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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20
깊이에의 강요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줄곧 가져왔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일까?” 아니, 더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나는 과연 작가들의 작품에 별점이나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소위 ‘Old Masters’라고, 19세기 이전의 위대한 화가들의 명부가 마치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올라오는 리스트처럼 작성된 것이 있다. 미술을 잘 몰라도 일단 들어보면 다들 기억해낼 수 있는 이름들이 그 위에 적혀 있다.
이런 질문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피카소의 (이 점이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이 마티스의 (이 점 또한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에 비해 높거나 낮은 평가를 받을 근거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예술의 가치는 뒤샹의 놀라운 시도(변기)로 붕괴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담겨져 있는 내용이나 창작과정의 기발함이 중요하다면 이제 형태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고, 색감이나 선 따위, 그러니까 보수적인 미술사가들이 지금까지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미술의 기본요소들은 ‘기본’에서 ‘부차’적 요소로 강등당한 상태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이 우리에게 ‘다른 눈’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박탈감을 느끼면서라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론 그들도 이미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피카소도, 마티스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알게 된 것들 중, 이건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데, ‘가치의 해체’ 혹은 ‘역전’은 오히려 우리가 미술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이러니이다. 미술은 분명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기성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라면 누구나 한 작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 (혹은 발견해내야만 한다.) 따라서 ‘평가’라는 것은 판단기준 중 하나, 즉 기껏해야 참고자료 정도일 뿐, 개인판단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지금까지 현대미술이 해온 작업이 바로 그거다.
그런데 ‘깊이에의 강요’라니! 나는 쥐스킨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그 신선함에 놀라곤 하나, 이번에는 그 사건의 ‘생생함’에 놀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신선한 소재라고 하면 <향수>에 버금갈 만한 것은 없을 테니까. 아, 이 단편집의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도 독특한 소재를 갖고 있다.)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특정한 비평이 나의 가슴을 걸레 짜듯 비틀어버렸다.
저와 같은 비평은 비평 속에 개인적 취향이 굳게 자리 잡아 있거나, 때론 말 못할 지적 권력이라든지 실제 미술계에 뿌리내린 관행의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을 때에 더욱 확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웬만한 양심적인 비평가들은 그들이 작품을 판단할 미적 가치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자살케 했던 비평가와 같은 적나라한 글은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마지막 비평을 읽고 못내 분개한 까닭은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뻔뻔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욕설 있는 악플이 좋다. 반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갖춘 듯 하고 호사한 언변으로 치장된 ‘악평’은, 만약 피해자가 그보다 나은 합리와 논리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면(그리고 대부분이 그런 경우인데), 피해자를 단순한 좌절이 아닌 ‘그녀의 선택(자살)’을 스스로가 계획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승리
누구나 공격적인 삶을 한 번은 꿈꿔볼 것이다. 고리타분한 것에 대항해서 “당신은 별로 재미가 없어!”라고 소리치고도 싶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소시민들이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나, 정의로운 영웅들이 나오는 히어로 무비들을 보면서 뭔가 대단한 것을 얻은 양 잰 채 해보기도 하고,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오히려 그것이 희열을 배가시키는데) 쥐스킨트의 <승리>에 나오는 구경꾼들처럼 젊은이가 무모한 체스를 두는 것을 감동적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저 늙은 체스꾼이 더 이상 체스를 두지 않기로 한 것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저 구경꾼들이 결국 젊은이의 패배로 끝난 이 체스판을 등지고 각자 저녁을 먹으러 돌아갔다는 것이다. 영웅이 죽어도, 혹은 우리가 영웅이라 여겼는데 실제 영웅은 아니었던 이가 죽어도, 일상은 남아 있다. 언제나 드라마이고, 언제나 혁명인 삶은 없다. 이 점이 우리가 ‘승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다.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이 단편은 <향수>의 느낌을 줬다.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기발한 착상에 거의 속아버릴 뻔 했을 즈음에 쥐스킨트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우리 몸이 늙을수록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이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조언들이 어느덧 나에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상한 세계를 보여줬다. 전 세계의 하늘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전 세계의 하늘을 관찰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자신이, 그러니까 장인 뮈사르가 여태껏 파온 땅에서 모두 조개화석이 나왔기에 전 지구가 조개화석으로 이뤄져 있다는 (이상한) 논리는 정말이지 사실인 것만 같았다.
“진실의 얼굴은 소름 끼치고, 메두사의 머리처럼 그것을 본 사람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이든 끊임없는 탐구의 결과이든 일단 그것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휴식과 위로가 없어도, 아무도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사실 누구나 알겠지만 이건 궤변이다. 저런 말은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을 유일무이의 진리로 선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은, 아니 적어도 두 세 번은 정말로 뮈사르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까닭에 나는 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과연 선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대학에서 조금 배웠으므로 세상의 진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대강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뉴턴에서 양자역학까지는 적어도 조금이나마 생생한 편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비록 중요하긴 하더라도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관절 나는 무슨 이유로 그것들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 내가 이런 지식들을 쌓아가는 동안 뇌의 반대편에는 지혜가 쌓여갔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란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선언이라 해도 좋다. 진리를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세상이고, 아예 입증하지 않고도 뭔가를 진리라 맹신하는 이들이 그보다 훨씬 많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소위 “되도 않는” 말 따위로 여겨진다면 뮈사르의 주장이 순도 100%의 거짓말일 가능성을 그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 “세상은 불로 이뤄져 있다.”라든지 “세상은 숫자로 이뤄져 있다.”라는, 철학사상 대단히 중요한 발견 중 몇 가지로 치부되는 선언의 ‘진리형상화’와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따라서 진지한 독자라면 모두 뮈사르의 말에 (이 단편은 정말 짧으므로) 잠시나마 주목하면서 솔깃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현명해서이다.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
지금껏 읽은 에세이 중에서 가장 시원한 글. 나는 분명 졸문인 이 리뷰를 얼마 안 가서 잊고 말 것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 서재에 꽂혀, 더러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내용을 짐작이라도 하느냐고 나를 쳐다보는데, 문제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음악의 멜로디나 회화의 색감은 얼마나 잘 기억나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