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김대행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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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9권]

 

 

  지금은 웃고 지나갈 추억이나, 나는 중학생 때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는 꿈을 꿨었다. 무엇이 문학을 그리도 쉽게 보게 했는지, 혹 문학을 일상처럼 여기게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나는 글을 퍽 많이 쓰고 지웠다. 문학비평이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려운 기법 같은 것을 공부하지도 않은 채, 나는 글로 일상을 실험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접하고 배울수록 나는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

 

  벽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벽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없다.”고 선언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시를 마지막으로 쓴 날은 입대 이틀 전이었다. 벌써 7년 전이다.


  국문학과는 고등학교 시절의 꿈 때문에 지원했었다. 주변에서 ‘문학소년’이라 불러주는 것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이 길이 아니다.”라고 단언해버렸는데, 내가 음미하던 문학의 묘미를 학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건 카뮈의 <이방인>이나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단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이라는 까닭에 사들어 - 고등학생의 어린 머리와 부족한 경험, 방어적인 감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 문학의 벽을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상처를 줬다. 그 길을 4년이나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거의 자폐적 방황의 길로 빠뜨렸다.


  시간이 지나니까 내성은 생기더라.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참을성’도, 물론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조금씩 생긴다. 학기 내내 부모님께 “다시 태어나면 국문과 절대 안 갈 거예요.”라고 투정을 하면서도, 국어교사이신 두 분의 여러 조언을 받아가며 정말 ‘꾸역꾸역’ 공부했고 다행이도 성과는 좋았다. 그래도 여전한 시각(혹은 편견)은 남아 있다. 비평은 문학의 양파껍질을 한 꺼풀 벗기는 작업이 아니라, 문학을 양파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어려운 이론을 공부할 때는 쉬운 책을 곁들여 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쉬운’이라는 형용사가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까운’이라는 형용사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기회를 김대행氏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   *   *

 


  이 책이 유명한지는 모르겠다. (물론 국문학계에서 저자의 명성은 높다. 수능 총감독을 한 적도 있는데, 사실 그보다는 시조 연구가 유명하다.) 약간 촌스러운 겉표지에, 역시 약간 촌스러운 폰트. “재미있고 쉽게 풀이한 교양강좌”라는 노골적인 선전문구도 그렇고, 약간 누렇게 바란 속지들을 보니, …, 그런데 이 책은 대체 언제부터 내 방에 있었던 것일까. 펼쳐보니 군데군데 얼핏 기억나는 구절들도 있다. 위로받은 흔적들이다.


  “중뿔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뭐니 하는 난삽한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것도 실상에 어긋난다. 우리는 농부의 모내기 소리도 문학이라고 하고, 자손에게 전한 집안 어른의 내력을 적은 것도 문학이라고 했는데, 요즘에 와서 조금 선을 긋고 칸을 지어서 구분하려고 한다고 이해하면 그만이다.(p.226)


  이런 말도 있다. 문학이 ‘거짓말’이라는 이론의 설명이다.


  “문학의 이런 성격을 두고 의사진술(pseudo-statement)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유명해진 이가 리처즈(I. A. Richards)라는 사람이고, 문학 용어를 풀이하는 책을 보면 이 용어에 대해 자세히 설명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런 일로 밥을 먹는 평론가나 학자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의사진술이라는 말은 결국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문학은 거짓말이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p.115)


  그가 쓴 논문이, 아마 읽어볼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국문학도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와 같이 쉽진 않다. 그러나 이따금 비평이라고 해서 인터넷에 돌아다니거나 책으로 나온 것들 - 그것도 “쉽다.”는 것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가 광고로 들어가 있는 것들 - 을 보면 소위 ‘대중서’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저자 개인이나 저자가 속한 집단, 혹은 학계의 지적수준을 뽐내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어려운 말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아예’ 안 썼다. 이런 종류의 책들을 문학팬들은 마땅히 반겨야 할 것이지만 많이 읽은 이들일수록 어려운 비평에 유혹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상위 독자’와 ‘그렇고 그런 독자’의 층위를 나눈다. 어느새 우리나라의 비뚤어진 ‘문학 문화’는 롤랑 바르트, 라캉, 고진 등을 알아야 문학에 대한 글을 번듯이 내놓을 수 있는 풍경을 만들었다.


  물론 누구나 작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작가가 발표한 작품들 중에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든지 어린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의 것이 간혹 있기도 하다.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러나 창작과 소통이 다소 제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수용’은 그보다 훨씬 넓은 운신의 폭을 갖는다. 나에게 어렵다면 그것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거나 지식을 갖춘 후에 다시 읽으면 되는 것이고, 나에게 알맞다면 그것이 별 인기가 없는 작품이거나 혹 ‘유아용 책’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비평들이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문학은 목소리를 가질 기회를 번번이 잃고 있다.


  “우리 살아가는 확인이 문학으로 가능하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밤새 안녕’을 묻듯이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사하리라.(p.237)


  문학은 생각보다 간단한 기능을 갖고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건 거의 구분이 없는 거대한 물질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장르구분이나 ‘작가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시인이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시를 쓰면 ‘시인이며 소설가’, 혹은 ‘소설가이며 시인’인데, 둘은 전혀 다르지 않고, 여기에 그들이 문학비평까지 한다면 ‘시인이며 소설가, 그리고 비평가’인데 말이 너무 길어서 ‘작가이며 비평가’라고 한다. ‘시인이며 소설가’가 곧 ‘작가’인 셈이다. 하지만 김대행氏의 말마따나 일기도 문학이니, 이건 정말 복잡한 일이 된다. 이러한 ‘구분 없음’이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저자는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 미술로 예를 들자면 중세시대에는 수도승들이 필사(筆寫)도 했고, 그림도 그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수도승이며 필사가이고, 또한 화가”라고 하진 않는다. 그땐 거의 다 그랬으니까.


  더군다나 문학이 ‘자기표현의 길’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학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있는 셈이다. 나는 미술블로그를 할 적에 몇몇 주변 분들과의 추억을 만들려고 “여러분이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메일로 보내주세요.”라는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웃분들이 메일에 “글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서…”라는 겸손의 추신을 달아주셨다. 그 말이 사실일수도 있다. 바쁜 중에 정말로 글을 별로 써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이라는 것에 대한 왜곡된 정의가 있다. 뭔가 갖춰야 할 것 같은.


  김대행氏는 작가의 모습을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엉덩이의 수술 자국”이라 말한다. 글은 치부를 드러낸다. (혹 그것이 보통 용기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결정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창피한 일일수도 있다. 글에는 허점투성이가 많아 굳이 분석해 따지려는 이가 있으면 우리의 대부분은 언제든지 약점을 잡힐 수가 있다.


  그러나 글쓰기란 원래 그런 작업이다. 다 보여주는 것, 혹은 일부라도 보여주는 것. 그건 문을 여는 행위이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놓은’ 상태이다. 공감과 형상화의 언어로 되어 있는 그 방, 혹은 건물의 바깥은 우리가 체험할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을 저마다의 눈으로 보는 연습이 저 어려운 이론을 섭렵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어울리는 일이 될 것이다. 어려운 건 나중에 해도 된다.


  “문학을 우리 일상 속으로 가져오는 데 주저가 없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 학자의 삶을 산 저자의 이 마지막 문장에는 어떤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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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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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깊이에의 강요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줄곧 가져왔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일까?” 아니, 더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나는 과연 작가들의 작품에 별점이나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소위 ‘Old Masters’라고, 19세기 이전의 위대한 화가들의 명부가 마치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올라오는 리스트처럼 작성된 것이 있다. 미술을 잘 몰라도 일단 들어보면 다들 기억해낼 수 있는 이름들이 그 위에 적혀 있다.


  이런 질문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피카소의 (이 점이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이 마티스의 (이 점 또한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에 비해 높거나 낮은 평가를 받을 근거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예술의 가치는 뒤샹의 놀라운 시도(변기)로 붕괴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담겨져 있는 내용이나 창작과정의 기발함이 중요하다면 이제 형태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고, 색감이나 선 따위, 그러니까 보수적인 미술사가들이 지금까지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미술의 기본요소들은 ‘기본’에서 ‘부차’적 요소로 강등당한 상태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이 우리에게 ‘다른 눈’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박탈감을 느끼면서라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론 그들도 이미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피카소도, 마티스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알게 된 것들 중, 이건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데, ‘가치의 해체’ 혹은 ‘역전’은 오히려 우리가 미술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이러니이다. 미술은 분명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기성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라면 누구나 한 작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 (혹은 발견해내야만 한다.) 따라서 ‘평가’라는 것은 판단기준 중 하나, 즉 기껏해야 참고자료 정도일 뿐, 개인판단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지금까지 현대미술이 해온 작업이 바로 그거다.


  그런데 ‘깊이에의 강요’라니! 나는 쥐스킨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그 신선함에 놀라곤 하나, 이번에는 그 사건의 ‘생생함’에 놀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신선한 소재라고 하면 <향수>에 버금갈 만한 것은 없을 테니까. 아, 이 단편집의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도 독특한 소재를 갖고 있다.)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특정한 비평이 나의 가슴을 걸레 짜듯 비틀어버렸다.


  저와 같은 비평은 비평 속에 개인적 취향이 굳게 자리 잡아 있거나, 때론 말 못할 지적 권력이라든지 실제 미술계에 뿌리내린 관행의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을 때에 더욱 확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웬만한 양심적인 비평가들은 그들이 작품을 판단할 미적 가치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자살케 했던 비평가와 같은 적나라한 글은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마지막 비평을 읽고 못내 분개한 까닭은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뻔뻔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욕설 있는 악플이 좋다. 반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갖춘 듯 하고 호사한 언변으로 치장된 ‘악평’은, 만약 피해자가 그보다 나은 합리와 논리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면(그리고 대부분이 그런 경우인데), 피해자를 단순한 좌절이 아닌 ‘그녀의 선택(자살)’을 스스로가 계획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승리
  누구나 공격적인 삶을 한 번은 꿈꿔볼 것이다. 고리타분한 것에 대항해서 “당신은 별로 재미가 없어!”라고 소리치고도 싶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소시민들이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나, 정의로운 영웅들이 나오는 히어로 무비들을 보면서 뭔가 대단한 것을 얻은 양 잰 채 해보기도 하고,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오히려 그것이 희열을 배가시키는데) 쥐스킨트의 <승리>에 나오는 구경꾼들처럼 젊은이가 무모한 체스를 두는 것을 감동적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저 늙은 체스꾼이 더 이상 체스를 두지 않기로 한 것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저 구경꾼들이 결국 젊은이의 패배로 끝난 이 체스판을 등지고 각자 저녁을 먹으러 돌아갔다는 것이다. 영웅이 죽어도, 혹은 우리가 영웅이라 여겼는데 실제 영웅은 아니었던 이가 죽어도, 일상은 남아 있다. 언제나 드라마이고, 언제나 혁명인 삶은 없다. 이 점이 우리가 ‘승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다.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이 단편은 <향수>의 느낌을 줬다.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기발한 착상에 거의 속아버릴 뻔 했을 즈음에 쥐스킨트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우리 몸이 늙을수록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이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조언들이 어느덧 나에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상한 세계를 보여줬다. 전 세계의 하늘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전 세계의 하늘을 관찰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자신이, 그러니까 장인 뮈사르가 여태껏 파온 땅에서 모두 조개화석이 나왔기에 전 지구가 조개화석으로 이뤄져 있다는 (이상한) 논리는 정말이지 사실인 것만 같았다.


 “진실의 얼굴은 소름 끼치고, 메두사의 머리처럼 그것을 본 사람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이든 끊임없는 탐구의 결과이든 일단 그것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휴식과 위로가 없어도, 아무도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사실 누구나 알겠지만 이건 궤변이다. 저런 말은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을 유일무이의 진리로 선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은, 아니 적어도 두 세 번은 정말로 뮈사르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까닭에 나는 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과연 선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대학에서 조금 배웠으므로 세상의 진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대강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뉴턴에서 양자역학까지는 적어도 조금이나마 생생한 편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비록 중요하긴 하더라도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관절 나는 무슨 이유로 그것들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 내가 이런 지식들을 쌓아가는 동안 뇌의 반대편에는 지혜가 쌓여갔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란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선언이라 해도 좋다. 진리를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세상이고, 아예 입증하지 않고도 뭔가를 진리라 맹신하는 이들이 그보다 훨씬 많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소위 “되도 않는” 말 따위로 여겨진다면 뮈사르의 주장이 순도 100%의 거짓말일 가능성을 그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 “세상은 불로 이뤄져 있다.”라든지 “세상은 숫자로 이뤄져 있다.”라는, 철학사상 대단히 중요한 발견 중 몇 가지로 치부되는 선언의 ‘진리형상화’와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따라서 진지한 독자라면 모두 뮈사르의 말에 (이 단편은 정말 짧으므로) 잠시나마 주목하면서 솔깃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현명해서이다.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
  지금껏 읽은 에세이 중에서 가장 시원한 글. 나는 분명 졸문인 이 리뷰를 얼마 안 가서 잊고 말 것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 서재에 꽂혀, 더러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내용을 짐작이라도 하느냐고 나를 쳐다보는데, 문제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음악의 멜로디나 회화의 색감은 얼마나 잘 기억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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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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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8권]

 

 

  문장들은 확신에 차 있었고, 나는 읽는 내내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한 세기도 전에 계획한 감시체계의 일부가 지금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어 그에게서 예언자와 같은 느낌을 아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초상화 속 인상을 꼭 닮은 강한 글이 <파놉티콘>이라는 짧은 책 속에 압축되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도 파놉티콘 건설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두 뺨으로 눈물을 흘렸다. 평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그를 아는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탈감도 대단히 컸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엄격했던 그는 ‘교화가 가능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감옥을 통해 영국 사회에 큰 이득을 주려고 했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은 역으로 당시 사회가 변변치 못한 형벌개혁에 못마땅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벤담은 수감자들의 신체형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들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수감자들은 신체의 고통은 적은 엄격한 삶을 통해 교육받을 것이고, 감옥은 사회적 이득의 원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로 인해, 영국에서는 사업실패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후 파놉티콘은 조금씩 변형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숫자와 코드로만 이뤄져 있는 개개인의 인터넷 정보들이 거대회사나 정부에게 감시당하는 이른바 ‘수퍼파놉티콘’ 사회에 살고 있다.


  신건수氏가 옮긴 이 책 <파놉티콘>은 뒤몽의 도움으로 프랑스 국회에 제출된 것, 즉 벤담의 ‘프로포설’이기 때문에 자세한 계획보다는 파놉티콘의 효과와 기능, 그리고 벤담의 설득이 주를 이룬다. 반면 영국판에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판은 직설적인 어투로 이뤄져 있다. B6용지 약 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설득력은 대단히 높다.


  이 책의 구성은 대략 ‘파놉티콘의 장점’, ‘감옥의 3원칙’, ‘파놉티콘 관리의 10원칙’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신건수氏의 해제 <파놉티콘과 근대 유토피아>는 이 책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후대의 평가를 담고 있으므로 일독해야 하는 부분이다.

 

 

 

*    *    *

 

 

  파놉티콘 최고의 장점은 ‘감시’라는 통제에 있다. 감시는 직접적으로 신체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다. 대신 “범죄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책임자는 간수와 죄수를 감시하고, 간수는 죄수를 감시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수도 죄수를 감시해야 한다. “악을 고발하거나 공범자가 되어 고통을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벤담은 우리가 말하는 소위 ‘방관죄’나 ‘연좌제’ 등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그 어떤 죄악이 이를 피해갈 수 있겠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은 ‘도덕극장’이다. 어떻게 감옥이 도덕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벤담은 신체형이 적은 대신 생활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효율적인 감옥을 계획한다. 고통은 완화되고, 위안과 쾌락에 기초한 노동일과가 있으며, “감옥은 하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벤담의 ‘교육론’에 따라 독서, 글쓰기, 산수, 음악, 그림그리기 등이 실시되는데, 특히 산수는 노동에 이로운 교육이라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벤담이 이러한 감옥을 정부가 아닌 기업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공리주의자이다. 경제적인 효율을 중시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의 적(敵)은 공금횡령과 태만인데, 이는 사립·사설기업과의 계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공적정신은 느슨해진다.”라는 대목에서 그의 자유방임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계획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관리자들이 늘어나면 여러 조치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의견 불일치를 가져오며 관계자 사이의 길고 힘든 전투 후에 가장 강하고 고집불통인 사람만이 전장의 승리자로 남게 된다.”


  이렇듯 감옥이 계약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 1 관리원칙이다. (2원칙은 ‘성별격리’이고) 세 번째 원칙은 ‘격리’이다. “반만 썩은 것이 완전히 썩은 것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마 죄수들을 개개인별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담은 완전고립을 통해 반성이나 회개를 이룰 수 있느냐는 질문에 회의를 느꼈고, 그보다는 오히려 고립이 절망과 광기를 불러올 수 있음을 강조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영화 <쇼생크 탈출> 등 작중 인물들이 ‘독방’에 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벤담은 이 점을 이용, 아홉 번째 원칙에서는 ‘고립의 벌’로 악질의 죄수들을 공동체에서 잠시 격리시키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네 번째 원칙은 노동에 관한 것으로 노동이 위안과 쾌락을 준다는 점을 활용한 대목이고, 다섯 번째의 것은 조금 독특하다. 죄수들이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음식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음식의 질은 위에서 말한 ‘엄격성’의 원칙에 따라 빈민계층 이상의 수준이 되진 못한다. 여섯 번째는 의복에 관한 원칙인데, 새삼 기발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죄수들이 탈옥했을 때 “나는 죄수가 아닙니다.”라고 발뺌할 수 없도록 소매 길이가 각각 다른 옷을 입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이 각각 뙤약볕에 탄 길이가 다를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생과 건강에 관련된 일곱 번째 원칙은 “청결에 대한 세심한 정성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벤담의 생각에 기초한다. 야외운동기구로 오늘날 런닝머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트레밀’이 응용된 점이 흥미롭다. 한편 벤담은 수감자들의 취침시간을 7~8시간 이내로 고정해야 게으름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덟 번째 원칙은 교육과 주말의 활용에 관한 것으로 그가 교육방식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홉 번째 원칙은 징벌. 앞서 말한 ‘독방’이나 ‘연좌제’가 이에 해당한다. 연좌제는 만약 열 명이 있다면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에 대응되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매우 훌륭한 감시체계라고 생각했다. 석방준비와 관련된 열 번째 원칙에서 그는 교화된 죄수를 육·해군에 복무시키고 식민지로 이주할 기회를 주는 방법, 석방된 수감자를 책임질 보증인을 구하는 방법 등을 제시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석방대상자는 처벌기간을 연장해 거의 수도원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보조시설에 수용하는 방법도 있다.

 

 

 

*   *   *

 


  벤담 이전의 형벌체계는 주먹구구식이었다. 국내 감옥들이 수용한계에 시달리면 정부는 죄수들을 식민지로 보냈다.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 이송된 죄수들은 사실 그 나라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일파만파 전염되는 악영향이 있었다. 호주의 경우에는 80여 년간 이송된 죄수의 수만 해도 13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를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봐서 “왜 감옥들에 죄수가 많아졌는가?”를 물어볼 수도 있다. 이 책의 해제에는 그 배경이 소개되어 있다. 간략히 말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예전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행위들이 ‘경범죄’라는 죄목 하에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용되면 간수들이 교육해야 하는 것은 노동의 가치나 경제질서 같은 것이었으며, 엄밀히 말해 중범죄자들에게 부여되는 ‘도덕함양의 의무’ 같은 것은 해당되는 사례가 드물었다. 이 점이 바로 벤담이 말한 ‘감옥의 학교화’에 해당할 것이다.


  신건수氏의 해제에는 푸코의 파놉티콘 분석이 있어 더불어 읽어보기 좋다. 푸코의 사상을 알거나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를 읽어본 이라면 벤담의 파놉티콘 속에 들어 있는 근대권력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작용’되고 ‘생산’되는 것이라는 구절은, 푸코를 모르는 이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소설 <1984>, 학교의 운동장, CCTV. 우리는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통제의 사회’에 살고 있다. “Sees all.”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과 같은 중앙감시자, 혹은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와 같은 존재가 없는 대신, 감시의 그물망이 분산되어 있는 현대사회. 우리는 사실 감시되길 원치 않으나, 정보를 제공하면 혜택을 주겠다는 여러 기업들의 상술에 기꺼이 “넘어가며”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는 역설적인 현대인. 하지만 역으로 다수가 1인을 감시할 수 있어 권력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이른바 ‘시놉티콘’이라는 현대정치의 형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고전(古典)으로 치부되는 <파놉티콘>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파놉티콘’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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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
틸 뢰네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8.16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7권]

 

 

  저번 학기, 아직 추위가 제법 있던 어느 날에 나는 아침부터 K문고로 가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는 시집을 하나 사들고 학교로 갔다. 두고두고 읽었는데, 마지막 시가 유독 울림이 컸다. <아직>이라는 시이다. 시의 긴 부제로 놓고 보면 이 시는 ‘사랑 때문에 죽는 이’가 없는 세상을 향한 슬픈 탄식이다.


  그런데 내게 울림을 준 구절은 따로 있었다. “여러 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쉼보르스카가 떠올랐다. 새삼 나는 “왜 나는 벤자민 버튼처럼 거꾸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라는 아쉬운 생각을 했다. 미치오 카쿠 박사가 출연한 BBC 다큐멘터리


  그러나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미련이 있었다. 시간에 대해 미련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미련이 남을 잘못을 일정 수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개운하게 일어나고, 나에게 맞는 시간대로 활동하고, 조금씩 무언가를 거둬드리고, 어두워지면 가벼운 피곤함을 거부하지 않으며 잠이 드는 하루라면, 그렇다, 시간에의 미련은 애당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리드미컬한 삶이 건강하다는 건 당연지사. 나의 생활은 아무런 조(調)도 없고, 아무런 박(拍)도 없는 실험적 음악과 비슷하다.


  틸 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원제 : Wie Wir Ticken)>은 정확히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책이 나에게 반성과 자책, 그리고 위로를 줄 것은 제목에서부터 짐작했다. 이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뢰네베르크는 대뜸 시간 앞에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위로부터 한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예찬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새벽 4~5시에 기상하는 심한 종달새들은 극소수인 데 반해 그 시간까지 잠들지 않는 올빼미들은 그보다 더 많다. 그리하여 일찍 일어난 종달새들이 숲에 나타나기 전에 아직 잠들지 않은 올빼미들이 버섯을 모두 가로채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조금 극단적인 듯하나, 다시 말해 ‘새벽잠 없는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빗댄 것이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은 시간에 순서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시간에 순서가 있을까? 새벽 1시와 밤 11시 사이에는 과연 어떤 ‘순서’가 있을까? 시간은 순환한다. 따라서 순서는 없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저자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는 서로 다른 관념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설명으로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예찬’을 거부한다.


  이어지는 여러 실험들은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생소한 용어들을 차치한다면 뢰네베르크의 설명은 쉽고 친절한 편이다. 각 장마다 반복되는 설명들도 있어 그의 말마따나 이 책을 중간 정도까지 읽으면 이미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흥미로운 사례들도 이 책의 무게를 한층 덜어준다.


  수면박탈, 수면금지구역(각성유지구역), 동시진행, 체내시계, SCN, 서캐디안 리듬체계, 동조의 원칙 등의 용어들을 통해 “무엇이 우리를 잠들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독자들은 이어지는 글에서 현대산업사회의 ‘사회적 시차증’ 문제를 접해야 한다. 이 개념은 현대인의 대다수가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부분이라 우리에게 마치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중부유럽인의 40%가 약 2시간 정도의 사회적 시차증을 갖고 있으며, 이는 체내시간과 외부시간 간 3시간 정도의 차이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중부유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간 체계에 따라 사는 동안 동쪽으로 2~3시간 떨어져 있는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무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대표적인 것이 흡연)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간도 동물과 같아서 체내시계가 태양에 맞춰져 있다. 뢰네베르크는 “태양이 문화에 선행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양을 따라 살지 않는다. 동물은 분명 빛과 어둠이 체내시계의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반면 인간은 자명종이 체내시계를 대신한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때에 일어나고, 자야 할 때에 깨어 있다. 동물들 중 대부분이 간헐적으로 잠을 자며, 특히 태양이 높게 떠 땅이 뜨거워졌을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잠을 잔다. 뇌가 뜨거우면 잠이 오고, 하품이 난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뜨거울 때에도 나가서 일을 한다. 지중해의 농부들이 만든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는 인간에게 유익하지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낮잠을 꾸준히 자는 사람들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아이들이다.


  낮에 빛을 많이 보고, 밤에 빛을 적게 보면 ‘빠른’ 시간유형의 사람이 된다. 이는 일찍 자고,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는 건강한 생활의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일과시간을 보통 실내에서 지내기 때문에 낮에 빛을 적게 보고, 밤에 빛을 많이 본다. 이것이 때때로 우리가 아주 피곤하더라도 잠이 오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낳는다. 여기에 열대야나 불면증까지 더해지면 그 날의 피로는 다음 주까지도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렇듯 그의 설명을 읽다보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 거스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고,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뢰네베르크가 이 책을 통해 사회적 문제라 지적하는 두 가지는 이른 등교시간과 서머타임이다. 그는 일명 ‘덴마크 프로젝트’라는 것을 소개하는데, 이 생소한 프로젝트는 학생을 고객으로 여기며, 그들이 마음대로 등교하고 하교하도록 하는 실험적인 교육시스템을 일컫는다. 뢰네베르크는 ‘젊음’과 ‘야행성’의 연관관계를 실험적으로 밝힌 뒤, “10대들은 야행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10대들에게는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아침 늦게 등교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권장될 수 있다는 말이다. 덴마크는 그 점을 알았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운영한 바 있다.


  서머타임에 저자가 반대하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사회적 시차증 때문이다. 서머타임은 “계절적 변화를 3주 정도 거스르는” 시스템이라서 “하루아침에 서쪽으로 15도 정도 여행해 그곳에 체류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머타임이 “1시간 더 일찍 출근하겠다는 집단적인 결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뢰네베르크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작업은 시간생물학의 연구사례, 개념, 그리고 결론을 쉽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결론’이란 연구결과가 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그는 마지막 장에서 “체내시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체내시계란  외부시간을 나에게 맞게끔 리모델링한 시간이다. 물론 이것은 유전되는 까닭에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라 (사람 살피는데 부주의한 면이 있는) 누군가에게는 병으로 여겨질 법한 점도 있다.


  하지만 뢰네베르크는 우리에게 “다양한 시간유형”이 있음을 강조한다. 체내시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시간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옮긴이도 그 점을 다시금 짚고 넘어간다. 아들이 어느 날 와서 그(옮긴이)에게 한다는 말이, 친한 친구 한 명은 아침에는 무반응이고 오후부터 웃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뢰네베르크의 책에서 얻은 지혜를 아들에게 들려줬다. 오해하지 말라고.


  이 책은 어쩌면 수많은 카운슬링 책들에 앞서 읽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기이해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시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단순한 효율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근사한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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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 다큐멘터리가 '시간'에 대한 다큐..제가 봤던 그걸까요?

[벤자민-]을 영화도 책도 아직이라서 잘 모르겠고, 이 리뷰는 좀 어려운 걸요. 시간생물학도 생소하고요. 그나저나 모르면 댓글을 말던가 뭐하는 건지........( '')

미안요!

탕기 2012-08-20 00:09   좋아요 0 | URL
영생의 물약 먹을거냐고 카쿠 박사가 물어보던 그 다큐에요. 아마 맞지 않을까요?ㅎ
저도 이 책은 이해는 되는데 뭐라 리뷰 쓰기 참 어려웠어요. 사실 그다지 감명이 있다거나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만세전 열림원 논술 한국문학 13
염상섭 지음, 손미순 / 열림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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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무관심도 하여보고, 꾸지람도 하여보고, 장황한 설명도 하여보고, 화도 내어본다. ‘이인화’ 이 사람이 나와 닮은 점들이 많아 <만세전>을 읽는 내내 나는 차분하게 공감했었다. 그래도 그에게 매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고작 몇 달의 신혼생활 끝에 십 년을 유학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아무래도 죽어가는 아내에게 별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은 너무 하다 싶었다. 그러나 이광수의 <무정>에서 본 ‘자유연애’를 생각하며, 그래, 모두가 일편단심일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제대로 된 정을 줘 본 적 없는 그의 싱거운 반응과 생각, 그리고 건넌방에 가 ‘정자(시즈꼬)’니 ‘을라’니 하는 여인들을 머릿속에 그려본 그에게 동정했다.


  얼마 되지 않은 분량을 다 읽고 나니, 나에게 급한 체증이 찾아왔다. 이면지에 빼곡히 적어놓은 메모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다시 희뿌연, 기분 나쁜 안개로 가득 찬다. 이런 안개는 영화나 TV에서 그렇듯 묘지와 어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그가 1922년 이 작품을 발표했을 적에 원래 제목은 <묘지>이었다.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지금의 심리로는 잘 되지가 않기에 별안간 <만세전>에 대한 나의 소고는 쓰지 않으리라 했으나, 마침 비가 내리니 적적함이 마음 밑바닥에 침전되어 고요히 호수를 이뤘다. 어둔 하늘보다 더 짙어 실루엣으로 제 몸집을 가늠케 하는 큰 나무가 창가에 버티어 있고, 집 앞 공원의 모래바닥을 걷는 사람의 자박자박 걸음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다시 메모들을 펼쳐보았다.

 

 

*   *   *

 

 

  돌이켜보니, 그가 현해탄을 건너기 전까지의 여정에 나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메모는 이인화가 대전까지 온 다음부터 많아졌다. 이면지 한 장을 가득 채웠다. 그가 ‘M헌’이란 곳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작중 담겨 있던 그의 무서우리만치 솔직한 넋두리가 한겨울 바람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대목들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고쳐 읽기도 해보고, 메모로도 적어보고, 홀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다가 불현듯 나에게서도 북받쳐 오르는 것이 있어 멈칫멈칫하기도 해보았다.


  ‘배운 자’, 아니 ‘배워가는 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렇지 못한 자들과 마주할 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엄청난 층계의 격차를 소름끼치게 느끼곤 한다. 그래, 저 위에서 떵떵거리는 이들이 뭔가 계몽적인 말을 한다고 치더라도 그 말이 층계를 따라 또로로 굴러 떨어져 저 밑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기라도 했다면 지금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었겠느냐, 하는 역정도 내보곤 했다. <무정>을 읽고 내가 가진 가장 큰 위선의 장면은 대개 이런 것에서 나왔었다. 이인화 그 자도 배운 자의 입장에서 “과학지식이라고는 소댕뚜껑(솥뚜껑)이 무거워야 밥이 잘 무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속으로 나무랐는데, 나는 그가 또 어떤 위선의 궤변들을 늘어놓을까 단박에 째려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않는다. 그 말이 <무정>의 이형식처럼 수직으로, 혹은 수평으로 쭉쭉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 뿔에 지친 양 툭 떨어지고 만다. 이인화는 세상을 바꿔보려는 적극적인 태도에서 허황된, 언젠가 내가 인용한 김수산(金水山)의 표현대로라면 ‘사상누각’의 세계관을 만들지 않고, 그대로 도망가고자 한다. 자신을 이해 못하는 가족을 두고 집을 ‘여관’이라 하기도 하고, 위생이니 이층집이니 편리이니 하는 것들을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아니면 빼앗겨도 그대로 내준 뒤 술 한 잔에 화푸념만 하고 마는 조선 사람들을 증오하면서. 이인화의 태도도, 그들보다는 조금 더 안다는 까닭에 여러 정황을 계산도 해보고 자기방어도 해보지만, 결국 같은 줄에 매달린 빨랫감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못내 연민의 눈을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소설의 말미에 마음을 다 접은 듯 이렇게 말한다. 연민으로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다. 옳은 말이다.


  그런 것들과 더불어 또한 여러 이유들로 나는 그의 증오하는 자세를 ‘증오’할 수 없었다. 이형식과 이인화 사이에, 나를 독자의 위치에 세워놓고 분명 나는 분명 이인화에게 한 발 더 가까이에 있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괴괴한 거리의 처량한 모습이 조선의 실경이라면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은 주변을 탓하기 전에 냅다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 속에서는 그처럼 이런 말도 하겠지 싶었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망할 때로 망해버려라.”,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이다!” 파울 클레가 나치에게 작품들을 빼앗겨놓고 스위스로 도망갈 적에 뱉었다는 그런 종류의 상스러운, 홧김에 하는 말들 말이다.


  모든 것들을 보고 꾹 참아왔던 그의 마음도 대전 즈음에서는 무방비로 폭발해버렸다. 산다는 것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역겨운 취급 받는 것 중 하나가 구더기이다. 무기력한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절하시켜놓고 끝내 그는 “무엇에 써먹는 인종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이든, ‘김의관’이든, 김의관의 ‘차지(심부름꾼)’이든 간에. 세계대전(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조선만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 탓이리라 생각도 해보는 것이, 몇 달 살고 헤어졌다가 십 년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차에 죽어간다는 아내의 소식을 듣고도 동요 한 번 않는 이인화가 조금은 유별난가 싶기도 한 것이다. 서울에 와서도 아내와는 서먹하고, 미음 한 번 떠먹여줬다는 까닭에 뭔가 한 것 같아 뿌듯하여 유쾌하다 느껴보기도 하고, 아이(중기)를 보고 ‘고깃덩어리’라 하질 않나, 서울집에서 사나흘 머물 적에도 이따금 ‘정자’니 ‘을라’니 생각해보며 장례 후 재혼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그는 만사에 냉정한 이가 아니라, 그에게 맞지 않는 너트는 N극이 S극을 밀어내듯 거부해버리는 볼트와 다름없다. 면역이라면 면역이랄까.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로 그를 달래 봐도 <만세전>의 모습은 달라질 바가 없을 것이다.


  사회가 병약하여 썩어빠진 잇몸이 무너져 내리듯 사람을 누르고 누르면 애국은 둘째 치고서라도 오기로 일어나고자 할 법 한데, 이인화가 느낀 이 사회는 제목 그대로 묘지이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정 없으면 ‘무정’하면 된다.


  이매망량. 온갖 도깨비란 뜻이다. 귀신에게 정을 줄까, 도깨비에게 봉사할까, 그들 구원받을 길도 없는 ‘백의(白衣)’ 입은 이들을 두고 이인화는 신생(新生)하러 떠나는데 마지막에 피식 웃어봄이 나에게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대만의 생번’ 같은 ‘요보’들을 두고 그는 다시 현해탄을 건너 동경으로 갔을 것이다. 올 때처럼 선박 안에서는 조용히 눌려 있다가 아마 돌아가서는 M헌에서 들르고도 했을 것이다. 그것 말고 또 무엇을 했을지는, 별 관심 없다. ‘묘지’ 보고 돌아오며 “나는 묘지를 봤다.”고 하는 이에게, 그 묘지의 양분 위에 태어나 후손으로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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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만세전은 밑줄 그어가며 분석하면서 읽고 줄거리요약까지 했었는데도 이 생경한 느낌은 뭘까요. 사람의 기억력이란..아니 제 기억력이란..!

탕기님, 지금 N블로그에서 오는 길이에요. 탕기님이 만드신 카페 덕분에 알게 되신 분들께 안부인사 드리고요.ㅎㅎ

탕기 2012-08-16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면지에다가 뭘 빼곡하게 적어놓긴 했는데, 참 볼 때마다 염상섭의 내공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 저 조금씩 블로그 살려보려고 건드려보는 중이에요. 나중에 저도 카페 이웃분들 한 분 한 분 초대해서 옛날에 블로그 했던 기억으로 좀 다듬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학교는 1년 정도 더 다녀야 할 것 같지만 틈틈이 만들어서 졸업한 다음에는 직접 이웃분들 찾아뵈야죠.^^

아이리시스 2012-08-19 16:4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그렇잖아도 선샨님이 탕기님이 블러그 접고 가버렸다고 서운해하셔서..조만간 보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인연은 끊기는 게 아니고 언젠가 만날 사람은 만나는 거라고 하시던데요^^

우리 그때 미술관도 가보기로 하고 그랬었는데..어언..( '')

루브르 산책인가 그 책이 나온 걸 보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게 개정판이라 그러시더라고요ㅎㅎ 책 안 읽은 거 다 뾰록났죠 뭐.ㅋㅋㅋ

탕기 2012-08-20 00:08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벌써 오래 전 일이군요.
예전의 '탕기'라 하기에 제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졸업하면 조금 나아질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간 대학 다니면서 미술공부 소홀해진 것도 있고, 원채 게으르고.ㅎ
나중에 한 분 한 분 초대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