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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평점 :
고독에 집중했고 결핍을 보았다. 구원에의 갈구를 들었지만 모른 척한다. 나는 구원을 모른다. 외로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어보았다. 살아내는 방법을 듣기 위해 처내미는 귀는 불순했다. 가까스로 떠올려진 기억. 고독했을 때가 까마득했다. 지나친 낙관과 애처로울 정도의 당당함은 가난에서 나오고, 그외의 것들은 없었다. 내팽개쳐진 장기들처럼 지도와 지표가 부유하고, 약도 있고 희망도 있는 나는 더없이 완벽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불우한 가정환경, 아버지의 오랜 부재, 어머니의 재가, 잃어버린 고향'으로 대변되는, 머리 위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우중충한 껍데기의 의기양양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수동성 외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휘청거렸다. 가질 수 없는 변명은 굴욕이었다. 더이상 울지 않는 그와 결코 수렴되지 않는 내가 만나 생의 이면을 볼 줄도 알게 되면 그때 말하겠지, 아무 곳에도 없고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구원 아니면 희망. 그가 찾는 모든 것.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울타리가 새삼 옥죄일 리 없고 별안간 해방을 선사할 리도 만무하므로 그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무극사는 유일한 설정임에도 비성공적이다. 그는 초라한 몸뚱아리 하나를 바치고 비로소 신화가 된다. 뒤란의 주홍색 감나무. 헛헛함이 발작적으로 배어나오는 방. 회색빛으로 감금된 잔혹한 사내. 큰아버지의 서랍에서 꺼내준 손톱깎이. 비밀은 모두 핏빛이다. 가문의 기둥이자 닫힌 벽의 상징 큰아버지, 압축적 삶의 본보기 뒷방 남자, 바람나기 위해 아들 버린 어머니, 세속의 대변인 전도사, 마지막으로 그의 유일한 그녀는 숨통을 끊지 못해 바라보는 펄떡이는 심장이다. 신에게로 가는 계단을 불사르기 전에는 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육욕과 소유욕, 애증과 환멸이 도사리는 도시의 유일한 방랑자. 희뿌연 세상을 헤엄치는 내장 터진 한마리 물고기. 불가능을 역설하면 결국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아무도 시도의 목숨줄을 끊지 못한다. 가까스로 부여잡은 숨통을 틀어쥐고 피떡 같은 생의 곳곳을 방황한다. 계절은 하나의 형태로만 저물고 뜬다. 곪아터진 상처에서 썩은내가 진동한다. 드디어 살아있음이다.
어두운 지하방, 그의 폐허는 병적이다. 차단된 공기는 잃어버린 추억을 헤집고, 청각과 미각을 지배한다. 그는 가장 외롭고 고독한 방식으로 신을 향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결코 존재이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집, 방, 과거를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가슴에 안고, 참고 참으며 울음의 강을 건너 기어나온 땅. 세상과 신은 그곳에 비로소 존재할 것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 주어진 시간이 모종의 음모같을 때, 이승우의 소설은 놓인다. 살기 위해 죽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기쁨과 환희가 그러하듯 구원조차도 고통을 담보한다는 걸 아는 이에게만 세상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건방으로 점철되어진 상처를 뽐내며 퀴퀴한 지하방으로 숨어들 때 그는 존재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 뿌리를 탐하는, 여자를 창녀 취급한 그의 행동은 이보다 더 쓰릴 수 없는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살래? 아니면 죽을래? 삶과 죽음은 한끗이다.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다. 습득된 모든 존재의 이유,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음을. 아프게 버틴다. 앞뒤, 위아래, 내면과 외면이 금지된 숨바꼭질을 시작하는, 꽃가루가 부유하는 봄밤이다. 감히, 당신의 현실과 신화는 몇 대 몇이냐고 묻는다. 내가 선택한 권리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이 여행은 모험이 뒤따른다. 잘못하다가는 사실의 영역으로 발이 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신화를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극사를 '신화적'으로 가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행선지로 무극사를 '막연하게' 상정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예컨대 그에게 무극사는 '막연한' 어떤 곳인 것이다. 이럴 때, 그가 무극사를 향해 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무극사는 고향과 대극의 자리에 있다.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곧 무극사(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pp.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