의 것들은 없었다. 내팽개쳐진 장기들처럼 지도와 지표가 부유하고, 약도 있고 희망도 있는 나는 더없이 완벽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불우한 가정환경, 아버지의 오랜 부재, 어머니의 재가, 잃어버린 고향'으로 대변되는, 머리 위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우중충한 껍데기의 의기양양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수동성 외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휘청거렸다. 가질 수 없는 변명은 굴욕이었다. 더이상 울지 않는 그와 결코 수렴되지 않는 내가 만나 생의 이면을 볼 줄도 알게 되면 그때 말하겠지, 아무 곳에도 없고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구원 아니면 희망. 그가 찾는 모든 것.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울타리가 새삼 옥죄일 리 없고 별안간 해방을 선사할 리도 만무하므로 그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무극사는 유일한 설정임에도 비성공적이다. 그는 초라한 몸뚱아리 하나를 바치고 비로소 신화가 된다. 뒤란의 주홍색 감나무. 헛헛함이 발작적으로 배어나오는 방. 회색빛으로 감금된 잔혹한 사내. 큰아버지의 서랍에서 꺼내준 손톱깎이. 비밀은 모두 핏빛이다. 가문의 기둥이자 닫힌 벽의 상징 큰아버지, 압축적 삶의 본보기 뒷방 남자, 바람나기 위해 아들 버린 어머니, 세속의 대변인 전도사, 마지막으로 그의 유일한 그녀는 숨통을 끊지 못해 바라보는 펄떡이는 심장이다. 신에게로 가는 계단을 불사르기 전에는 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육욕과 소유욕, 애증과 환멸이 도사리는 도시의 유일한 방랑자. 희뿌연 세상을 헤엄치는 내장 터진 한마리 물고기. 불가능을 역설하면 결국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아무도 시도의 목숨줄을 끊지 못한다. 가까스로 부여잡은 숨통을 틀어쥐고 피떡 같은 생의 곳곳을 방황한다. 계절은 하나의 형태로만 저물고 뜬다. 곪아터진 상처에서 썩은내가 진동한다. 드디어 살아있음이다.

 

어두운 지하방, 그의 폐허는 병적이다. 차단된 공기는 잃어버린 추억을 헤집고, 청각과 미각을 지배한다. 그는 가장 외롭고 고독한 방식으로 신을 향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결코 존재이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집, 방, 과거를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가슴에 안고, 참고 참으며 울음의 강을 건너 기어나온 땅. 세상과 신은 그곳에 비로소 존재할 것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 주어진 시간이 모종의 음모같을 때, 이승우의 소설은 놓인다. 살기 위해 죽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기쁨과 환희가 그러하듯 구원조차도 고통을 담보한다는 걸 아는 이에게만 세상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건방으로 점철되어진 상처를 뽐내며 퀴퀴한 지하방으로 숨어들 때 그는 존재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 뿌리를 탐하는, 여자를 창녀 취급한 그의 행동은 이보다 더 쓰릴 수 없는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살래? 아니면 죽을래? 삶과 죽음은 한끗이다.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다. 습득된 모든 존재의 이유,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음을. 아프게 버틴다. 앞뒤, 위아래, 내면과 외면이 금지된 숨바꼭질을 시작하는, 꽃가루가 부유하는 봄밤이다. 감히, 당신의 현실과 신화는 몇 대 몇이냐고 묻는다. 내가 선택한 권리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이 여행은 모험이 뒤따른다. 잘못하다가는 사실의 영역으로 발이 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신화를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극사를 '신화적'으로 가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행선지로 무극사를 '막연하게' 상정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예컨대 그에게 무극사는 '막연한' 어떤 곳인 것이다. 이럴 때, 그가 무극사를 향해 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무극사는 고향과 대극의 자리에 있다.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곧 무극사(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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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3-2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승우 책 읽으시네요. 저도 이 책으로 이승우 시작했는데요. 눈은 계속 읽히는데 점점 답답해져오는 그 무엇. 아이리시스 님 리뷰 보니 새삼 그때의 그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네요. 아고..저, 손톱깍이..ㅜ.ㅜ 답답함에도 계속 눈으로 읽던 그 순간. 오랜간 가슴에 담겨지던 그 여운. 도대체가 알쏭달쏭한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어맛..개정판이 새로 나왔네요? 13년 1월이네요? 와우~ 대박!

아이리시스 님, 이승우 다른 책도 읽어보신 거 있으세요?

아이리시스 2013-03-25 17:00   좋아요 0 | URL
우와, 달사르님!! 와락. 우리 그 시리아 이후 처음 맞죠? 이승우 작가는 아버지뻘인데 데뷔할 때 저는 이 세상에 없었고 어차피 모든 작품을 한참 지나 읽는거여서 연대기는 무시했어요. 일단은 초기작이랑 최근작 읽는 게 목표였는데 이거 외에는 에리직톤의 초상, 지상의 노래, 사랑이 전설이요. 일단 장편부터 보려고요. 한낮의 시선인가 그거 남았죠? 식물들의 사생활도. :)

이 책은 개정판 나왔어요. 따끈따끈하게 받았는데 외양은 변하지 않았네요. 저는 에리직톤의 초상 좋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로마 아니, 바티칸이 나와서 그런걸지도.. 신은 역시 바티칸에서..( '')

달사르님이 읽어보신 건 뭐뭐있어요? 소설집은 뭐가 좋아요?

달사르 2013-03-27 18:52   좋아요 0 | URL
넹. 맞아요. 시리아 이후. 전 그 뒤로도 여전히 지도를 좋아한답니닷. 힛.
이승우 작가가 저는 삼촌 뻘. ㅋ
우와. 벌써 여러 권 읽으셨네요? 계속 읽다보면 겹치는 책도 생기겠어요.

저는 이승우 책을 최대한 많이 질러놨어요. 일단 쟁여놓고 시작할려구요. 근데 다 넘넘 좋아요. 아이리시스님 읽으시는 거 봐가며 같이 읽어도 되겠어요. 아이리시스님은 바티칸 좋아하시는군요! 음..알았어염. 체크! ㅎㅎ (저는 중간중간 읽어서요. 죄다 새로 시작해야 되요. ^^ )

아이리시스 2013-03-27 20:25   좋아요 0 | URL
네~~~ 다 쟁여놓고 인증샷. 읽기 시작할 때 인증샷. 읽고나서 리뷰랑 페이퍼. 이렇게 삼종세트 부탁해요. 바티칸의 신비주의와 종교의 오묘함이 좋아요. 무슨 말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화이팅!

제가 찾아보니까 작가님이 우리 아부지보다 한 살 동생이세요! 아버지 아니었어요, 삼촌이었어!ㅋㅋㅋ

달사르 2013-04-14 19: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이거 읽고 얼마나 웃었든지요. ^^

이런 건 제가 또 잘 따라하지요. 쟁여놓고 인증샷. 읽기 시작할 때 인증샷. 읽고나서 리뷰랑 페이퍼. ㅎㅎㅎㅎ
일단 책부터 다 찾구요. 여지껏 찾았는데 이제 절반 찾은 거 있지요. 도대체 책들이 어디로 숨었는지..ㅠ.ㅠ

아이리시스 2013-04-18 18:14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몇 번 갈아엎고부터는 분명히 있다는 건 알겠는데 찾지는 못하겠어요. 그러면 그 책은 찾다지쳐서, 읽고싶어도 못 읽고 마는데, 그렇게 자꾸 쌓이면 신간은 구간이 되고, 구간은 더 구간이 되어가면서, 도서정가제도 아닌데, 신간을 사서 구간만든 걸 후회하게 되겠죠. 이런 수지안맞는 재테크가 있나요. 으흥!

이승우 삼촌 짱 멋져요!~~~~~~~~~~~~~(댓글의 끝이 이렇습니다)

맥거핀 2013-03-25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한 질문 하나 해도 되요? 무극사가 뭔가요, 절이름? 극락이 없다? 그가 현실을 떠나서 제대로 신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솔직하게 말하면요. 사실 이승우 작가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요. 장편도 그렇고, 단편집도 그렇고..아마도 무슨 수상집 안에 들어있는 건 한 두편은 읽었겠지만요. (수상집은 대체로 보니까요.) 요즘 나름 핫한 작간데,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이상하게 아이리시스님 서재에만 오면 폭풍 질문을..

아이리시스 2013-03-25 19:16   좋아요 0 | URL
여기서는 실제 존재하는 절이름인데 상징적 의미가 있어요. 해석이 각자의 몫이고, 이런 해석이 한국소설에는 많죠. 부모의 역할, 가부장제, 가족의 부재 아니면 사랑에 모든 탓을 하기 때문에. 맥거핀님하고 저하고 이것만 닮았죠. 하나만 물어볼게 해놓고 폭풍질문 하는 거ㅋㅋ 그나마 대답가능한 선에서 물어줘서 고맙습니다(__) 이 책도 그렇고 '지상의 노래'도 무난해요.

참, 홍수현이 나오는 <외등> 봤어요. 좋았어요. 당연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안나왔고 처음부터 눈이 멀어있는 거든가 그런 건 책이랑 달랐어요. 이 댓글에 어째서 감상문을 쓰고 있는 걸까요.

Shining 2013-03-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직톤의 초상, 개정판 내지는 복간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작가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기다리고 있습니다_-* 저는 이 책도 좋고 지상의 노래도 왕 좋지만, 단편이 더 좋아요. 미궁에 들어선 테세우스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는(뭔 말이야ㅋㅋ) 문장이 좋아요. 문장 뒤켠에서 아른거리는 어떤 근원적인 죄책감도요. 좋아요 좋아요. 이승우 작가도 아이님도요(흐뭇).

아이리시스 2013-03-27 20:2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짱이야, 왜 저한테는 직접 말씀안하신 거임?-_+ 예전책들 말예요, 좀 제대로 복간해서 개정판 낼 필요가 있어요. 제가 박범신 작가님한테 꽂힐려고 할 때 읽고싶은 책들은 서점에 팔지 않았어요. 난 그분의 이삼십대 시절 쓴 소설이 궁금했는데. 도서관에는 가볼 생각을 못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어서 흥!

응, 장편 다음에 단편도 읽어볼 거예요. 한 권 읽었는데 제목 뭐더라, 이래서 단편이 문제예요. 읽는동안 휘발되거든요. 저는 소설 쓰기 직전에만 단편을 읽어요. 그러니까 최근 오년간 소설쓴 적이 없음. 쓰면 뭐해요. 지금은 박범신 작가님 옛날소설, 심지어 팔지도 않아@.@ 읽고있으니 그 사이에 Shining님이 소설집 순위 좀 매겨줘봐요. 아, <칼>은 몇 번째로 좋아요? 저는 수상집을 싫어해요. 사고싶지 않지만 사주겠어요ㅋㅋㅋ

작가님 옆에 제가 있어요. 너무 좋아요.

Shining 2013-03-28 11:56   좋아요 0 | URL
책 모양새도 그렇고 폰트며 행간이며..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도서관에 있어도 빌리기 싫을 때가 있다니까요_- 흐흐흐

그럼, 오 년 동안 단편 읽은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순위를 매길 순 없어요....(밀란 쿤데라는 매겨놓고ㅋㅋ) <칼>이 제일 좋아요, <오래된 일기>(그러니까 표제작 오래된 일기)하고요.

그럼요 그럼요. 저는 이승우 작가님과 아이님을 사, 사랑하니까요(어머).

아이리시스 2013-04-13 14:54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사랑고백 받고 나 좀 어디갔다오느라..푸핫 십일동안 뭘 좀 하느라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안쓰려고 했던 거 아닙니다(말투 왜 이럼?). 그 책 새로나오면 사야겠네요. 생각해보니까 그 책 좋았어요. 그런 남자가 연애하자면 피곤하겠지만.. 저는 귀찮은거 딱 질색. 귀찮게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런 사람 금방 알아봐요. 뭐 살면서 그런 사람 없었지만요. 사실 만나기 힘든 남자들 아닌가요? 이해라고 하지만 노력외에 해줄 게 없잖아요. 나는 너를 이해하고있다.. 아..피곤해.. 퇴폐적인 성향의 사람들 앞에 나는 늘 주눅이 들어요. 밀란 쿤데라 매겼지, 참.

나 단편 읽은 적 있어요. 이승우도, 임철우도 또..읽었을 걸요..(무확신..)

transient-guest 2013-04-09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님은 이동진 기자의 문학적 숭배의 대상이라고 해요. 빨간책방에도 나온적이 있구요. 아마도 이동진 기자가 전작을 한 유일한 작가인것으로 압니다. 저도 이 책은 관심이 많이 가요. 요즘 한국책 구매를 자제하고 있어서 보관만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자주 주문하면 책값보다도 배송비용이 확 올라가는게 신경이 좀 쓰입니다.ㅎㅎ

아이리시스 2013-04-13 15: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트란님. 저도 최근 한 달 빼고는 꼬박꼬박 빨간책방 들었는데(나올때마다 꼬박아니고 내킬때마다 꼬박) 이승우작가님 나온 거 들었어요. 도란도란 나눴던 이야기나 분위기는 기억에 없지만.. 다 기억하기에 뇌용량이 너무 벅찹니다..풉. 저로서는, 진심으로, 트란님과 댈러웨이님이 어떻게 책값+배송비까지 신경을 안쓰고 충당하실지 신기할 뿐입니다..저라면 책을 안읽겠습니다.............( '') 이건 아니겠죠..

저는 알라딘에서 전자책 한두권 빼고는 안산지가..어언..1월3일에 주문했네요. 미스터리의 계보, 사고, 체벤구르,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 저 뭐하는 거죠? ㅋㄷㅋㄷㅋㄷ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계속된 궁정생활로 창작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1786년 9월에서 1788년 6월까지 20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여행 중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1829년에 엮은 책이다. 스물 일곱의 청년이 바이마르 고문관으로 10년을 일했으니 문인의 피가 흐르는 그에게 몰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베로나와 비첸차의 고대 건축에 매료되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로마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경유해 다시 로마에 머물며 자유로운 방랑자 생활을 한껏 즐긴다. 철저히 익명의 여행자로 머물며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사상을 가다듬던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와 실러와 손잡고 고전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1774년, <파우스트>가 1831년에 출간된 걸로만 봐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시작된 고전주의의 열망과 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스물 여섯의 청년과 여든 넷의 괴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가 남긴 두 작품은 동일한 명성으로 여전히 감동적으로 읽힌다. 죽음 직전에 <파우스트> 2부를 탈고했으며, 이는 스물 세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생애의 대작이었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이탈리아행이 훗날 그의 창작력과 감수성에 큰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부터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로마의 전경, 아버지의 여행지도 등을 접했던 그에게 어째서 이탈리아였냐고 묻는 것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김은숙 작가가 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여기서 그녀는 전도연이고 그는 김주혁이다. 처음 프라하를 방문하면서 프라하 노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에게, 도착하기 전부터 프라하에서만 구할 수 있는 티셔츠를 입은 그에게, 여기 오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지금 입은 티셔츠 만큼이나 프라하의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냐고. 그는 유학 보낸 애인의 변심에, 제대로 끝내기 위해 프라하로 향한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메일로 받은 사진 속 거리와 풍경과 티셔츠는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다. 비로소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같은 온도로 느닷없어졌다. 편지를 찢고 티셔츠를 버리는 대신, 그는 프라하로 간다. 납득하지 못한 채 끝내는 작별은 그에게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므로, 유일한 주소를 들고, 여자가 보내준 티셔츠를 입고, 처음 보는 거리를 떠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사랑했지만 그들의 이탈리아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내가 아는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로, 프라하 역시 이 가여운 남녀에게 서로 다른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추억을 동봉하고 봉인한다. 그의 대책없는 프라하행이 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안내한다. 그들의 만남이 프라하에서는 우연이었고, 서울에서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사랑을 끝내야 하는 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흔적을 찾기 전에는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느 도시는, 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추억과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흔적 같은 것이다.  

 

 

 

 

 

 

 

 

 

 

2부작의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은 그즈음 운명처럼 보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출간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어도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달빛 프린스]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리어왕을 소개했는데 평소 맥베스와 파우스트를 동시에 읽겠다고만 생각하던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불만 밝혀준 셈이었는데,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사랑과 신화, 운명과 복수, 희극과 비극의 거의 원형적인 모습을 띠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같은 이유로 내가 셰익스피어 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더 좋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가 자국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토록 여러 편 썼는지,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밀라노('템페스트'에는 밀라노 대공이 등장) 등 그 배경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물론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가 르네상스를 관통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그 중심에 있기는 했어도 이탈리아 배경이 한두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사랑이 굉장했고, 괴테 못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토대가 된다.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템페스트 외에는 상당량의 작품들을 읽지 못해서 제대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다큐에 나오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인이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상당수 썼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특별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대항해 시대, 식민통치가 만연한 유럽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든 그건 그 후손들의 문제일 뿐이다. 알려진 바대로라면, 셰익스피어가 영국을 떠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탐나서 제 지역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일까.

 

셰익스피어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현실로 존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도시 베로나. 시에서 운영하는 '줄리엣 클럽'에는 여전히 해마다 오천 통이 넘는 편지가 도착한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손편지들 속에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희비극과 사랑에 관한 고백이나 고민이 담겨있으며, 주최측에서는 매년 처치곤란이면서도 여전히 신화적인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로 인해 낭만성을 획득하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에 가슴 설렌 이들과 사랑에 눈물짓고 아픈 이들을 동시에 위로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말을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이들에게는 그리움을 내려놓을 곳이 생긴다. 줄리엣 클럽은 아마도 사랑에 절망한 청춘에게 거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환하게 피는 반면, 어떤 사랑을 어둡게 저물고 있으며, 저무는 것이 새로 피어날 미래를 위함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추억을 재산처럼 여기게 될 언젠가를 위해 이 도시는 사랑을 보관한다. 한 도시를 영원히 낭만과 비극의 땅으로 만드는 힘. 문학의 힘이자 대문호의 힘이자 도시의 힘. 셰익스피어를 읽고 괴테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고스란히 따르겠다는 다짐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책이 죄다 새빨간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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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오늘도 1등 댓글이요!!!
아이리시스님 정말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그걸 죽을때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지...살짝 고민 좀 하고 있어요.ㅎㅎ
괴테와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싶다는 욕심은 앞서는데....ㅜㅜ 과연 읽을 수 있겠죠?ㅎㅎ
멋진 글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47   좋아요 0 | URL
꿈섬님, 오늘 날씨 귀신나올 것 같아요. 재밌겠죠? 귀신나오면. 으흙으흙. 일단 쓰고 틀린 건 내일 고치자고 내버려두었는데 보니까 많아서(엄청 많아서) 수정을 좀 하고 그러고보니 꿈섬님 댓글 보여요 히힛.

네! 우린 죽을 때까지 읽고 싶은 책만으로 숨이 막히고 말 거예요. 저는 그럴 거란 확신이@.@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아주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 몇 권 사서 죽을 때까지 이해하기 위해 낑낑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그 사람은 독서가일까요, 아닐까요. 셰익스피어 다큐 엄청 좋았는데 그거라도 보시면 좋을 거예요. 해브어굿데이!!

맥거핀 2013-03-1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책이 다 새빨갛네..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지만, 지하철에서 들고 있으면 포스 나오겠어요. 아침 지하철에서 고전 같은 거 들고 있는 처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외모점수*3의 가점을 드립니다(라는 개드립). 좀 다른 얘긴데, 얼마전에 지하철에서 최근에 나왔던 밀란쿤데라 전집 중에 한 권 들고 계신 수녀님을 뵜었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아이리시스 2013-03-16 01:13   좋아요 0 | URL
어느 전집이든 예쁜데 아직 구입은 안했어요. 뭘 쌓아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옷장의 옷과 빽 뿐인데요 큭큭;;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들이 꽤 있나봐요. 저 지하철 탈 일 거의 없긴한데 못봐요, 독서하는 사람. 지하철은 항상 너무 붐비고 저는 대체로 멍때리고 있어서ㅋㅋ 쿤데라 전집 중 한 권을 든 수녀님이라.. 외모*3 해서 몇 점?(...) 수녀님 예뻤습니까.

맥거핀 2013-03-20 14:33   좋아요 0 | URL
근데 저기에 함정이 있는데, 외모점수가 0이면 아무리 *3을 해도 0점이라는...은 두번째 개드립이구요, 그 수녀님은 여러모로 미인이셨습니다. 정말로.

아이리시스 2013-03-21 18:12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하 곱하기 할 게 없어..없으면..으하하하하하하 계속 웃기네 그럼 다음에는 더하기를 해봐요 곱하기 하지 말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3-03-1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전 정말 본 드라마가 없네요. 하지만 저것도 라인업과 스토리는 알아요ㅋ 신기하네요, 저 이번에 템페스트 구입했거든요ㅋ 헨리5세도 읽고 싶은데(예전에 흥미로운 글을 읽은 후 기억만 해두고 여지껏...) 그 책 판본이 너무ㅠㅠ 아는 사람 말이, 셰익스피어는 전자책으로 사서 필요할 때마다 본다고 했는데 저도 그렇게 해야하나.. 끙. 고전을 읽고 샆어요 아이님. 이 페이퍼 읽으니까 더욱! 어흥!

아이리시스 2013-03-20 01:22   좋아요 0 | URL
어흥! 리처드 파커 같아요ㅋㅋㅋ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이라니 BBC에서 만들다니 이러면서 보는 동안만큼은 전집 통째로 읽을 기세에 전투력이 상승했었지만 이틀만에 셰익스피어란 무엇인가..누구인가..더군다나 희곡..몰리에르 이후로는 처음.. 졸업하고 처음인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겨서.. 무방비 상태로 맞은 돌 같아요. 지금 Shining님이 부추겨서 헨리5세가 눈앞에 아른아른거려요. 습관이란 게 무섭게 빨라요. 한국소설 읽고 나니까 번역체를 읽질 못하겠고, 장르문학 읽다보니 페이지 안 넘어가는 순문학 읽던 제가 저 아닌 것 같아요. 나누기 싫어도 자동으로 나뉘는 문학 스펙트럼 체험중..으흙흙.

이제 자요? 자는 거죠? 내일 봐요, 굿나잇, Shining님^^

2013-03-23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3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의 웃음이 그 환한 박하꽃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별이었던 그때.

 

어느 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편의 소설이 있었다. 아주 발랄하고 배부르고 따스하고 행복한 그런 밤이었는데 두 권의 소설을 만난 뒤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밤에 나를 달래기 위한 음악을 들었다. 그 밤을 다스리기 위해 환한 불을 밤새도록 켜두었다. 환하게 밝힌 밤에는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사랑이, 고통이, 세월이, 증오가 뒤섞여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표면적이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이, 소리없는 번개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닿지 않는 마음이, 그렇게 모든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기에, 환상처럼 뭉클하고 애닳게.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거다 싶었던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싶었던 그때. 그러면서 좋았던 그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떤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서라도 네가 사랑하는 그 무엇을 구하고만 싶었던 그때. 바람이 많이 불어도 좋았고, 눈이 많이 내려도 좋았고, 비가 올 때 들리는 음악은 또한 얼마나 환상적이었나. 그리고 네가 거리에서 전경의 몽둥이에 맞아 쓰러질 때 너에게로, 너에게로 내 몸 다 주어서라도 가고 싶었던 그때. 그리고 그때. (<박하>중에서)

 


 

로렐라이

                   

                   - 하이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옛날의 동화 하나가
잊혀지지 않고 이토록
나를 슬프게 하는지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무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흐르고
산봉우리 위에는
저녁 햇살이 빛난다
저 건너 언덕 위에는 놀랍게도
선녀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앉아
금빛 장신구를 번쩍이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린다

소녀는 황금의 빗으로 머리 빗으며
나지막히 노래를 부른다
기이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선율의 노래를

작은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혀
암초는 바라보지 않고
언덕 위만 바라본다

마침내 물결은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렸네
그녀의 노래와 함께 이것은
로렐라이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법 잊혀진 세 소설들의 공통점은 욕망이고, 사랑이다. 오래된 사랑소설을 읽는 일은 남모를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매몰되고마는 은밀하고 내밀한 경험이다. 새 것, 보편, 베스트, 고전에 무던히도 열올렸으니 탐독이 어디로 향해야 할까 생각하다 구멍난 시절의 독서를 메우기로 한 게 이 책이었을까. 언젠가, 사랑이 있었고, 가난도 있었다. 가난한 남자는 더 불우한 환경에 놓인 한 여자를 사랑했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가난밖에는. 내가 더 잘 나가를 몸소 부르는 다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게다가 그 남자가 정말로 잘났을 경우라면 게임은 끝났다. 바보 아닌 이상 지는 쪽을 알 수 있으니 더 갈 필요도 없건만, 끝까지 가본다.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확실히 이십세기의 감수성을 안고 있다. 다른 남자는 비교할 수도 없게 부자 할아버지를 가진, 가진 것들을 모조리 물려받을 유일하거나 유력한 핏줄이다.

 

그 역시 가진 이가 그렇듯 배려 대신 무례함을, 경쟁 대신 쟁취를, 그리움 대신 자신감을, 훈장처럼 입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존심을 굽혀도 괜찮은 대상은 그녀 뿐이다.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하므로 괜찮은 것이다. 현대사의 아픈 부분과 겹쳐져 때로 신파처럼, 실화처럼 그렇게 진행되는 소설은, 마음 먹지 않아도 갈길을 간다. 힘을 지닌 자가 그 힘을 휘두르면 사랑은 잔인하게 휘어지고 부서진다. 사랑은, 대상을 건드리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탐욕과 도피의 끝. 체념과 포기의 시작. 이 길 끝에는 무엇이 더 기다리고 있을까. 여자 대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힌 순간, 가난한 사랑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사랑은 가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확연하게 휘어잡는다. 가난한 자는 가진 자의 사랑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런 구조로 진행되는 <외등>은 <은교> 보다 더한 욕망의 사랑소설이다. 사랑의 비극이 갈 수 있는 최대치를 밟고도 한참쯤 더 멀리있는 소설이다. <은교> 속 욕망들이 방향을 잘못 찾았다고 여긴 적 없다. <외등>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품지 말았음직한 욕망을 욕망함으로서 핏빛 사랑 속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간다. 이제는 까먹어버려서 희미한 두 남자와 여자. 과거와 현실. 희생과 착취. 자유와 억압. 서로가 서로의 반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단어들의 대립만이 내 안에 남았다. 그들에게 희망은 한낱 실줄기이고, 외등이고, 기다림이고, 늦어버린다. 사랑은 어긋나고 삐뚤어져버린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지독히 사랑할 때 발생하는 모든 비극을 담아내지만 그 비극이 눈부셔서 차라리 비극적이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목숨보다 더 아낄 때 한 여자는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둘 다 움직였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감지하지 못한다. 외등이 홀로 켜진 불이 아니라 각자 켜진 불이고, 홀로 켜진 불은 차라리 켜지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이 외롭고 고독하고 아팠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외등 하나 밝힌 채 기다리다 떠났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슬퍼도 슬프다고 외치지 못하는 그녀를 비추는 평생 단 하나의 불빛이던 그. 그 불빛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한 남자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한 한 여자를 평생토록 기다렸다. 목숨은 끊어졌고, 여자가 돌아왔지만, 사랑은 저 멀리 있었다. 사랑 사이로 아버지라는 애증어린 존재의 기억이 끼어든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세월을 숨겨놓는다. 누구든 읽지 않았다면 그건 직접 읽음으로서 확인하면 좋겠다. 아버지와 여자. 누구였던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선택했다고한들 잘한 선택일 수 있었을까. 오래 전 서른쯤 되면 세상 누구보다 매력적인 남자와 세상 누구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할 줄 알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목숨 따위 걸 사랑은 없었고, 세월이 흘렀고, 나는 감수성 돋는 소녀가 아니다.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늦어도 지금쯤은 진행중이었어야 한다. 두 사람의 그 무엇 이상을 원하고 또 방해하는 운명조차 피해갈 마음 말이다. 마음을 버리면 살지만, 품을 경우 파멸의 지름길로 걷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은 모른다. 서로에게로 휘감기듯 천착하던 순간들. 눈을 감아도 잊혀지지 않고 눈을 떠도 떠오르지 않는 세월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과 아프게 기억될 서글픈 사랑의 분열을.

 

<박하>는 오래 전 잃어버린 그 사랑을 찾으러가는 여정이다. 굉장히 호기롭게 시작한다고 여겼던 소설은 아내와 아들 둘을 잃은 남자가 잊혀진 사랑의 흔적을 찾아떠나는 고고학적 여정에서 그만 감수성을 잃어버리는데 그래서 차라리 신파에 가까운 <외등>의 감수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길 위의 질문은 끝내 그곳에 닿지 못했고, 떠남은 결코 치유의 과정이 아니었다.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라는 글에 의지해 여행을 떠난 남자는 기록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새 기록을 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했어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대도시 하남을 찾아가는 칸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랑으로 세상에 발자국을 찍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박하사탕을 빨았는지 알싸하면서 달달해질 때까지의 그 순간이 좋아 자꾸만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기도 했다. 유영과 유예는 분명히 다른 단어지만 이 순간 같은 뜻으로 겹쳐진다.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파괴된 폐허도시, 사라진 언어, 잃어버린 사람, 잊혀진 기억에 대한 환기는 아련하고 또 아득해서 닿지 못할 곳에 떠있는 것만 같았고, 나는 닿지 못해 자꾸만 까치발을 했다. 닿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쓰다듬고 싶었다. 내 곁에 불러앉히고만 싶어 애가 탔다.

 

<사랑의 전설>은 답답한 첫사랑이라는 점에서 [건축학개론]과 닮아있다. 첫사랑이라고 무조건 감수성 돋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로 배웠다. 마침 다시 보게 된 손예진,조승우,조인성의 [클래식]은 액자 속이나 바깥이나 거의 완벽할 정도의 감수성을 체험하게 하는데 [건축학개론]은 아니었던 것처럼. 감수성은 부족하지만 다이렉트로 닿지 못했던 감정이 공중을 배회한다. 정확한 문장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거짓없는 흔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제 색을 거의 퇴색할 지경의 지점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이런 사랑은 폭발지점이 없고, 절정이 없으므로 욕망이 타오르지 않는다. 감동이 덜하다.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들의 감정은 소멸되고 증발했다. 촌스럽고, 답답할 만치 느리게 닿는다. 결말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사랑의 전설이 될 만한 연애소설은 아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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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0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안녕^^
ㅎㅎ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도달불능의 사랑이라, 제목부터 멋져요.
인생은 소설 속 주제처럼 욕망, 사랑 그것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물론 완전한 사랑이란 없겠지만요.^^

아이리시스 2013-03-06 21:11   좋아요 0 | URL
꿈섬님 진짜 오랜만에 1등 댓글 고마워요. 사랑하면서 잘 지내고 계시죠? 애기들도 잘 있고?^^ 예전에는 몰랐는데요, 커갈수록 사랑을 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그리고 조건 따지며 이득산출하는 게 사랑이 아니랄 수도 없지만 꼭 순수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누구나 순수한 사랑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오랜만에 사랑론 쓰려니까 너무 어려워요@.@ 자주 오셔서 1등 댓글 부탁해요ㅎㅎㅎ

맥거핀 2013-03-0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새벽에 지나간 사랑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쓰시면 어쩝니까. 그런 건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열심히 잊으려고 애쓰면서, 아니 사실은 열심히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찌질하게 전화를 손에 들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없는 번호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번호를 눌러 그 소리를 다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찌질한 코스를 밟아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쯤은 있는 거잖아요..(하지만 이제 삼천원으로는 소주 한 병 마시기도 버거운 돈이 되었군요,라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

저는 박범신의 <외등>을 드라마로 봤습니다. 홍수현이 쩔었는데...

맥거핀 2013-03-03 01:18   좋아요 0 | URL
그리고 노래방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찌질 2콤보를 달성해야..



아이리시스 2013-03-06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런 생각하면서 쓰지 않았지만 이 사랑은 분명 도달불능의 사랑이에요. 사랑이라고 부르짖다가 끝난 것 같아서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쓴 반면 창피해가지고 이제 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홍수현이 어떨지 알 것 같은데, 그거 어디서 볼 수 있지, 아! 홈페이지 다시보기! 근데 그거 아이디랑 비번 까먹어가지고 어쩔;; 정말 찾기 귀찮은데 오백만년정도 그래서 못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제가 가장 자주 가던 게 방송 3사 홈페이지였는데 말이죠! 방송인 꿈꿀 때 얘기(풉).

찌질은 쓰리콤보 달성해봅시다.. 이 노래 음.. 좋네요..노래방에서 혼자 부른 적 있기없기? 요즘은 시간이 흐른 후 걸어보면 대체로 더이상 없는 번호겠죠? 번호이동도 쉽고 마음이동도 쉽고 너무 쉽고.. 아..댓글에서 자꾸 뭐가 흘러나오려고해서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겠어요. 홍수현..나도.. 저 여자 혜주 말이죠, 누가 해도 완전 아름답게 빛날 거예요. 나름 수동적이기만 한 여인이 아닌 건 맘에 들어요. 박범신 작가님은 젊을 때도 완전 사랑 이야기를 잘 썼고, 나이 드셔서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두 권 읽고 이런다..( '')

프레이야 2013-03-0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아이님, 오랜만이에요.^^
일단 '외등'을 담았어요. 중고도서가 있네요. 박범신의 '은교' 이전이 궁금해서요.ㅎㅎ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에요.ㅠ

아이리시스 2013-03-06 21:18   좋아요 0 | URL
아..책이 있으면 드릴텐데요, 제가 읽을 때도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었어요. 전자책 읽었거든요. 프레이야님, 오랜만이에요. 봄에 가장 걸맞는 감수성을 가진 분이실 것 같아요. <외등> 좋아요. 제일,은 아니고 모처럼 좋아하는 소설에 등극했어요. 현대사 얘기도 되게 좋아요. 남자의 아버지와 여자의 어머니의 삶도 슬퍼요. 문득 쓸쓸해지는 날에 또 읽을래요.

프레이야 2013-03-07 11:27   좋아요 0 | URL
외등, 중고샵에서 구입했어요. 어제 왔네요.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더라구요.ㅎㅎ 좋아요.
녹음할 책으로 찜했어요.
아이님, 화사한 봄날 누리세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네요. 댓글조차 벅차게 느껴지는 봄이에요ㅠ.ㅠ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라니ㅠ.ㅠ ㅠ.ㅠ
화사한 봄날은 저를 울게 해요. 다 떨어진 누런 종이도..
하지만 재밌기만 하면 돼요. 가끔은 누런 책들을 다 갖다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은 책이고 세월은 세월이고, 프레이야님 (책구입) 추진력은 엄청나네요^^

자목련 2013-03-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등>은 책으로 읽고 드라마로도 봤는데 전체 줄거리가 생각이 않아요. 다시 읽어야 할까요? ㅎ
허수경의 <박하>는 어떤가요?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니.. 시인이 쓴 소설은 궁금하면서도 선뜻 손이 닿지 않아요. 그나저나, 봄 잘 지내시나요? 늦어도 너무 늦은 안부로군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9   좋아요 0 | URL
화사한 봄날에 조금 적절치 않지만 다시 읽어도 좋겠지만, 봄날을 너무 슬프게 만들 이야기예요. <박하>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는데, 제 기대치가 기대치만큼 딱 그만큼 더 높은 곳에 있어서 그랬기도 하고, 주인공이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남자예요. 잃은 게 딸일지도 모름.. 제 기억력이 딱 그 정도랍니다..자목련님..으흙. 그 남자가 어느 기록을 따라 그 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인데요. 약간은 겉도는 느낌이에요. 시인은 시를 써야 하고,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해요. 음..저는..봄을 만끽하는 중이에요^^
 
브라운 신부 전집 - 전5권
G. K. 체스터튼 지음 / 북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삼자대면은 멋진 일이다. 도중에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는 사람이나 죄를 짓고도 교묘히 빠져나가 비열한 미소를 흘리는 사람만 없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데 이토록 좋은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검사는 정의실현(죄를 지은 자가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변호사는 억울한 자를 대변하는 동시에 (피해자든 가해자든) 인권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기는 대리자이며, 판사는 이 모든 과정을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감시하고 법전에 적힌 법조항을 사건에 가장 올바르고 정확하게 적용해 사회의 형평을 맞춘다. 그런데 법이 언제나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법을 다루는 이들이 형평을 지키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거기다 법은 벌을 받고나서도 거의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인간으로 인해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법이라는 최소한의 테두리는 진실을 추적할 때만 이용되면 좋겠다는 법조인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상적인 법조인의 경우, 특히 판사는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자리를 부담스러워했고, 대부분 어렵게 버렸다. 그래, 같은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할 권리는 없다. 그것이 필요하게 된 계기는 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서로 속고 속이는 데서 시작된 이상, 법은 여전히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할 때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동아줄을 잡은 이들의 마지막 희망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면서 누구든 구원할 수 있다는 듯이.

 

2013년은 브라운 신부 팬들에게는 최고의 해이다. 최근 BBC에서 마크 윌리엄스가 브라운 역을 맡아 시리즈가 진행중이다. 구할 수 있는 한 영국 드라마는 거의 보려고 하기 때문에 반가운 일이다. 가톨릭계의 유명한 탐정 브라운 신부는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해번쩍 서해번쩍 나타나 온갖 사건의 해결사 노릇을 한다. 사건은 유산 다툼일 때도 있고 살인사건일 경우도 있으며 신분위장인 때도 있다. 자극적인 묘사는 없다. 다만 사실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이며, 대부분이 일이 일어날 즈음의 상황묘사와 캐릭터에 주목한다. 브라운 신부는 추리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추리가 아니라 관찰이다. 냉철하고 온정어린 눈으로 상황을 들여다보고 진단하는데 그 사실이 생각지도 못한 데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마치 진찰은 의사가 하지만 약은 약국에서 판다는 듯 뒷일은 독자에게 맡겨버리는 식의 지적 게임같다. 우리가 탐정소설에서 찾는 것이 정의실현 보다는 사건 발생과 해결 사이의 역경과 짜릿함이라면 적어도 판사 보다는 형사가 더 낫고, 형사 보다는 추리소설의 독자가 되는 게 더 낫다. 피비린내 나는 응징이 아니라 진실을 고스란히 재현해내는 데 주목하는 점에서 범죄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범죄자는 모두 악인들이라 정의하는 기존의 선악구도를 뛰어넘는다. 이쯤에서 브라운 신부 시리즈 다섯 권이 출간된 시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종교에서 더이상 신성함을 찾아볼 수 없는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 초반 가톨릭의 영향력이 빛나던 시기- 각각 1911년, 1914년, 1926년, 1927년, 1935년- 에 나온 작품이라는 점 말이다. 또 하나의 근대 탐정 브라운 신부는 영국의 위대한 탐정 셜록 홈즈의 뒤를 잇는다. 브라운 신부의 명성을 이어간 탐정은 포와르이며, 이를 만든 추리작가는 크리스티 여사다. 영국은 이렇게 세 명의 근대 탐정으로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어떻게 신부가 탐정이 될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어리석다. 브라운 신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짐작해보면, 응징보다는 자비에 관심을 두는 종교인이기에, 감싸안아야 하는 인간의 불우한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은 왜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나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상황을 들여다보는 관찰력으로 인해 브라운 신부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뒤이은 인기탐정이 될 수 있었다.

 

체스터튼은 미술학도로서 미술평론가로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한 사실적 묘사가 가능했던 것도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브라운 신부의 모델이라고 밝힌 존 오코너 신부는 캐릭터 설정과 브라운 신부가 세상을 보는 사상이나 추리로서의 사건전개 면에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손꼽히며 명성을 얻었다. 신부라는 신분과 당시 종교인이 가졌던 느리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브라운 신부가 섬세한 관찰로 사건의 정중앙부를 날카롭게 파헤쳐 재현하는 역설과 반전의 논리가 쉽게 연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잔잔하게 흐르는 사건에 들어있지 않거나 제3자로 무심히 서있다가 비로소 등장하여 짠하고 해결하는 스타일에 개연성이 없다거나 무난하다거나 하는 비평을 내놓을 수도 있다. 아서 코난 도일과 크리스티 여사가 그런 것처럼 체스터튼 또한 인간의 숨겨진 상처를 읽어내고 거기서 질투, 분노, 우울, 슬픔 등을 찾아냈다. <브라운 신부 전집>은 100년 전에 씌었고, 10년 전에 번역되었다. 결백/지혜/의심/비밀/스캔들 이라는 각 제목 안에 낱개의 제목을 단 수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앞서 출현한 아서 코난 도일의 홈즈와 크리스티 여사의 포와르가 그렇듯 끔찍하고 선정적인 범죄장면 묘사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깊이 묘사하는 데 훨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범죄소설에 길들여진 나는 처음에는 늘 지루함을 느낀다. 거기다 세월차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서서히 물들어간다는 점에서 닮았다. 브라운 신부의 말 속에서는 인간이 가진 특유의 감각들을 음미할 수 있다.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며 준비한 트릭 속에서 억울한 자가 죽은 에피소드를 두고 인간 내면에 숨겨진 사악한 재치를 맛보기도 하고, 일부러 어질러놓은 집안 가구의 배치 속에서 고의와 선의를 간파해내는 탐정을 두고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에서는 가장 천하고 악한 남편이 바깥에서는 제일 좋은 남자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인간에게는 한 모습만 존재하는 게 아니므로. 심지어 감정이란 더 많은 형태로 분리될 수도 있는 가장 신비롭고도 다채로운 보배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모를 죽인 자식은 나쁘다. 동시에 부모를 버린 자식도 나쁘다. 수없이 쏟아지는 기사 속에서 죽이거나 버린 이유를 알고나면 이 끔찍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낸 야유의 목소리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이다. 늘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이제 시대에 걸맞지 못하다는 평판에 부딪치지만, 아들이 친구를 때렸다면, 무조건 때리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왜 때렸는지 묻고, 왜 때리면 안되는지 가르쳐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브라운 신부는 부모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범인의 사정 또한 주의깊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체스터튼의 문학은 인간적이다. '어떻게' 보다는 '왜'에 초점을 맞춘다. 어제는 선한 사람이 내일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황의 즉시성 혹은 현실과 내면의 불일치 때문이지, 특정인에게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거나 태어날 때부터 그랬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와 인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 변수를 잘 다독이는 것만이 범죄의 질을 낮추고 양을 줄이는 방법이다.

 

실제로 브라운 신부가 밝혀낸 트릭은 앞서 우리가 놓쳤던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이야기를 사연으로 끌어내는 것에 불과해서 오늘 날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무릇 범죄란 발생하기 전에 막으면 좋을 일이지, 범죄에서 명언을 얻거나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현재에 비추어 보면 무리가 있는 발상이다. 신분제도에 기인한 범죄나 총보다 칼이 사용되는 범죄, 의외로 욕심 많은 사람들이 귀족의 지위에 있다는 것 등 적어도 어떤 범죄라는 것이 단 한 가지 이유로 촉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 범죄의 다양한 모습과 거기에는 인과응보식의 대응도 필요하지만,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경우도 있다는 사실에 너그러워진다. 무엇보다 법적 처벌만으로 이 세상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법과 판사의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다. 누구를 속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사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본다면, 그래서 죽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면 어떨까. 우리의 욕심과 눈먼 질투, 약간 꺾인 자존심, 갑자기 툭 튀어나와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 많고 많은 사소함 중에 단 하나로도 인간의 삶 아니 유리 같은 마음은 악에 저당잡힐 수 있다. 악은 몰라도 범죄는 순간적이다. 악은 전염성이 강해도 범죄는 개인의 것이다. 적어도 범죄자 중에 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는 극소수 중에 극소수이지 않을까. 범죄는 선과 악으로 구성되는 양날의 칼 속에서도 의외로 복잡한 구조와 형태를 갖는다는 것, 그래서 범죄로 인해 끊임없이 인간 본성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근본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지치지 않게도 문학으로 재탄생되는 갈등과 대립의 구조가 늘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홈즈와 브라운 신부와 포와르가 읽히는 것도, 선과 악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와 권선징악을 향한 정의,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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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2-1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는 사실 여기에서 처음 보는데, 신부가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이라니 꽤 재밌겠어요. 신부는 아무래도 종교인이니까, 종교인의 시선에서 범죄와 범죄자를 보는 것은 또 다르겠죠. 아무튼 인간의 모든 범죄는 아주 다양한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지니까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거고, 범죄소설, 추리소설도 계속 새로운 얘기를 쏟아내겠죠. 근데 TV에서 하는 범죄 얘기를 봐도, 사실 상당수의 범죄는 거대한 악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별 것 아닌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

아이리시스 2013-02-15 22:05   좋아요 0 | URL
설상가상 제가 하지 말라는 것도 곧잘 해서 일을 잘 치는 편이긴 하지만 어제 파더 브라운 다운받다가 맥북이 맛이 갔어요. 외장하드를 인식못하는 상태로. 그런데 초성능 좋은 데스크탑 본체를 얼마 전에 들였거든요. 동생이 엄마 하시라고 사드렸는데, 덕분에 매일밤 대박맞고에 푹 빠져있어요. 이상하게 홈즈는 좋은데 크리스티는 푹 빠지게 되지 않았는데 브라운 신부는 첫장부터 재밌게 읽었어요. 단편이라 연결의 부담도 없어서, 그런데 책이 절판이란 건 몰랐어요. 이거 쓰고나서 알았어요. 대체로 미스터리 범죄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악이라는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추리소설 많이 읽어서 내일까지만 읽고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갑니다. 히히히.

stella.K 2013-02-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드라마로 방영해요? 봤어요?
근데 이책 절판이네요.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 아직도 못 읽다가
결국 절판되는 모습을 보게되는군요.
새로 안 나올까요? 헌책방 발품 팔아야 하려나요?ㅠㅠ

2013-02-19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9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3-02-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 넘 재미있지요.브리운 신부는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었는데 국내에선 홈즈에 비해 영 인지도가 낮더군요ㅜ.ㅜ

아이리시스 2013-02-19 01:19   좋아요 0 | URL
홈즈가 1인자여서 영화나 시리즈로의 전환이 많고 빨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카스피님. 넘 재밌어요. 디테일한 묘사로 시작하는 초반부에는 늘 또 어떤 사건으로 뒤통수를 칠까 두근두근. 그런데 왜 한 번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여러 모로 인지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ㅜ.ㅜ

transient-guest 2013-02-2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다 읽었는데, 리뷰는 이렇게 쓰지는 못했어요..ㅎㅎ 브라운 신부의 추리는 확실히 통찰력 같은걸로 사건의 본질이나 사람의 중심을 뚫어보는데 있지, 홈즈나 포와르식의 사실과 논리에 입각한 방식하고는 틀리죠. 작품자체도 서술형이고, 뭐랄까, 편안하게 스토리를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는 조만간 구해봐야겠네요.

아이리시스 2013-02-28 16:53   좋아요 0 | URL
포와르는 제가 어릴 때 읽다말아서, 다시 시작한다고 지난 여름에 읽다가 놔뒀는데(뒷심부족), 사조영웅전,의천도룡기,신조협려도 죄다 그 상태--; 트란님 따라서 저도 삼매경 해야겠어요. 웬만큼 재밌지 않고는 반전과 추리와 마무리를 한 번에 하는 브라운 신부의 구성은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갑자기 왜 이게 나와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없어서 홈즈나 포와르식과는 확실히 달라요. 홈즈를 좋아했는데 브라운 신부도 좋아요. 누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2013-02-23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3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8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세상, 세상 대 세상, 국가 대 국가, 이 싸움들 중에서도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게 '나 vs 나'인 것 같다. 잘난 작가들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문학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교훈이 된다. 전쟁문학을 추렸다. 추렸는데 읽히지가 않아서 여기가 끝이구나 했는데 무심하게 할퀴고 지나가는 어떤 감정들이 느닷없이 상처투성이 전쟁문학 속 주인공들을 돌아보게 한다. 누굴 위하여 종을 울리는 지도 모른 채 무조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전장에서도 가해와 피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리기 어렵다. 전쟁 뿐인가, 노조나 복수극에서도 매번 마주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들. 신에게 맡겨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 옳고 그름의 잔인한 판단. 오히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용되기도 한다. 왜 싸워야만 하는가. 세계는 '왜'라는 물음에 마침표 대신 필연성을 부여한지 오래다.

 

태초부터 엄청난 규모와 빈도의 전투가 있었다. 적어도 전쟁을 과거에 벌어진 한낱 다툼으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20세기의 화두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비롯,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이름의 전쟁이 이후 문학작품들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에 서야 하도록 만들었는지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전쟁문학은 살아남았다. 전우애, 사랑, 그리움으로부터 오는 감정소모는 끊임없이 회자되며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아 잔인함과 감동을 거듭 교차시키며 세상으로 밀려나온다. 무력이라면 차라리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명분이 버젓이 상대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사, 선과 악 혹은 광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희생양 매커니즘과 광기를 예술가의 것으로 치환해 이해하곤 했던 나는 히틀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니까 아렌트가 나치즘을 향해 쏟아낸 울분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이 비무슬림을 향해 갖고 있는 적대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관련 문제들은 언젠가부터 관심주제에 등극했고, 뿌리없는 가지처럼 단편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터지는 폭탄에 사지가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거나 우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전쟁과 재난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의도의 유무라고 보기에 잘잘못을 따지기에 너무 많은 연결고리들이 줄기차게 엮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잘 모를 때는 겁을 낼 이유가 없다. 두려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알게 되기 시작할 때다. 삶이 두렵지 않은 이는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얘기다. 전쟁문학에 대한 깊이 없는 고찰.


 
















전쟁통에 폐허가 된 이탈리아 마을의 한 야전병원에 홀로 남은 간호사와 남자환자를 오랫동안 상상했었다. 왜 버리고 가질 못하는가. 살아야 의미가 있지 않나. 내 물음은 허공을 맴돌았고, 답을 찾을 수도 없고, 찾아지지도 않았다. 잿더미 위의 불씨같은 희망처럼 서걱거리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질식해 호흡을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이 아연한 문장들을 대하자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욱 비현실처럼 여겨졌다. 디테일한 묘사는 때로 독처럼 쓰고 두려웠다. 암흑 속 절망과 붉은 노을 위의 하얀 집 같은 것들이 생생히 대비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존재를 감췄지만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 내 눈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그렇게 불렀다. 없는 듯 존재하면서 존재감이 적지도 크지도 않은 사람. 온 절망이 대부분의 희망을 꺼뜨리는 곳에서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반드시 내 곁에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 하지만 언제 안녕해도 좋을 사람. 영화 속에서 한나가 읽어주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바흐의 아리아와 함께 시린 기억을 찾아가는 실마리로 기능한다. 저 책은 필독서지만 두께가 만만찮아 엄두도 못내는데 인용된 부분마다 좋다.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쓴 후 폭발적 반응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지만 나치스 지배 하의 독일에서 작품의 반전적 내용(시각) 때문에 193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가, 9년 간의 미국망명 후 다시 스위스에 거처한다. 첫 작품 이외에는 대부분 망명생활 동안 집필했기에, 망명작가로 불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그늘진 낙원>, <리스본의 밤>은 망명소설 4부작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독일군이 소련의 대평원에서 잠복중인 현재진행형으로 시작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새파란 참전병사의 눈으로 본 세상과 체험을 서술해나간다. 죽고 죽이는, 시시각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진군 중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독일은 패전의 내음을 진지하게 맡기 시작한다. 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접경선으로 후퇴하면서까지 상대 영토 쑥대밭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이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땅이 얼고 녹는 동안 흙구덩이를 파헤쳐 부지런히도 묻었다. 오랫동안 전쟁의 끝을 바라온 병사들의 소원은 원인 모를 병이라도 걸려 제대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2년을 전장에서 보낸 노련한 병사 그레버는 3주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간다. 어렵사리 달려온 고향마을은 이미 몇 차례의 공습과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 폐허더미에서 주소를 더듬어 집을 찾아헤매는 한편, 부모님의 생사를 수소문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속출하는 지옥같은 잿더미 속에서 그들의 생사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방방곡곡 묻고 찾다가 어릴 적 친구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옥불마냥 활활 타오르는 대지에서 울부짖으며 타죽어가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전쟁통에 사랑과 결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귀한 것이 누군가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나가며 위로받고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다. 전장에서의 결혼은 절차가 간단하다는 말에 휴가 막바지는 온통 그녀와의 혼인신고와 미래에 대한 꿈, 유예된 행복 앞에 바쳐진다. 마침내 복귀일이 다가온다. 그레버는 여전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제 나라도 불바다가 되긴 마찬가지인 전쟁 앞에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소음과 절망과 파괴, 혹은 그 모든 것이 계속될 때, 그들의 작별은 결코 유예되지 않을 것이다. 


레마르크의 문장은 리얼리즘 혹은 사실주의에 가까운 묘사로 구성된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노래는 없지만 단 한 번의 사랑과 임시로 지어올린 집 안에서 지속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소망이 모인 것만으로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잔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젠가 이 상황도 끝날 거라는 기대감이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도살장 같은 화염과 통증과 증오가 곧 증발할 거란 잔혹한 기다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이전에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의 배경 또한 스페인 내전이다. 간단한 리뷰를 쓰면서 차마 역사적 배경까지 서술할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압박받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줘서는 안되는 강압과 같은 간섭을 스페인 내전상황 치하와 파시즘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다. 난 단지 전쟁통에 비수용적이고 광기어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남녀로 쓰는데 그쳤지만 배경이 좀 더 복잡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멜로드라마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차라리 르포에 가깝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비하면 자진참전한 경험을 살려 그 현장을 생생히 복기한 체험수기 한 편을 가장한 소설이지만, 전달하려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적으로 비틀지 않은 구성이 오히려 고맙다.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싶었던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오웰의 모든 문학은 차라리 현실 비틀기로 읽힌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을 오웰의 작품에서 찾는다면 없는 게 없을 정도. <동물농장>이 그랬고 <1984>가 그랬듯. 오웰과 헤밍웨이의 건조함과 차가움은 닮고 싶은 점이다. 그들의 작품은 치렁한 장식도, 미사여구도, 뻔한 수식어도 뺀 상태에서 문학이 된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이상한 전쟁. 영국 식민지 인도 출신의 외국인. 아무런 준비도 훈련도 없이 대강 교육시킨 이방인조차 투입시키는 어떤 싸움. 오웰은 어떠한 상상과 극적 전개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시간 순서에 따른 생생한 체험만을 기록했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대한 환멸의 기록이라 칭한다. 이 소설에는 현대 정치가 다투는 모든 이념 전쟁이 모두 들어있다. 전쟁을 배우기에 오웰의 작품들은 더없이 알맞다. 매순간 적절한 깊이와 놀라움을 안겨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파견된 장교, 간호사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소재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공통된 전쟁문학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장교와 간호사가 전장에 있는 건 당연하다보니 예상 스토리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초점은 자연스레 내용보다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문체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레마르크는 병사들의 무의미한 대화와 기다림, 그레버와 엘리자베스가 꿈꾸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렸다. 얼마나 더 깊고 간절히 혹은 생생하게 그려낼 것인가. 묘사나 문체, 기호에 판단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정적이라든가 관조적이라든가 하면 전장의 서걱거림을 담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승화라면 모를까, 전쟁에 대해 미화하는 것도 그 반대도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의 장편들은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다는 점에서 소재에 걸맞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헤밍웨이를 읽으면 배가 고프다. 실제 여자관계가 그랬듯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마초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칵테일조차 소다수와 설탕을 적게 넣는 대신 럼을 많이 넣어 독하고 차갑게 즐기는 게 취향이라니. 이쯤되면 내면에서 타협이 너울댄다. 그의 작품에서 남자에 비해 여자가 단조롭게 그려지는 것도 그의 성향과 관계가 있을까. 오웰과 헤밍웨이, 물론 레마르크도, 시대의 전장에 선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전쟁은 한낱 감정문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겪은 고통과 이미지로 환기되어 온 고통은 다른 것이다.

 


 

 



 


 





 

 

 

전쟁과 사랑. 또 하나의 빠질 수 없는 작가는 시배스천 폭스다. 2003년 BBC에서 조사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20위 안에 <새의 노래>가 들면서 위력을 증명했다. 영국 작가지만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 전쟁의 상흔, 고독 같은 것들을 주제로 경건한 서사시를 펼쳐낸다. BBC 동명드라마가 있다.


1차 대전 중의 프랑스가 배경으로, 전쟁중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스티븐이 상처극복을 위해 전장으로 들어간다. 전쟁이 사랑보다 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폭스는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자들이 잊혀져가는 것이 두려워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53년생인 그가 1993년에 발표해 일약 스타작가 덤에 올린 작품으로, 전쟁 전과 전쟁 중, 이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던 스티븐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자, 전쟁에 참여한 그는 참혹하고 잔인하게 그 시간을 겪어낸다. 포탄이 날아다니고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사람의 시체 냄새마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그 와중에도 이 상황을 타계하여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스티븐의 의지가 눈물겹다. 몸과 마음, 영혼마저 잃을 만큼 처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또 견디는 참전 병사들의 생생한 고통과 고뇌를 만지듯 느낄 수 있는 사실적 문체라는 점에서 헤밍웨이와 결을 같이한다.

 

 

 

 

 

 

 

 

 

 

 

 

 

 

 

 

문학은 문학이라서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사실적이지 않고, 사건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꼬마나 제3자 혹은 해설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이질적인 문체와 낯선 개연성, 다 맘에 든다. 초반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것이고, 기대 가득한 읽기 속에서 끝을 보기가 아쉬웠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떠올랐지만 서정적인 내용과 소년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이 소설 속에서 건진 <나의 투쟁>을 찔끔찔끔 보기 시작한지도 몇 달이다.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히틀러의 세계사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설마 히틀러가 글을 얼마나 잘쓰는지 보자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그즈음 손대는 문학마다 히틀러가 등장했다. 지나면 또 기억을 못해서 동생한테 읽어놓고 왜 모르냐는 얘기를 듣고, 1년에 한 권 읽는 너랑 1년에 100권 읽는 내가 어떻게 같겠냐고 했더니 말이 안된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서 왜 읽어도 기억을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권 내키는 대로 돌려읽기의 제대로된 폐해일 수도, 기억력이 원래 나쁠 수도 있다. 아니면 버려야 또 들일 수 있는 뇌구조로 자동설계 됐을지도.

 

실제로 제3국의 종족학살 같은 건 문학으로는커녕 언론기사로도 발화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소설이 뉴스가 무슨 힘을 갖는가. 내 땅의 전쟁 보다 남의 땅의 전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진과 동영상, 언론에서 전해주는 뉴스화면과 기사로 엿본다고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절반이라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옆집 싸움과 울음소리 신고에도 설마하다 결국 안하게 되는 게 실상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문학이 현실 같을 수 없고, 모든 문학이 현실이어야 할 리도 없지만, 전쟁이란 것을 겪었기에 위의 문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이보다 더 나약할 수 없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대단한 힘을 갖는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의 의미와 상태를 생생히 전달한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유럽의 좌파가 형성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군부와 우익 진영이 일으킨 내란, 뭘 어떻게 정의해야 간단해지는지 도통 모를 것 같은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여전히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구분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한낱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현상을 두고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린다. 한마디 더 보태서 상처 주느니 그냥 내가 상처 입고 말겠다. 언젠가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떠났고, 나는 친구를 이미 보내고 난 후였다. 한 번도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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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님. <잉글리쉬 페이션트> 너무 좋아해요. 레마르트의 <개선문>도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읽어보지 못했어요.<새의 노래>에 관심이 가네요. 전쟁문학으로 이렇게 정리해서 한 편의 잘 정리된 페이퍼로 보니 더 알차게 다가옵니다.

아이리시스 2013-02-02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요. <개선문>도 읽어보고 싶어요. 어딘가 비슷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많아서 레마르크를 바로 또 읽을 엄두가 나질 않아요.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부전전 이상없다가 출판된 것은 아직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어요.하지만 이미 우익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었죠.그가 망명한 이듬해인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합니다.

요즘 아이리시스 님이 제 블로그에 방문이 뜸해서 서운해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6:31   좋아요 0 | URL
풉 저도 노자님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어요=33333333333

왜 뜬금없이 바이마르 공화국 얘기를 하시지, 노이에자이트님은 항상 뼈가 되는 말씀만 해주셨는데 저 얘기가 중요한가..왜 바이마르 공화국 나왔지, 라고 곰곰 생각하다가요, 저는 똑똑하니까요(!) 발견했지 뭡니까. 오류를(!!) 그러니까 베껴도 좀 알고나서 베껴야 하는 건데, 푸핫 하하하 하하하(민망)

그래서 손 안대고 코를 풀었지 뭡니까! 문장 순서를 한 번 바꿔봤어요. (감쪽같죠?)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말이 안되는 짓을 제가 본문에 떡하니 적어놨지 뭡니까. >.< --;;;;;; (__) 이건 인사예요. 고맙다는.

아니, 노자님은 제 방문이 뜸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고.. 움화화홧. 갑니다, 댓글을 못 쓸 뿐.

댈러웨이 2013-02-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문학 몰아서 보고 있다더니 드디어 올라왔네요. 그게 언제였더라. 우힛. 별 걸 다 기억하는 댈러웨이! 아직 이 페이퍼는 안 읽었어요. 미리 잘 읽겠다고 갑자기 댓글을 다는 이유는...서운하다고 말씀하시는 노이에자이트님이 귀엽게...여...여...겨져서... =333 =33333 =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3-02-02 16:37   좋아요 0 | URL
맞아, 전에 제가 얘기 했었죠. 소문냈어 막. 페이퍼가 좀 오래 묵었어요. 전쟁 페이퍼가 세 개나 있었는데 그건 차차--;; 이상한 거 있죠.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니까 그 글을 왜 시작했는지 내가 쓰고자 했던 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아요. @.@@@@@@@@

아, 그리고 댈러웨이님, 댈러웨이님이 절 위해서 번역에 도전하실 책을 하나 발견했어요(무슨 소리지;;).

2013-02-02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3-02-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요? (폰인데 연결 댓글 기능이 없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8:40   좋아요 0 | URL
행진의 끝Parade’s End, 포드 매독스 포드.

transient-guest 2013-02-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몇 권 보이네요. 제가 가진 해원에서 나온 옛날판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같이 들어있었지요. 어린 나이였었고 해서, '서부전전 이상없다'의 속편인줄 알았어요.ㅎㅎ 지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action, 그리고 유대계 주류의 여러 이슈들 때문에 덜 공감하지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6 18:01   좋아요 0 | URL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에 그 책 맞나요? 제가 [동유럽의 조각들]이란 페이퍼에 넣었던 책이랑 제목이 같아요. 그 책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기록이었죠, 아마. 소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 두 작품이 같이 있는지 신기해요. 레마르크는 다 비슷비슷해보여서 한꺼번에 읽는데에 무리가 따라요. 저는 한 작가를 쭉 읽어내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불가능해요. 트란님 요즘은 어떤 책 읽고 계세요? :)

transient-guest 2013-02-14 04:01   좋아요 0 | URL
레마르크도 theme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저는 위의 두 작품들하고 '사랑할때와 죽을때'까지는 잘 읽었는데, '개선문'은 조금 그랬구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읽으면서, 국경과 국경을 방황하는 운명의 당시 유태인들 생각에 좀 짠한 기분이었구요. 그래도 비교적 happy ending이라는게 좋았어요.ㅎ

아이리시스 2013-02-14 19: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빌리러 도서관에라도 가야겠어요. 레마르크는 한 권 봐서 궁금하지 않지만 유태인이라니, 관심사라서요. 해피엔딩 원어로 쓰니까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트란님. 멀리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0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