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17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8권]

 

 

  문장들은 확신에 차 있었고, 나는 읽는 내내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한 세기도 전에 계획한 감시체계의 일부가 지금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어 그에게서 예언자와 같은 느낌을 아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초상화 속 인상을 꼭 닮은 강한 글이 <파놉티콘>이라는 짧은 책 속에 압축되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도 파놉티콘 건설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두 뺨으로 눈물을 흘렸다. 평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그를 아는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탈감도 대단히 컸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엄격했던 그는 ‘교화가 가능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감옥을 통해 영국 사회에 큰 이득을 주려고 했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은 역으로 당시 사회가 변변치 못한 형벌개혁에 못마땅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벤담은 수감자들의 신체형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들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수감자들은 신체의 고통은 적은 엄격한 삶을 통해 교육받을 것이고, 감옥은 사회적 이득의 원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로 인해, 영국에서는 사업실패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후 파놉티콘은 조금씩 변형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숫자와 코드로만 이뤄져 있는 개개인의 인터넷 정보들이 거대회사나 정부에게 감시당하는 이른바 ‘수퍼파놉티콘’ 사회에 살고 있다.


  신건수氏가 옮긴 이 책 <파놉티콘>은 뒤몽의 도움으로 프랑스 국회에 제출된 것, 즉 벤담의 ‘프로포설’이기 때문에 자세한 계획보다는 파놉티콘의 효과와 기능, 그리고 벤담의 설득이 주를 이룬다. 반면 영국판에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판은 직설적인 어투로 이뤄져 있다. B6용지 약 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설득력은 대단히 높다.


  이 책의 구성은 대략 ‘파놉티콘의 장점’, ‘감옥의 3원칙’, ‘파놉티콘 관리의 10원칙’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신건수氏의 해제 <파놉티콘과 근대 유토피아>는 이 책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후대의 평가를 담고 있으므로 일독해야 하는 부분이다.

 

 

 

*    *    *

 

 

  파놉티콘 최고의 장점은 ‘감시’라는 통제에 있다. 감시는 직접적으로 신체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다. 대신 “범죄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책임자는 간수와 죄수를 감시하고, 간수는 죄수를 감시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수도 죄수를 감시해야 한다. “악을 고발하거나 공범자가 되어 고통을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벤담은 우리가 말하는 소위 ‘방관죄’나 ‘연좌제’ 등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그 어떤 죄악이 이를 피해갈 수 있겠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은 ‘도덕극장’이다. 어떻게 감옥이 도덕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벤담은 신체형이 적은 대신 생활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효율적인 감옥을 계획한다. 고통은 완화되고, 위안과 쾌락에 기초한 노동일과가 있으며, “감옥은 하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벤담의 ‘교육론’에 따라 독서, 글쓰기, 산수, 음악, 그림그리기 등이 실시되는데, 특히 산수는 노동에 이로운 교육이라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벤담이 이러한 감옥을 정부가 아닌 기업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공리주의자이다. 경제적인 효율을 중시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의 적(敵)은 공금횡령과 태만인데, 이는 사립·사설기업과의 계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공적정신은 느슨해진다.”라는 대목에서 그의 자유방임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계획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관리자들이 늘어나면 여러 조치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의견 불일치를 가져오며 관계자 사이의 길고 힘든 전투 후에 가장 강하고 고집불통인 사람만이 전장의 승리자로 남게 된다.”


  이렇듯 감옥이 계약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 1 관리원칙이다. (2원칙은 ‘성별격리’이고) 세 번째 원칙은 ‘격리’이다. “반만 썩은 것이 완전히 썩은 것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마 죄수들을 개개인별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담은 완전고립을 통해 반성이나 회개를 이룰 수 있느냐는 질문에 회의를 느꼈고, 그보다는 오히려 고립이 절망과 광기를 불러올 수 있음을 강조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영화 <쇼생크 탈출> 등 작중 인물들이 ‘독방’에 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벤담은 이 점을 이용, 아홉 번째 원칙에서는 ‘고립의 벌’로 악질의 죄수들을 공동체에서 잠시 격리시키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네 번째 원칙은 노동에 관한 것으로 노동이 위안과 쾌락을 준다는 점을 활용한 대목이고, 다섯 번째의 것은 조금 독특하다. 죄수들이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음식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음식의 질은 위에서 말한 ‘엄격성’의 원칙에 따라 빈민계층 이상의 수준이 되진 못한다. 여섯 번째는 의복에 관한 원칙인데, 새삼 기발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죄수들이 탈옥했을 때 “나는 죄수가 아닙니다.”라고 발뺌할 수 없도록 소매 길이가 각각 다른 옷을 입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이 각각 뙤약볕에 탄 길이가 다를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생과 건강에 관련된 일곱 번째 원칙은 “청결에 대한 세심한 정성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벤담의 생각에 기초한다. 야외운동기구로 오늘날 런닝머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트레밀’이 응용된 점이 흥미롭다. 한편 벤담은 수감자들의 취침시간을 7~8시간 이내로 고정해야 게으름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덟 번째 원칙은 교육과 주말의 활용에 관한 것으로 그가 교육방식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홉 번째 원칙은 징벌. 앞서 말한 ‘독방’이나 ‘연좌제’가 이에 해당한다. 연좌제는 만약 열 명이 있다면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에 대응되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매우 훌륭한 감시체계라고 생각했다. 석방준비와 관련된 열 번째 원칙에서 그는 교화된 죄수를 육·해군에 복무시키고 식민지로 이주할 기회를 주는 방법, 석방된 수감자를 책임질 보증인을 구하는 방법 등을 제시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석방대상자는 처벌기간을 연장해 거의 수도원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보조시설에 수용하는 방법도 있다.

 

 

 

*   *   *

 


  벤담 이전의 형벌체계는 주먹구구식이었다. 국내 감옥들이 수용한계에 시달리면 정부는 죄수들을 식민지로 보냈다.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 이송된 죄수들은 사실 그 나라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일파만파 전염되는 악영향이 있었다. 호주의 경우에는 80여 년간 이송된 죄수의 수만 해도 13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를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봐서 “왜 감옥들에 죄수가 많아졌는가?”를 물어볼 수도 있다. 이 책의 해제에는 그 배경이 소개되어 있다. 간략히 말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예전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행위들이 ‘경범죄’라는 죄목 하에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용되면 간수들이 교육해야 하는 것은 노동의 가치나 경제질서 같은 것이었으며, 엄밀히 말해 중범죄자들에게 부여되는 ‘도덕함양의 의무’ 같은 것은 해당되는 사례가 드물었다. 이 점이 바로 벤담이 말한 ‘감옥의 학교화’에 해당할 것이다.


  신건수氏의 해제에는 푸코의 파놉티콘 분석이 있어 더불어 읽어보기 좋다. 푸코의 사상을 알거나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를 읽어본 이라면 벤담의 파놉티콘 속에 들어 있는 근대권력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작용’되고 ‘생산’되는 것이라는 구절은, 푸코를 모르는 이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소설 <1984>, 학교의 운동장, CCTV. 우리는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통제의 사회’에 살고 있다. “Sees all.”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과 같은 중앙감시자, 혹은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와 같은 존재가 없는 대신, 감시의 그물망이 분산되어 있는 현대사회. 우리는 사실 감시되길 원치 않으나, 정보를 제공하면 혜택을 주겠다는 여러 기업들의 상술에 기꺼이 “넘어가며”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는 역설적인 현대인. 하지만 역으로 다수가 1인을 감시할 수 있어 권력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이른바 ‘시놉티콘’이라는 현대정치의 형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고전(古典)으로 치부되는 <파놉티콘>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파놉티콘’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