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세상, 세상 대 세상, 국가 대 국가, 이 싸움들 중에서도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게 '나 vs 나'인 것 같다. 잘난 작가들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문학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교훈이 된다. 전쟁문학을 추렸다. 추렸는데 읽히지가 않아서 여기가 끝이구나 했는데 무심하게 할퀴고 지나가는 어떤 감정들이 느닷없이 상처투성이 전쟁문학 속 주인공들을 돌아보게 한다. 누굴 위하여 종을 울리는 지도 모른 채 무조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전장에서도 가해와 피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리기 어렵다. 전쟁 뿐인가, 노조나 복수극에서도 매번 마주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들. 신에게 맡겨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 옳고 그름의 잔인한 판단. 오히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용되기도 한다. 왜 싸워야만 하는가. 세계는 '왜'라는 물음에 마침표 대신 필연성을 부여한지 오래다.

 

태초부터 엄청난 규모와 빈도의 전투가 있었다. 적어도 전쟁을 과거에 벌어진 한낱 다툼으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20세기의 화두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비롯,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이름의 전쟁이 이후 문학작품들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에 서야 하도록 만들었는지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전쟁문학은 살아남았다. 전우애, 사랑, 그리움으로부터 오는 감정소모는 끊임없이 회자되며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아 잔인함과 감동을 거듭 교차시키며 세상으로 밀려나온다. 무력이라면 차라리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명분이 버젓이 상대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사, 선과 악 혹은 광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희생양 매커니즘과 광기를 예술가의 것으로 치환해 이해하곤 했던 나는 히틀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니까 아렌트가 나치즘을 향해 쏟아낸 울분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이 비무슬림을 향해 갖고 있는 적대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관련 문제들은 언젠가부터 관심주제에 등극했고, 뿌리없는 가지처럼 단편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터지는 폭탄에 사지가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거나 우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전쟁과 재난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의도의 유무라고 보기에 잘잘못을 따지기에 너무 많은 연결고리들이 줄기차게 엮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잘 모를 때는 겁을 낼 이유가 없다. 두려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알게 되기 시작할 때다. 삶이 두렵지 않은 이는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얘기다. 전쟁문학에 대한 깊이 없는 고찰.


 
















전쟁통에 폐허가 된 이탈리아 마을의 한 야전병원에 홀로 남은 간호사와 남자환자를 오랫동안 상상했었다. 왜 버리고 가질 못하는가. 살아야 의미가 있지 않나. 내 물음은 허공을 맴돌았고, 답을 찾을 수도 없고, 찾아지지도 않았다. 잿더미 위의 불씨같은 희망처럼 서걱거리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질식해 호흡을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이 아연한 문장들을 대하자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욱 비현실처럼 여겨졌다. 디테일한 묘사는 때로 독처럼 쓰고 두려웠다. 암흑 속 절망과 붉은 노을 위의 하얀 집 같은 것들이 생생히 대비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존재를 감췄지만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 내 눈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그렇게 불렀다. 없는 듯 존재하면서 존재감이 적지도 크지도 않은 사람. 온 절망이 대부분의 희망을 꺼뜨리는 곳에서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반드시 내 곁에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 하지만 언제 안녕해도 좋을 사람. 영화 속에서 한나가 읽어주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바흐의 아리아와 함께 시린 기억을 찾아가는 실마리로 기능한다. 저 책은 필독서지만 두께가 만만찮아 엄두도 못내는데 인용된 부분마다 좋다.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쓴 후 폭발적 반응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지만 나치스 지배 하의 독일에서 작품의 반전적 내용(시각) 때문에 193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가, 9년 간의 미국망명 후 다시 스위스에 거처한다. 첫 작품 이외에는 대부분 망명생활 동안 집필했기에, 망명작가로 불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그늘진 낙원>, <리스본의 밤>은 망명소설 4부작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독일군이 소련의 대평원에서 잠복중인 현재진행형으로 시작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새파란 참전병사의 눈으로 본 세상과 체험을 서술해나간다. 죽고 죽이는, 시시각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진군 중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독일은 패전의 내음을 진지하게 맡기 시작한다. 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접경선으로 후퇴하면서까지 상대 영토 쑥대밭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이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땅이 얼고 녹는 동안 흙구덩이를 파헤쳐 부지런히도 묻었다. 오랫동안 전쟁의 끝을 바라온 병사들의 소원은 원인 모를 병이라도 걸려 제대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2년을 전장에서 보낸 노련한 병사 그레버는 3주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간다. 어렵사리 달려온 고향마을은 이미 몇 차례의 공습과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 폐허더미에서 주소를 더듬어 집을 찾아헤매는 한편, 부모님의 생사를 수소문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속출하는 지옥같은 잿더미 속에서 그들의 생사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방방곡곡 묻고 찾다가 어릴 적 친구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옥불마냥 활활 타오르는 대지에서 울부짖으며 타죽어가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전쟁통에 사랑과 결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귀한 것이 누군가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나가며 위로받고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다. 전장에서의 결혼은 절차가 간단하다는 말에 휴가 막바지는 온통 그녀와의 혼인신고와 미래에 대한 꿈, 유예된 행복 앞에 바쳐진다. 마침내 복귀일이 다가온다. 그레버는 여전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제 나라도 불바다가 되긴 마찬가지인 전쟁 앞에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소음과 절망과 파괴, 혹은 그 모든 것이 계속될 때, 그들의 작별은 결코 유예되지 않을 것이다. 


레마르크의 문장은 리얼리즘 혹은 사실주의에 가까운 묘사로 구성된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노래는 없지만 단 한 번의 사랑과 임시로 지어올린 집 안에서 지속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소망이 모인 것만으로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잔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젠가 이 상황도 끝날 거라는 기대감이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도살장 같은 화염과 통증과 증오가 곧 증발할 거란 잔혹한 기다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이전에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의 배경 또한 스페인 내전이다. 간단한 리뷰를 쓰면서 차마 역사적 배경까지 서술할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압박받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줘서는 안되는 강압과 같은 간섭을 스페인 내전상황 치하와 파시즘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다. 난 단지 전쟁통에 비수용적이고 광기어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남녀로 쓰는데 그쳤지만 배경이 좀 더 복잡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멜로드라마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차라리 르포에 가깝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비하면 자진참전한 경험을 살려 그 현장을 생생히 복기한 체험수기 한 편을 가장한 소설이지만, 전달하려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적으로 비틀지 않은 구성이 오히려 고맙다.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싶었던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오웰의 모든 문학은 차라리 현실 비틀기로 읽힌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을 오웰의 작품에서 찾는다면 없는 게 없을 정도. <동물농장>이 그랬고 <1984>가 그랬듯. 오웰과 헤밍웨이의 건조함과 차가움은 닮고 싶은 점이다. 그들의 작품은 치렁한 장식도, 미사여구도, 뻔한 수식어도 뺀 상태에서 문학이 된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이상한 전쟁. 영국 식민지 인도 출신의 외국인. 아무런 준비도 훈련도 없이 대강 교육시킨 이방인조차 투입시키는 어떤 싸움. 오웰은 어떠한 상상과 극적 전개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시간 순서에 따른 생생한 체험만을 기록했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대한 환멸의 기록이라 칭한다. 이 소설에는 현대 정치가 다투는 모든 이념 전쟁이 모두 들어있다. 전쟁을 배우기에 오웰의 작품들은 더없이 알맞다. 매순간 적절한 깊이와 놀라움을 안겨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파견된 장교, 간호사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소재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공통된 전쟁문학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장교와 간호사가 전장에 있는 건 당연하다보니 예상 스토리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초점은 자연스레 내용보다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문체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레마르크는 병사들의 무의미한 대화와 기다림, 그레버와 엘리자베스가 꿈꾸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렸다. 얼마나 더 깊고 간절히 혹은 생생하게 그려낼 것인가. 묘사나 문체, 기호에 판단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정적이라든가 관조적이라든가 하면 전장의 서걱거림을 담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승화라면 모를까, 전쟁에 대해 미화하는 것도 그 반대도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의 장편들은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다는 점에서 소재에 걸맞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헤밍웨이를 읽으면 배가 고프다. 실제 여자관계가 그랬듯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마초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칵테일조차 소다수와 설탕을 적게 넣는 대신 럼을 많이 넣어 독하고 차갑게 즐기는 게 취향이라니. 이쯤되면 내면에서 타협이 너울댄다. 그의 작품에서 남자에 비해 여자가 단조롭게 그려지는 것도 그의 성향과 관계가 있을까. 오웰과 헤밍웨이, 물론 레마르크도, 시대의 전장에 선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전쟁은 한낱 감정문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겪은 고통과 이미지로 환기되어 온 고통은 다른 것이다.

 


 

 



 


 





 

 

 

전쟁과 사랑. 또 하나의 빠질 수 없는 작가는 시배스천 폭스다. 2003년 BBC에서 조사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20위 안에 <새의 노래>가 들면서 위력을 증명했다. 영국 작가지만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 전쟁의 상흔, 고독 같은 것들을 주제로 경건한 서사시를 펼쳐낸다. BBC 동명드라마가 있다.


1차 대전 중의 프랑스가 배경으로, 전쟁중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스티븐이 상처극복을 위해 전장으로 들어간다. 전쟁이 사랑보다 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폭스는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자들이 잊혀져가는 것이 두려워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53년생인 그가 1993년에 발표해 일약 스타작가 덤에 올린 작품으로, 전쟁 전과 전쟁 중, 이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던 스티븐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자, 전쟁에 참여한 그는 참혹하고 잔인하게 그 시간을 겪어낸다. 포탄이 날아다니고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사람의 시체 냄새마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그 와중에도 이 상황을 타계하여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스티븐의 의지가 눈물겹다. 몸과 마음, 영혼마저 잃을 만큼 처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또 견디는 참전 병사들의 생생한 고통과 고뇌를 만지듯 느낄 수 있는 사실적 문체라는 점에서 헤밍웨이와 결을 같이한다.

 

 

 

 

 

 

 

 

 

 

 

 

 

 

 

 

문학은 문학이라서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사실적이지 않고, 사건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꼬마나 제3자 혹은 해설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이질적인 문체와 낯선 개연성, 다 맘에 든다. 초반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것이고, 기대 가득한 읽기 속에서 끝을 보기가 아쉬웠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떠올랐지만 서정적인 내용과 소년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이 소설 속에서 건진 <나의 투쟁>을 찔끔찔끔 보기 시작한지도 몇 달이다.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히틀러의 세계사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설마 히틀러가 글을 얼마나 잘쓰는지 보자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그즈음 손대는 문학마다 히틀러가 등장했다. 지나면 또 기억을 못해서 동생한테 읽어놓고 왜 모르냐는 얘기를 듣고, 1년에 한 권 읽는 너랑 1년에 100권 읽는 내가 어떻게 같겠냐고 했더니 말이 안된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서 왜 읽어도 기억을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권 내키는 대로 돌려읽기의 제대로된 폐해일 수도, 기억력이 원래 나쁠 수도 있다. 아니면 버려야 또 들일 수 있는 뇌구조로 자동설계 됐을지도.

 

실제로 제3국의 종족학살 같은 건 문학으로는커녕 언론기사로도 발화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소설이 뉴스가 무슨 힘을 갖는가. 내 땅의 전쟁 보다 남의 땅의 전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진과 동영상, 언론에서 전해주는 뉴스화면과 기사로 엿본다고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절반이라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옆집 싸움과 울음소리 신고에도 설마하다 결국 안하게 되는 게 실상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문학이 현실 같을 수 없고, 모든 문학이 현실이어야 할 리도 없지만, 전쟁이란 것을 겪었기에 위의 문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이보다 더 나약할 수 없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대단한 힘을 갖는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의 의미와 상태를 생생히 전달한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유럽의 좌파가 형성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군부와 우익 진영이 일으킨 내란, 뭘 어떻게 정의해야 간단해지는지 도통 모를 것 같은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여전히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구분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한낱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현상을 두고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린다. 한마디 더 보태서 상처 주느니 그냥 내가 상처 입고 말겠다. 언젠가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떠났고, 나는 친구를 이미 보내고 난 후였다. 한 번도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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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님. <잉글리쉬 페이션트> 너무 좋아해요. 레마르트의 <개선문>도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읽어보지 못했어요.<새의 노래>에 관심이 가네요. 전쟁문학으로 이렇게 정리해서 한 편의 잘 정리된 페이퍼로 보니 더 알차게 다가옵니다.

아이리시스 2013-02-02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요. <개선문>도 읽어보고 싶어요. 어딘가 비슷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많아서 레마르크를 바로 또 읽을 엄두가 나질 않아요.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부전전 이상없다가 출판된 것은 아직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어요.하지만 이미 우익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었죠.그가 망명한 이듬해인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합니다.

요즘 아이리시스 님이 제 블로그에 방문이 뜸해서 서운해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6:31   좋아요 0 | URL
풉 저도 노자님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어요=33333333333

왜 뜬금없이 바이마르 공화국 얘기를 하시지, 노이에자이트님은 항상 뼈가 되는 말씀만 해주셨는데 저 얘기가 중요한가..왜 바이마르 공화국 나왔지, 라고 곰곰 생각하다가요, 저는 똑똑하니까요(!) 발견했지 뭡니까. 오류를(!!) 그러니까 베껴도 좀 알고나서 베껴야 하는 건데, 푸핫 하하하 하하하(민망)

그래서 손 안대고 코를 풀었지 뭡니까! 문장 순서를 한 번 바꿔봤어요. (감쪽같죠?)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말이 안되는 짓을 제가 본문에 떡하니 적어놨지 뭡니까. >.< --;;;;;; (__) 이건 인사예요. 고맙다는.

아니, 노자님은 제 방문이 뜸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고.. 움화화홧. 갑니다, 댓글을 못 쓸 뿐.

댈러웨이 2013-02-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문학 몰아서 보고 있다더니 드디어 올라왔네요. 그게 언제였더라. 우힛. 별 걸 다 기억하는 댈러웨이! 아직 이 페이퍼는 안 읽었어요. 미리 잘 읽겠다고 갑자기 댓글을 다는 이유는...서운하다고 말씀하시는 노이에자이트님이 귀엽게...여...여...겨져서... =333 =33333 =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3-02-02 16:37   좋아요 0 | URL
맞아, 전에 제가 얘기 했었죠. 소문냈어 막. 페이퍼가 좀 오래 묵었어요. 전쟁 페이퍼가 세 개나 있었는데 그건 차차--;; 이상한 거 있죠.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니까 그 글을 왜 시작했는지 내가 쓰고자 했던 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아요. @.@@@@@@@@

아, 그리고 댈러웨이님, 댈러웨이님이 절 위해서 번역에 도전하실 책을 하나 발견했어요(무슨 소리지;;).

2013-02-02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3-02-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요? (폰인데 연결 댓글 기능이 없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8:40   좋아요 0 | URL
행진의 끝Parade’s End, 포드 매독스 포드.

transient-guest 2013-02-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몇 권 보이네요. 제가 가진 해원에서 나온 옛날판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같이 들어있었지요. 어린 나이였었고 해서, '서부전전 이상없다'의 속편인줄 알았어요.ㅎㅎ 지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action, 그리고 유대계 주류의 여러 이슈들 때문에 덜 공감하지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6 18:01   좋아요 0 | URL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에 그 책 맞나요? 제가 [동유럽의 조각들]이란 페이퍼에 넣었던 책이랑 제목이 같아요. 그 책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기록이었죠, 아마. 소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 두 작품이 같이 있는지 신기해요. 레마르크는 다 비슷비슷해보여서 한꺼번에 읽는데에 무리가 따라요. 저는 한 작가를 쭉 읽어내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불가능해요. 트란님 요즘은 어떤 책 읽고 계세요? :)

transient-guest 2013-02-14 04:01   좋아요 0 | URL
레마르크도 theme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저는 위의 두 작품들하고 '사랑할때와 죽을때'까지는 잘 읽었는데, '개선문'은 조금 그랬구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읽으면서, 국경과 국경을 방황하는 운명의 당시 유태인들 생각에 좀 짠한 기분이었구요. 그래도 비교적 happy ending이라는게 좋았어요.ㅎ

아이리시스 2013-02-14 19: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빌리러 도서관에라도 가야겠어요. 레마르크는 한 권 봐서 궁금하지 않지만 유태인이라니, 관심사라서요. 해피엔딩 원어로 쓰니까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트란님. 멀리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0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