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1
채만식 지음, 이주형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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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가 우리나라에서 ‘미술특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적이 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사이먼 특유의 명쾌하면서도 감성적인 해설을 본 사람들은 근래 보기 드문 ‘미술비평의 수작’이 출현했음을 반가워했을 것이다.


  나는 마크 로스코 편을 유독 기억한다. 그 편에서 사이먼은 초두부터 이런 질문을 툭 던져놓는다. 누군가는 그걸 우문이라고도 하겠다.

 

  “예술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사이먼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본다. 혹시 우리가 그런 질문을 보통에는 쉽게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가 예술의 등받이에 올라 세상을 한 바퀴 휘 둘러볼 때면 그 크기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본래 인간이 그 크기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거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곁에 두고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예술을 대할 때에는 그것으로부터 받는 느낌이라도 간소하게나마 정리해야 나중에 가서 저런 질문을 받았을 경우 자신의 사변을 미지의 호수에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하루 한 번 딱 보고 마는 것도 어리석인 짓이겠거니와. 그렇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묻고자 했다. <태평천하>. 말만 그러한 제목. 실은 빈껍데기일 뿐인 저 제목. 채만식(蔡萬植)의 이 소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문학이 전쟁을 끝냈다는 이야기는, 나는 듣지 못했다. 혹 수소문하여 누군가에게 소식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비근한 사례가 아닐 것임을 거의 확신한다. 새삼 흔히들 드는 명언이지만 - 누가 그랬더라? -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했더니, 웬걸 우리의 식민지 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종결되었을 뿐, 내로라하는 문사들의 연재소설들은 시대를 바꾸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그걸 “읽은 사람”이 제대로 된 생각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서 통속소설이 그렇게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대의 카프도 실패하고, 도대체 무엇이 이 땅에서 문학의 후임이 되겠느냐 했었을 때, 채만식의 <태평천하>로 대표되는 그것이 득세했으니, 그것이 바로 풍자소설이다. 풍자는 소살(笑殺), 말 그대로 “웃고 마는 것”이다. 그냥 만다. 그러고 만다. 이 땅에는 윤직원 영감 같은 이들이 수두룩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리얼리티는 그래서 쓴 맛이 난다. 지금 우리가 읽기에도 그러한데, 그걸 쓴 채만식의 속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기막힌 표현이 많아 웃고 또 웃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뭔가 자윌 해보자면 나는 채만식이 말하고자 한 바를 꼭꼭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버스에서, 강의실에서, 침대에서 나는 - 옛 어휘들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마는 - 돈 한 푼 아끼려는 만석꾼 윤직원 영감 흉내도 내가면서, 종수 흉내도 내가면서 도박하는 양 어투도 조금씩 바꿔가면서, 태식이 따라 천치인 듯도 해보고, 그걸 쥐어박고 싶은 경손이도 흉내내보고, 하여튼 요리조리 돌려가며 재밌게도 읽었던 것이다. 그 때에 이런 소설을 - 도대체 ‘그 때’가 뭔지 나는 당최 모르겠지만 - 쓴 채만식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서 오고가는 실랑이나 천태만상의 하나하나가 귀여워도 보이고, 사람더러 셰퍼드 같다고 한 구절도 그렇고, 혹은 서울아씨와 대복이 사이의 그렇고 그런 감정을 보고 “호르몬 분비의 명령인 한 개의 커다란 필연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던 것”이라 꾸민 구절도 그렇고, 속속들이 이 소설에는 재미가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었다.


  다 못난 사람들이다. “저게 가족인가?” 싶기도 하면서 슬며시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것이 저 꼴이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 한 것은, 한편으로는 저런 집이 한 두 가옥이었겠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강점기의 급변하는 사상이나 환경 속에서 거의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을, 그렇다, 그때 생각해보면 살짝 그걸 비꼬아놓은 채만식의 솜씨에서 애긍한 감이 올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수부귀다남자’라 하면 뭘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말이다.


  종학이가 사회주의에, 윤직원 영감이 부랑당패라고 맹비난하며 오히려 강력한 일본제국을 칭찬하게 된 그 배경인 사회주의에 빠져 갑작스럽게 소설은 이 노인네의 울부짖음으로 끝맺는다. 그의 절규는 사뭇 복합적이다. 뜻을 헤아리면서 읽다보면 그 어떤 구절들보다도 독자의 미간에 긴장을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나는 느꼈다.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고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윤직원 영감의 발광이다. 종학에게 줄 돈은 사라지고, 이 손자는 삽시간에 ‘죽일 놈’이 된다. 가솔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영감은 퇴장했어도 몸 둘 바를 모른다. 나라든 가솔이든, 그걸 말아먹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그런 바로는 진시황이 윤직원 영감보다는 행복하다는 채만식의 평에서는 망해가는 역사가 보인다. 망국(亡國)을 하여도 망가(亡家)는 하지 않겠노라고 돈을 붙잡고 고집부리는 저 만석꾼도 그렇고, 그 밑 사람들도 도통 시대의식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다 망했다.


  채만식은 독자들을 웃기고, 그 웃음은 독자들을 달래어준다. 한판 크게 웃고 나면 뭔가 살아갈 힘이라도 나는 것이 이치인 것을, 그러나 아홉 달 간 《조광》에 연재된 이 소설이 풍자한 세계의 그 사람들은 조금씩이라도 움돋았을 그 힘을 어떻게 쓰고자 했을까. 이렇게 묻는다. “보소, 당신 잘못 살고 있소. 거 망해가는 꼬라지의 땅에서 그렇게 히히 헤헤 웃고 있으면 하늘에서 태평천하라도 떨어진단 말이오?” 그러나 웃을 뿐, 답이 없다. 이런 시대의 탈출구는 문학이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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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리뷰의 리뷰

 

 

#1.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는 시를, 나는 두고두고 읽는다. 2011년의 회고에 대한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채로 두고 싶다. 무지의 초심으로 시어와 문장이 주는 향기를 음미하다보면 - 배 두둑이 채운 어느 봄날의 나른함 속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와 저도 모르게 꿀잠에 드는 것처럼, 바로 그렇다. - 무지가 나을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거다. 앞뒤 잘라 써본다.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돈’과 ‘잠자리’의 이미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처절하다. 잠자리가 돈을 깨뜨린 뒤, 그 돈의 파편들이 잠자리를 깨뜨리는 광경이다. 그건 그녀의 말마따나 일종의 울음이나 비명이다. 이 질문은 나의 눈에 생채기를 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눈물이 볼 위에 낸 흔적을 손바닥으로 비벼 지웠다.


  돈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근래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를 읽고 있는데, 한 구절이 인상 깊었다. “외환위기 때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많은 이를 자살하게 한 것은, 경제적 환란 자체가 아니라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다.(pg.59)”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돈이 관여하지 않는 비밀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정원에 어떤 꽃을 심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의 추적자들이, 혹은 스파이들이 정원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들이 정원의 꽃들을 모두 뽑아가려고 난동을 부리더라도, 혹은 그리하여 우리가 만석꾼에서 가난뱅이로 떨어지더라도, 손에 움켜쥐고 끝까지 놔주지 않을 꽃을 한 줌 정도는 가슴 속에 미리 정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이다. 결제하기 전에 합계액을 보고 ‘헉’하며 놀라곤 하지만 <톨스토이 단편선>이 정말 8,500원의 ‘값’을 할까. <그림과 눈물>은 정말 15,000원의 ‘생각’을 담고 있을까. 정량 공리주의를 못 미더워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걸 사치라고 하면 '좀' 그렇다. 비밀의 정원이 서울광장 한복판에 공개된 느낌이리라. 좀 더 비밀스럽게, 나는 책이다.

 

 

 

#2.
  말미에 접어드는 여름. 많은 책을 읽겠노라고 스스로에게 공언까지 한 탓에, 순전히 양으로만 따지자면 만족의 발치를 기웃거릴 정도의 독서량이었다. 야심차게 나는 파농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밀의 <공리주의>를 읽고, 다시 한 번 <자유론>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수포로 돌아갔다. 세 번째 수포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스마일 카다레,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하인리히 뵐, …, 이하생략.


  그러나 읽은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힘이 나고 좋다. 무엇이 인상적이었는가를 회고하는 것이 ‘독서건강’에도 좋을 것 같으니, 눈을 과거로 몇 번 던져본다. 뭐가 기억에 남을까.

 

 

 

#3.
  지난 학기 중에 읽은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을 정리하는 것으로 방학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논픽션 11선과 픽션 11선을 나름 선정하여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득하게 바라봤지만 이차저차 흐지부지되었고, 리뷰 올리지 않은 책과 소설책을 빼고 11선만 리뷰하기에도 사실 벅찼다. 불타는 머리로 난삽하게 정리하고, 그걸 재단하여 글로 뽑아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누에의 일’이 아닌가 말이다.

 

 

 

 

 

 

 

 

 

 

 

 

 

 

 

 

  <권태>는 제 나름의 힘을 가진 권태의 양상에 대한 책이다. 역사를 쫓아가는 재미도 있고,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권태도 분석한다. “권태는 그저 권태일뿐이다.”라는 구절과 그것의 치료법 - 이미 다 알고 있는 ‘활동들’ - 이 이 책을 용두사미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권태’이다. 밤안개처럼 슬며시 찾아와서는 우리에게 제 모습의 스산함을 보여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어느새 살그머니 떠난다.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어딜 읽어도 처음 같고, 마지막 같다.


  <진단명 사이코패스>의 요는 “잘 대처하자.”라는 건데, 사실 그보다는 분석사례가 주는 인상이 더 짙다. 역자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현장조사는 서양에 뒤진 편이다. 차라리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저 인상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마치 추(醜)처럼 우리 주변에 있으나 바라보는 것이 꺼려지는, - 움베르토 에코가 강조하듯이 - 그러나 결국 바라보게 되는 사회의 어떤 면을 이 책은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CSI나 NCIS, 크리미널 마인드 등 ‘미드수사물’을 즐겨보는 이들에게 <진단명 사이코패스>는 저 텍스트들의 실제 콘텍스트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로도 커다란 충격을 줄 것이다.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는 전형적인 ‘정리책’이다. 문장 구절 하나하나가 특별한 감흥을 주진 않는다. 그 점으로만 본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주제이다. 죽음이다. 기준점을, 혹은 한 축을 중심으로 ‘생’에의 정확한 대칭점을 이루는 것. 아니, 정정해야겠다. 이 책은 ‘정확한 대칭점’으로서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건 “살아 있는 죽음”이다. 물론 이 책 하나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세분화시키거나 고정시키진 않는다. 별다른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그건 이 책 탓이 아니다. 그 어떤 책도,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체로의 공포 속에서 우리에게 아주 사사로이 다가오지 않던가.

 

 

 

 


 

 

 

 

 

 

 

 

 

 

 

 

  <다윈 지능>에서는 지식도 배웠고, 시각도 배웠고, 간결함도 배웠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그러나 너무 한 문장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닌 독서는 아무 책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를 나는 도킨스나 바전, 곰브리치 등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재천氏를 목록에 넣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진화론의 역사와 이론을 쉽고 재밌게 배운 것만큼의 행복을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 <이타적 유전자>, <조상이야기>, - 분야는 조금 달라도 - <엘리건트 유니버스> 등 비싼 책들도 최재천氏가 내게 던져준 호기심 덕분(?)에 서재에 두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번 여름에 내가 건진 대어였다. 소설 좀 사서 읽겠다고 한 출판사의 책을 시리즈로 몇 권 샀는데, 값이 싸다는 이유로 - 또 하나는 밀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 한 바구니 속에 넣어 서재에 꽂아뒀었다. 더위 탓에 하도 책이 안 읽히기에 “어디 얇은 책 하나 없나?”는 심보로 이리저리 둘러대다가 꺼내 단숨에 읽은 책이다. 명료하고 강했다. 내가 초상화로 알고 있는 벤담의 이미지와 꼭 닮은 글이었다. 이론이라기보다는 프로포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는 챕터별 정리를 짜깁기해서 이 공간에 리뷰로 다뤄봤는데, 짜깁기인 만큼 전체적인 이해는 아직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롤스, 샌델에 이르는 철학사의 ‘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자칫 위험한 독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류의 책이다. 발췌독이나 검색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하루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단숨에 읽고, 리뷰를 4~5시간 정도 적어봤는데, 그만큼의 ‘임팩트’가 있다. 일단 문제를 진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각 비평가들의 솜씨도 솜씨이거니와 하나의 텍스트가 한 국가의 독서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는 부득이하게 읽어야겠지만 -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이유>, 새삼 긍정의 필요성을 알게 된 책이다. 구달의 섬세하면서도 솔직한 태도가 읽는 내내 강한 확신을 줬다. “그녀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얻게 된 유일한 인상이다. 이 인상은 책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다. 아니, 가장 강한 인상이라고 해도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이 유사하게나마 체험하게 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다.


  물론 혹자들은 그녀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한다고 구달을 저평가할 수도 있다. 나도 그녀의 주장 중 채식주의나 실험동물보호 등이 - 나도 모르게 이때 나는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렸는데, 아마 대다수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런 양가성이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 우리에게 과연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의심을 했었다. 그녀의 실천을 공론화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 ‘다원화된 사회’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놓쳐버리고 후에야 깨닫는 것은, 그녀와 같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의 희망전달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엄청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래,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매번 뉘우치며 돌아올 수 있는 원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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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3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가을에도 이런 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개강축하해요, 탕기님.
ㅋㅋㅋ

탕기 2012-09-01 10:59   좋아요 0 | URL
아...ㅠㅠ 개강이에요, 아이리님.
그래도 학기 중에 꾸준히 읽을 책들 정해놨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읽어야죠^^
가을도 파이팅해요!
 
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26

 

 

  곧 개강이다. 나는 방학의 마지막 책을 고르고 있었다. 책꽂이를 훑어보면서 나는 되도록 얇은 책을 손에 쥐려고 했다. 개강 전날인 내일은 책 읽을 정신이 아닐 듯했다. 토요일을 틈타 유종의 미를 짧게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겉표지의, 한편으로는 새삼스럽기도 한 제목의 책을 집었다. 10년이 넘으면 속지가 누렇게 변하는가보다. 1판 1쇄, 2000년 발행.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런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책에 끌린 것은, 예삿일은 분명 아니었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두 장 선 채로 천천히 읽다가, 오전과는 딴판으로 더웠던 오후의 변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방바닥에 오래된 치즈조각마냥 찰싹 붙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베개를 책상 삼아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픈 구절들이 많아 이면지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방학 중에 읽고 리뷰를 쓴 책이나, 리뷰 없이 메모만 적어둔 책들을 통틀어서 이 책을 나는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그 편안함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전의 경험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를 읽었다.

 

 

*   *   *

 

 

  이 책은 말 그대로 그녀가 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가를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밝힌 책이다. 그녀의 경험들 속에는 열정과 헌신의 이유가 솔직하게 적혀 있고, 독자들은 왜 그녀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인 구달’이라는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는지 차츰차츰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영적 평화’라는 개념 - 그녀는 이 책에서 항상 그것이 특정 종교의 해석이 되지 않게끔 주의하는데 - 은 자연과 그녀 사이를 이어주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건, 아마 누구나 체감할 수 있겠지만, 그 이해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어린 시절, 제인의 인격을 만든 여러 가지 추억들을 나열해보면 그녀가 어떤 인물이 될 소녀였는지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목사 집안인 외가, 타잔과 <정글북>을 좋아하는 소녀, 대자연에 대한 시를 종종 쓰던 소녀,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 종교에 대한 회의와 한 목사에의 동경, 성서 독해, 폐허가 된 쾰른 방문, 신지학,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아프리카 방문과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와의 만남,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


  그녀가 케냐 캐슬호를 타고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케냐의 몸바사까지 가는 긴 항로 - 원래 수에즈 운하를 지날 계획이었는데, 당시 이집트 전쟁으로 운하가 봉쇄되었다. - 에서 바다의 위대함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낭만을 꿈꾼 것이 아마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반복해서 회고하듯 홀로코스트나 차별, 박해 등은 그녀가 훗날 침팬지를 연구하며 갖게 된 인류에의 희망이 나온 검은 웅덩이, 악의 원천이었다.


  책의 104쪽에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는 침팬지 사진은 지금은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곰베에서 찍은 사진인데, 침팬지의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제인은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최초로 보고한 학자였으나,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녀가 연구원의 신분으로 제출한 보고서는 곧바로 회의론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에게 침팬지 연구를 권유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발견을 두고 인류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놀라워했으나, 다윈의 연구가 그러했듯이 제인의 연구 역시 지성인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생소하고도 다소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례보고였다. 1970년대의 이 해프닝은 ‘악의 뿌리’라는 장에서 상세하게 다뤄졌으니,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주류과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 사실 그녀는 흰 옷을 입은 과학자들을 한동안 ‘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 그녀의 ‘감정이입’이 된 연구는 과학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지적 연습이 경이의 일부를 훼손시킨다.”며, 이 ‘경이’야말로 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다. 나는 이 생각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반려동물과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이라면 제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들을 가족이라 느끼고, 어느덧 ‘동물 취급’하지 않는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인이 ‘고대의 언어’라 말한, 말없이 눈과 마음, 그러니까 영적으로 서로 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지금 과학이 중시하는 그녀의 발견은 바로 과학이 배척했던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오랜 연구가 진행되던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는 결혼에서 이혼으로, 곰베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여자에서 어머니로 그녀의 삶이 뒤흔들리던 때였고, 그녀의 글들로 미뤄보건대 내 생각에 그때 그녀는 어떤 책임의식에 대한 통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의식들은 이 한 문장으로 모아진다.

  “확실히 인간 종 -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와는 상관없이 - 의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그 존재의 지속이 위협받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pg.134)


  인간을 신이 만들었든 그렇지 않았든, 혹 누군가가 신의 여부를 믿든 안 믿든, 작금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자명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녀의 희망의 한 축을 담당한다. 맺는 글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장에서도 그녀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의 세태가 어떻다고 생각한 것일까? ‘전쟁의 전조’는 그에 대한 그녀의 간결하고도 명백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것은 ‘문화적 종분화’라는 개념이다. 그녀는 그렇게 부르나, 대체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라고 하는 이 개념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구별하는 (집단)이기주의이다. 그녀는 오랜 연구 끝에 침팬지의 사회에도 그러한 분화의 전조가 있었다며, 그런 전조는 대개 두 집단으로 나눠진 사회에서 발견되었고, 두 집단 사이에서는 충격적인 공방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의 공격은 단순한 차원이었다. 그녀는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며, 인간의 문화적 종분화는 인간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세계평화의 장벽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집단이기주의, 혹 그러한 ‘이기성’은 도킨스가 써서 큰 파장을 일으킨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것처럼 인간 본연의 이기적 특성에서 나온다. 제인도 그에 동의하는 편인데, 사실 그보다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한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그녀는 도킨스보다는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 쪽이다. 그렇다고 도킨스를 ‘이기주의 지지자’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는 순자와 닮았다. 원래 악하니 도덕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가 유행할 때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타성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행동목적은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것에 있어야 하고, 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 본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서, 그리고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머금고 봤던 그러한 연민, 사랑, 희생들. 이타주의, 측은지심, 의식적인 결정, 영웅적인 행동 등등.


  그리하여 사실 독자들이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장 중 하나는 ‘도덕적 진화’라는 장이다. 나 역시 이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제인은 ‘르콩트 뒤뉴와’라는 의사 출신 철학자의 1937년 저서 <인간의 운명>을 보고 큰 울림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 책에서 르콩트는 인간의 역사를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으로 봤다. 그렇다면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제인은 침팬지들에게는 정의가 곧 힘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면서 19세기 후반의 빈약했던 인권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성취된 인권은 얼마나 높은가를 반추한다. 이 잠재력에 대한 긍정.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확신했다.


  희망을 키워가는 한 방법으로 그녀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라는 장에서 동물보호를 예로 든다. 물론 독자들은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이든 간에 그녀의 말대로 인간의 ‘유일무이성’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오만함을 줄이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한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바야흐로 진정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녀도 낙관이 힘들 때가 있다고 토로한다. 시간의 문제임도 시인했다. 비관은 아주 쉽게 전이되는 특성이 있고, 또한 다수에게 별 어려움 없이 수용된다. 세태가 그렇다. 그러나 원론적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녀의 ‘희망의 이유 네 가지’는 곱씹어봐야 한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 정신. 이에 회의론이 곧바로 질문할 것이다. 그녀가 주장한 동물실험금지, 채식주의 등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이는 내가 <엔트로피>를 읽으며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을 ‘황당하고 대범하며, 결국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기억하고 있는 이유와 닿아 있는 회의일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의도는 우리에게 영감와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대부분이 대의민주주의의 국가인 이 지구공동체에서 현실은 당연히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열정은 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통로인 것이다.

 

 

*   *   *

 

 

  나는 독서를 마치고 잠시 유투브에서 그녀의 동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영어는 짧지만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종종 TED나 FORA.tv의 강의·회의 영상들을 다운받아 챙겨보는데, 내가 기억하는 제인은 매기 스미스와 닮았다. 영화 <해리포터>의 미네르바 맥고나걸 교수 역을 맡았던 그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제인은 모두 영국 사람이고 1934년 생으로 나이도 같다! 여하튼 내가 본 그녀의 강의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녀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 강연이다. 제인은 많은 미국대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특히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그러한데, 나는 슬프고도 화가 납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넘어서’라는 장에서 소개한 그녀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방문기를 떠올렸다. 타협은 무감각이다. 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보여주면 열정은 검은 웅덩이에서 탈출해 각자의 태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섯 마리의 왜가리’라는 그녀의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봤다. 이 시에서 그녀는 왜가리들이 바다와 구름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시간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황진이처럼, 고이 접어뒀다가 후에 적막이 자신을 엄습할 때에 펼쳐보겠다고 다짐한다. 시가 아주 와 닿았다. 그녀가 용기를 얻기 위해 처칠의 명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처럼 나도 이 시의 제목을 어딘가에 적어두고 적막과 회의가 찾아올 때마다 들춰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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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25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1권]

 

 

  가다머는 <과학 시대의 이성>이라는 저서에서 “정신적 객관화로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재인식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객관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과학과 수학일 것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그것은 철학처럼 언어와 말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기호와 서술의 자동화로 이뤄져 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과학과 수학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들은 가다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거의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가다머가 설명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그의 말은 “철학하자.”는 주장이다. 열심히 사유하는 삶을 통해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자기운동’으로 철학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수한 철학자의 논의를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도 한다.


  그가 과학지상주의를 겨냥한 듯 철학의 전면에 나서 그것을 호위하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그의 저 대목에서 - 어려우니 문장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고민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철학의 묘미랄까? - “과연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가다머가 철학의 반대편에 세운 건 실증과학(Wissenschaft)이다. 이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과학’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과학, 즉 ‘자연과학’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그와 더불어 역사학, 언어학, 기하학도 있다. 부분이 전체를 반영한다는 논리로, 나는 “자연과학으로부터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철학(사유)이 결정적인 지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결정적인 동기는 최재천의 <다윈지능>이었다.


  진화론과 유전자학에 따르면 -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 우리는 유전자 정보가 시키는 대로 사는 존재이다. 반대의견이 바로 뒤따를 것이다. 본능의 억제, 인류의 지적 유산, 형성된 인간의 문화 등등. 우리가 이룩하고 바라는 것이 반드시 유전자 정보대로 전개되는가? 이것은 유전자 정보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훨씬 우세하다고 믿는 일종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감성적 방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유가 DNA보다 더 우월한 것인지도, 실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매트 리들리의 <게놈>을 읽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인격 형성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철학자, 용병, 창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란 속설이 있다. 그러나 DNA가 그에 선행한다.


  나의 궁금증을 스스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를 읽어가며 계속되었는데, 사실 그냥 계속된 것이 아니라 훨씬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부터 ‘두 과학자’의 갈라파고스 연구에 이르는 진화론의 ‘전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이 책은 최재천의 추천사처럼 일반 사람도 읽을 수 있는 난이도로 쓰인 책이다. 대중적 과학저술을 생각하는 저자라면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금 말한 ‘두 과학자’는 그랜트 부부를 일컫는다. 남편 피터와 아내 로즈메리는 지금 프린스턴 대학교에 재직 중에 있는 생태학자이며, 진화론의 실측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둘은 갈라파고스에서 무려 20여 년을 보내며 ‘핀치(Finch)’라는 새를 연구했다. 그들의 방대한 연구가 겨냥한 초점 중 주된 것은 바로 책 제목처럼 부리이다. 분명한 것은 “새의 부리가 뭐 대수야?”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읽어가며 깊은 자기반성과 함께 놀라운 지적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다윈의 논리적 ‘믿음’을 밝혀나간다. “종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일종의 ‘성서(聖書)적 질문’이 “우리는 종을 믿어야 한다.”라든지 “종은 신이 만들었다.”와 같은 종교적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진화론의 특징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밝혀지지 않으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과거의 진화론자들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범죄자(일 것 같은 사람)에게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마치 ‘명탐정 코난’처럼 통쾌하게 선언하지 못하는 형사와 같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다윈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지 못해 못내 찜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밝혀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종의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밝혀졌다. 믿음이라는 건초더미에 불이 떨어졌고, 최근에는 진화의 종교적 해석인 지적 설계론이 등장했다. 사실 존 브록만의 <엣지>에 투고되는 학자들의 글만 봐도 그건 학문적으로 논할 만한 가치가 없는 ‘론(論)’이긴 하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다윈, 헉슬리 등 옛 인물들, 그랜트 부부, 그리고 갈라파고스 연구와 진화론에 관련된 학자들의 담화와 책의 구절들을 빌려오면서 진화론의 기본개념들을 인상적으로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설과 같은 구절들에서는 마치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것 같은 놀라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도 있다.


  가령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진화론에는 자연선택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과거에 분화된 종이 하나로 뭉치게 된다는 개념이 있다. 최재천은 이를 그의 <다윈지능>에서 “달라야 산다.”고 표현했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A라는 바이러스는 B1이라는 생물군에 치명적이라고 해보자. B1의 개체들은 A 바이러스를 피해서 B2와 B3로 분화했다. 분화하게 된 것은 외압(스트레스) 때문이다. 이 경우 B1은 B2, B3로 분화하면서 ‘B’라는 자신의 종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B2와 B3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다른 바이러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으로 멸종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만약 B1이 분화하지 않고 버티면 -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 A 바이러스는 언젠가 B1의 멸종을 불러올 것이다. B1의 실패는 곧 B 전체의 실패가 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를 다른 외압으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는 “왜 우리가 등장했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에 대해 명백한 검증을 거친 과학적 개념으로 답할 수 있다.


  “핀치의 부리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강한 선택압은 이 모든 부리가 사라지지 않게 지키기도 한다. 다윈의 과정은 하나에서 다수를 창조했으며, 다윈의 과정은 심지어 지금도 창조활동 중에 있다. 만일 자연선택이 각 섬에서 각 세대에 계속 힘들게 작용하지 않았다면, 다수는 금방 다시 하나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pg.278)


  이것이 진화론이 ‘적응방산’이라고 부르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는 찢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진화와 멸종, 변이가 실제 지구 역사의 전부인 까닭이다. 자연선택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정말 눈물도 피도 없는 냉정한 신이다. 그래서 조너던은 그것을 “창조와 파괴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중재자”라고 불렀다.


  내가 진화론을 조금씩 배워가며 느끼게 된 것은 그것이 현대과학의 열역학과 닮았다는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 아니면 거의 확인할 수 없어서 우리가 도통 모르고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둘의 닮은 점이다. 자연을 보다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도구와 시스템이 개발된 현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개념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건 정말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다행이도 열역학의 법칙들보다 진화론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확인이 가능하다. 열역학 법칙을 확인한답시고 우리가 ‘닫힌계’나 ‘열린계’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반면 최재천이 누차 강조한 것처럼 진화론은 나방의 날개무늬, 같은 종 나무의 지역별 잎사귀 차이 같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생태학자들이 지금까지 진화론과 연관해 진행한 유례없는 방대한 작업이 바로 이러한 ‘실측’이다.


  다윈은 최근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인공선택, 쉽게 말하자면 사육을 근거로 “자연선택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유추를 했다. 여기서 진화론의 근거가 나온 것이다. 그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간 이유는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핀치의 부리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체류기간은 단 5주. 핀치 표본도 겨우 31마리. 또한 핀치연구는 다윈의 감정의뢰를 받은 조류학자 존 굴드가 했고, 그가 핀치 표본을 연구한 후 1837년 1월 10일, “31마리는 12종으로 나뉘며 모두 ‘전적으로’ 새로운 종”이라고 발표한 기사가 뜬 이후에야 유명해졌다. 다윈의 진화론은 본래 ‘선험적 가설’이었지, 엄밀히 말해서 ‘과학’이라 하기에는 전혀 관찰된 바가 없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계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측의 세력은 강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은 종교인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었다. “어떻게? 왜?”에 대한 질문의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다.”라며 배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자연선택과 변이. 이 두 개념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북한산에 올라 의정부 방향의 도봉산, 서울의 은평구, 그리고 송추계곡을 한 눈에 파노라마로 담고 있으면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때 우리가 느끼는 위대함의 바탕에는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어 있는 자연’이 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긴 힘들다. 책장의 책들을 가지런히 꽂혀 있고, 신발들은 신발장 속에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자고 나면 이불을 개고, 더러운 빨래는 세탁한 후에 다림질을 한다. 정리하는 것이 일상인 인간에게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낯선 것이다. 진화생물학의 ‘혜성’이라 불린다는 돌프 슐레터의 말이다.


  “당신은 종이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요동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종은 여러 해에 걸쳐 보면 안정되어 보이죠. 하지만 실제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당신의 생각처럼 안정된 것이 아니랍니다!”


  물리학이 발견한 모든 법칙들이 전 우주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놀라운 원리를 비롯해서 진화론은 물론이고 과학은 우리에게 앞서 말한 가다머의 정의대로 ‘기호와 서술’로 이뤄진 연구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삼라만상의 비밀을 조금씩 눈앞에 펼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비밀을 푸는 코드는 물론이고, 그 방법까지도 과학은 종교와 다르다. <핀치의 부리>에 있는 챕터 중 ‘보이지 않는 문자들’은 DNA를 의미하고, 물리학에서는 우주를 숫자와 기호로 푼다. 실제 그들이 우주를 관찰하겠다고 쏘아올린 보이저호, 그리고 지구를 빙빙 돌고 있는 허블 망원경은 인류가 구사할 수 있는 숫자와 기호의 상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과학과 종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이 설명하는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난해하고, 과학은 너무 어렵다.


  나의 첫 질문이 혹 과학지상주의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으나, <핀치의 부리>를 읽으며 나는 과학적 연구와 이해들이 인간을 타락시켜온 작금의 상황을 사실 ‘과학적 연구와 이해’에게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타락은 도덕의 결여일 뿐이다. 도덕이 과학적 이해와 다름은 명백하다. 과학이 밝힌 바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자연은 우리에게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알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학이 밝혀오고 알아가려는 바가 과학지상주의와 반드시 연결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핀치의 부리>가 아마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가장 인상 깊은 책으로, 나에게는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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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2012.08.22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0권]

 

 

  이 책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라 표기)>에 대한 11인의 심도 있는 비평을 담고 있다. 샌델의 논의들 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부분들은 직접 인용한 저자가 많고, <정의>의 주요 논점들이 적절히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샌델의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의 경우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심도 있는 비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의 인내를 바란다. 이면지에 낙서를 해가며 하루를 꼬박 쏟아 부어 진득하게 읽긴 했지만, 리뷰를 적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지금 생각해보니 어딘가 체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는 <정의>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그처럼 쉬우면 쉽지 그보다 어렵진 않을 것이다.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다. 문제에 대한 공감의식이 대안모색의 첫걸음이다. 이 책은 ‘샌델’이라는 시대의 화두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 중요한 계기에 대한 시의적절한 탐색이므로 11인의 발언은 ‘샌델 다음’을 고민하려는 세대들에게 신기 좋은 운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리뷰가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것도, 몇 안 되는 리뷰어들에게 미리 알려야겠다. 지면이 난삽하면 안 되니 이현우氏의 비평글까지만 고스란히 옮기고, 이어지는 비평문들은 모두 '접은 글'로 처리하고자 한다.

 

 

1. 정의 없는 사회는 왜 정의를 욕망하는가? (이택광氏)
  이택광氏가 대표로 포문을 연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샌델의 <정의>가 선진국 담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정치집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도 한 몫 한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크게 실망하고 있는 건 작금의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박가분氏의 ‘붉은 서재’에서 바디우에 관한 그의 입문서를 읽다가 (얄팍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바가 있어) 문득 지젝이 떠올라 그에게 대중운동의 단편성(이건 지젝의 진단)과 ‘사유의 힘(이건 바디우의 개념)’의 부족을 연관해 생각하던 중 “이 시대 대중운동들이 너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라 힘을 못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절반만 동의한다면서 나머지 ‘절반’을 동의하지 못하는 까닭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봤다. 뭘 주장하든 의회를 통과해야 (내가 쉽게 이해한 바로는) ‘씨알’이 먹힌다는 뜻이다. 운동의 성공은 결국 ‘대의(代議)’의 문을 통과했느냐 못했느냐의 여부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는 그 후 오랜 동안 그의 생각대로 대의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경험도 했다. 투표가 극명한 예이다. 소위 “찍고 싶은 사람 없어도 차선으로 찍어야 하는”, 한 유명 드라마의 대사대로라면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골라내는 것이 투표”가 되는 현실은 아무래도 보다 면밀히 심문해볼 필요가 있는 죄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대안을 찾아보는 것이 나의 역량으로는 힘들었던 차에 마침 ‘환경윤리’라는 테마의 교양강의에서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대안(여러 의결주의들)들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래서 나는 기말평가 답안지에 그것들을 우리가 정말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는 뉘앙스와 함께 약간의 희망을 적어냈다. 아무래도 ‘다양성’이라는 것이 이 면에서는 큰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택광氏는 “포기할 수 없는 개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표”인 정의, 그리고 “개인을 인내하게 만드는” 대의민주주의를 각각 진단한다. 둘 사이에는 겉보기에도 척력이 있다. 진정한 정의가 수용될 공간이 한국 사회에 마련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그 상태에서 <정의>가 유행한 것일까? 그보다는 ‘정의없음’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택광氏의 주장이다.

 

 

 

2.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 (장정일氏)
  매우 간략하고 직접적인 글로 장정일氏는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 자체로 <정의>는 반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에서 샌델이 설명한 것처럼 롤스의 <정의론>은 법의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정말 중립적인지는 - 나는 법 전공자가 아니므로 다른 이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데 - 잘 모르겠으나, 장정일氏의 주장대로 법이 고착적, 집권적, 지배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에 비해 정의의 모습은 훨씬 동적이다. “정의가 움직일 때 법은 패퇴하게 되어 있다.”는 그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건 정의이다. 정의가 법에게 위탁되면 정의를 위해 법에 대항했던 지난 투쟁의 역사는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정의를 도덕적, 종교적 가치로 형성해야 한다는 샌델의 주장에도 장정일氏는 ‘태클’을 거는데, 부족한 식견이지만 나 역시 이 태클에 동참하고픈 생각이다. 여러 강의와 책들을 통해 접한 종교사회학을 비롯해 특히 르네 지라르의 진단은 종교적 가치로부터 윤리를 떼어놓아야 하는 정당성을 매한가지로 옹호하고 지지했었다. 자본주의가 한 오랜 작업도 그것이었다. 물론 윤리를 개인에게 귀착시킴과 동시에 개인을 자본의 권력관계 속에 넣은 것이 문제였지만. 여하튼 샌델의 논의를 정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이면의 ‘종교적 가치의 폭력성’을 생각하지 못한 우를 범하게 된다. 그를 지지하면 “종교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3. 도덕적 사고의 변증법과 한국사회 (이현우氏)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로쟈’로 기억되는 이현우氏는 <정의>가 왜 유행했는지를 네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 이어 ‘옮음’과 ‘좋음’을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어떻게 저울질하는가를 샌델을 요약하면서 알려준다. 또한 샌델이 공동체주의(혹은 공화주의)를 도출하는 과정과 그의 ‘공공철학’이 무엇인지까지 설명해준다. 자세한 철학 이야기는 독자 각자가 정리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게재할 거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철학자들의 전차문제(Trolley Problem)가 샌델의 <정의>에서 언급되어 화제가 된 바, 이현우氏는 그 문제가 가진 공리주의적, 그리고 칸트주의적 함의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주의가 도덕적 죄의식의 기원에 따른 진화적 본성을 지녔다는 진화심리학의 학설을 피터 싱어의 인용문과 함께 곁들였다는 것이다. 싱어가 과학기술사회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면 샌델은 그저 도덕 원칙만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의 논의는 뒤이은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때론 가시적으로 공격받기도 하나, 이현우氏는 그러한 도덕판단의 공론화가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의주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해야 옳을 수도 있다. 그가 인용한 김용철 변호사의 저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구절은 회의론의 진수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그럼에도 이현우氏는 “나는 아직도 우리에겐 더 많은 도덕적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쪽에 걸고 싶다.”며 희망을 피력한다.

 

 

4. 공공철학의 여정 -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양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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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해설과 논쟁거리의 사고로 이뤄진 이양수氏의 이 글은 앞선 글들보다 훨씬 길고 더 자세하다. (뒤이은 두 편의 글도 모두 길다.) 부제대로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행되는 철학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표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권을 의미하는 듯하나, 실은 자유가 개인과 집단의 층위에서 모두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일이 일어난다. 근대의 작금이 그러하듯. 국가가 강조되고, 개인에게는 희생이 요구된다. 국가를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사고 중 하나이므로(혹은 ‘였으므로’) 우리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칸트주의자들이 도덕적 오류라고 반박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롤스의 <정의론>이 나왔다고 한다.

 


  이양수氏는 롤스의 <정의론>을 요약한 뒤, 샌델이 그것을 비판한 지점을 설명한다. 그 배경은 1960~90년대 미국이 ‘절차적 공화국’(나는 이걸 ‘기계적 공화국’이라 이해했는데, 크게 벗어난 이해는 아닌 듯하다.)으로 만든 여러 폐해들이다. 이론은 칸트인데, 실행은 롤스의 의무론으로 국가의 중립성과 ‘옳음(the right)’의 중립성을 준수한다. 전문가가 중시되고, 도덕논란의 회피되며, 시민들은 추상적 시민권을 갖는다. 공화주의는 여기서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민권은 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열정’이다. 이 열정은 애국심과 다르지 않다.

 


  샌델이 직접 공화주의를 시대이념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그런 뉘앙스를 아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샌델의 말은 그렇게 해석된다. 여하튼 그가 강조한 바는 ‘적극적 선의 개입’이고, 이로써 시민들은 절차적 공화국으로부터 그들이 소유해야 마땅한 시민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양수氏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가 귀한 손님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도 자유주의를 비판한 (그것도 보수적인) 공화주의자의 논의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건 역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가 그다지 논의된 바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양수氏는 우리의 유교이념을 토대로 개혁적 성향과 권위주의적 성향을 공공철학의 주제로 삼자고 살며시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공공철학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밀려드는 서구 이론을 해석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유교 개혁자들이 생각했던 만큼 사회 기반을 흔들어놓을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 없다. 체계적인 개혁의 부재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재현하려는 욕구로 분출된다. (pg.106)

 


  자유주의의 한계는 법적 인정이 자아정체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공평한 자아정체성은 ‘재단된 자아’라는 섬뜩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고, 공평한 수준 이상의 풍부함을 가졌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중립적 법이 아닌 현실참여만이 ‘나’의 가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샌델은 그래서 열정적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라 말한다. 그러나 이건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배경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과 로마의 공화정 전통은 그들에게 ‘회귀’할 기점이라도 마련해주지, 우리는 아주 없다. 이 점이 샌델을 텍스트 자체로 파악하지 않았을 때, 즉 콘텍스트를 고려해서 봤을 때 우리가 그에게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자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공화주의로부터 배울 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의 전환이다. 이양수氏는 그것이 그동안 정의를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했던, 혹은 관심이 없었던 우리 사회에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독자)가 변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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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샌델 풍으로 한국사회 읽기 (김도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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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정의담론이 갖춰야 하는 4요소(무엇을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누가 배분하는가?)를 설명한 김도균氏는 이어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적인 것의 배분’을 곁들여 무의미한 소음이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즉 ‘담론화’되는 과정을 알려준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이 했던 작업과 비슷하게 샌델의 <정의>에 포함된 여러 ‘정의론’들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론’에 언급된 절차, 배경, 결과의 공정성이, 즉 ‘정당한 불평등’이 과연 정의의 대원칙에 합치한가를 묻는다. 그보다는 롤스의 <정의론>이 훨씬 합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롤스는 재능은 공동자산이므로 노력한 만큼만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샌델은 이 점에서 롤스에게 감탄했다고 한다. 단, 비판도 한다. 그 예는 모병제에 대한 각 진영의 관점 차이와 샌델의 루소 인용(“공동선에 봉사하는 일이 시민의 으뜸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순간, 또 그것을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그 정치공동체의 몰락이 가까워진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은 직접 샌델을 정리해보며 그를 아주 단순하게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은 ‘공동선>공정성>시장가치’가 될 것이고.

 


  또 하나 샌델의 개념 중 중요한 것은 바로 ‘텔로스’이다. 대체로 “적격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캘리의 사례(pg.150~151)’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로렌스 대 텍사스 판결’은 샌델이 도덕 판단이 결여된 판례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부작용(오해와 편견)을 야기하는지 날카롭게 판단한 사례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서 말한 ‘절차적 공화국’이 비판되고, 실질적 도덕 판단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과연 우리의 사례는 어떨까? 김도균氏의 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네 가지 판결 사례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 사례, 양심적 병역거부, 군대 내 불온서적 소지 금지 등의 사례가 어떻게 정정되거나 고수되는지는 도덕 판단의 중요성을 우리의 사례로 직접 파악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도균氏는 이러한 장점 외에 샌델의 단점 역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한다며 글을 마친다. 그에 따르면 샌델의 공화주의로는 재화분배, 국제인권, 복지론 등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공동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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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비판 (최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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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앞선 김도균氏의 글, 그리고 후에 언급할 박가분氏의 글과 함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은 다른 것들에 비해 길지만 요는 “샌델은 그리스적 정의관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이 공동선을 도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갔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들에게는 샌델 고유의 한계이자 지적되어야 할 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쿠스의 설전이 실린 플라톤의 <국가> 1권을 예로 들며 최원氏는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이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를 극복하며 등장했다면서 샌델이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호메로스의 관점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라는 관점이 잘못된 점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샌델의 공동선 추구와 고대 그리스의 정의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주장에 흠집을 내진 않는다.) 최원氏의 첫 번째 지적으로 이미 샌델의 주장은 설득력을 조금 잃어버린다.


  그의 두 번째 지적은 샌델이 <정의>에 언급한 도덕적 딜레마의 사례, 앞서 말한 ‘전차문제’이다. 편리를 위해 임의로 나는 선로변경기가 있는 사례를 A라 부르고, 소위 ‘뚱뚱보’가 있는 사례를 B라 부르겠는데, 최원氏는 두 사례 사이에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A는 상황이 강제되어 있으므로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B는 ‘뚱뚱보’가 알아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나’는 보다 능동적이다. 샌델은 수단이 도구(선로변경기)이냐 사람(뚱뚱보)이냐의 차이를 강조했지만 최원氏는 그건 주된 차이가 아니며, 오히려 A와 B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샌델이 주권자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가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차문제의 또 다른 층위에는 ‘대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건 정치형태와도 연결되므로 중요한 문제인데, 최원氏는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과두정과 민주정의 사이, 그러나 민주정에 더 가까운 형태의 통치)와 플라톤(철학왕의 통치)의 차이를 소개하기 위해 긴 설명을 시작한다. (두 철학자가 각각 상이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플라톤은 “누가 지배하는가?”를 중시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화두로 삼았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나, 두 철학자 모두 당대의 ‘계급투쟁’의 문제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꼭 필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는 샌델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고대 그리스에 ‘꽃피었었다는’ 환상을 깨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샌델의 논의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 ‘동일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는 점에서 이 사회의 다양성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혹은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약점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샌델의 주장은 민족국가가 강성했을 때 등장했으니, 대안 공동체(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운명공동체’를 예로 들었으나, 자세히는 모르겠다.)를 생각할 기회는 되겠으나 그 자체를 정답이라 여기면 곤란하다는 것이 최원氏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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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의가 돈이라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한국사회 (박홍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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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글이다. 그는 왜 현대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주 모시듯”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다가 강력한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점들을 하나 둘 공개한다. 비시민계급과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에서 그리스의 자유 포기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결국 그리스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며, 비시민을 제외한 정의는 전체적, 부분적, 또한 분배적 정의일 수도 없으며, 부분적 정의 속에 있는 시정, 분배, 교환 등의 개념에는 모두 ‘등가교환’이 있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고자 한 말은 “돈이 정의이다.”, 즉 ‘화폐만능론’이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 담은 골자들이다.


  얼마나 공격적인지는 이 대목을 옮겨놓으면 될 듯하다.
  “출판 대국이니, 전국민 대졸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느니, 대부분 대학에 철학과가 있다느니 하는데도 그 유명한 디오게네스를 알 수 있는 책 한 권 없다니 너무 디오게네스하다. 너무 개같다. 개판이다.(pg.267)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편에 선 디오게네스와 그를 둘러싼 얄팍한 역사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는 플라톤의 제자에 대한 독설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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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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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태氏는 샌델의 ‘공동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는 ‘타자(他者)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며, 그 해결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를 읽으면서 윤리적 딜레마를 즐기는 잔인한 행태(초법적 주권자가 되어보는 짜릿함이라고 할까?)를 꼬집는다.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pg.277)


  내가 괄호 속에 ‘초법적 주권자’라 적은 것은 노정태氏의 지적인데, 그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인용문을 부득이하게 적어놓아야 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pg.282)


  이 말인즉, 우리는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정의의 딜레마를 보는데, 샌델이 그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든 ‘아프간 사례’에서는 미군의 눈이 중심이 되면 소년을 죽이는 것 ‘따위’는 전혀 딜레마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행위주체가 초법적 주권자로 한정된 샌델의 토론은 노정태氏의 표현대로라면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하는 선택과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이 샌델의 사례실험이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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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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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글은 나에게 상당히 어려워서 두 번에 걸쳐 읽고 이면지에 정리했으나, 위의 글들에 대한 리뷰처럼 나의 생각을 보태 정리할 능력이 나에게 없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내가 그의 글에서 얻은 여러 정보들 중 자의적 판단으로나마 중요하다 여긴 것들을 나름의 생각으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을 갖고 태어난다. 비판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말마따나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pg.292)”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의 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먼저 자유주의는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놓았다. 이걸 도운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종교에서 윤리를 떨어뜨려놓고, 개인에게 위치시켰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주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서동진氏는 윤리가 바로 저 차이의 협곡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사실 이 형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그의 글에 없다.) 이렇게 형성된 정의의 윤리는 자유주의가 물질화시킨다. 자유주의자들은 논증을 통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궁극적인 낙관주의를 모토로 활동했다. 이어진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리콜’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 ‘리콜’될 수 있을까? 서동진氏가 윤리적 규범의 실현이라는 ‘리콜’로 예로 든 대표적인 것은 ‘감사(audit)’이다. 회계감사할 때의 그 감사. 이것이 전지구적 규범이 되어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는 회사이든 정부이든 NGO이든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일반적 원리’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바로 이 ‘감사’가 갖고 있는 투명성에 있다.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역사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회국가(복지국가)가 주권적 개인의 집단인 ‘연대’의 윤리를 통해 자유주의를 재구성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공격했고, 이번에는 신자유주의가 앞서 말한 ‘감사’를 새로운 윤리의 카드로 내세운다. (이 ‘감사’에는 ‘책무성’의 척도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회계와 밀접하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정의의 윤리를 넘어서려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밖에 없다고 서동진氏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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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주주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단호하게 정의의 편에 설 것인가! (박가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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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밝혔듯이 나는 이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지적한 유일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중립적이기에 누구의 정의도 될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 무력(알랭 바디우의 주장, 참고로 박가분氏는 그의 블로그에 적은 바처럼 바디우를 가장 존경한다.)하다는 것, 제도가 아니라는 것, 근대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 재차 강조된다. 그리고 결정타, “대중을 분노케 하지 않는 정치”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스피노자의 인용문에서 독자들은 ‘민주주의’라는 풍선을 펑 터뜨리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자본주의와의 연동인데, 사실 연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등장과 함께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가분氏는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지역은 민주주의를 재난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종합해보면 반(反)민주주의적 정서는 반(反)화폐경제의 정서와 맥락이 같다.


  이 지점에서 박가분氏는 계급에 대해 묻는데, 그 근거는 근대정치의 두 기본틀이 민주주의와 계급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매우 신선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의 대신 민주주의를 물어봤던 것은 계급을 말하거나 사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혹 정의가 질문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수준은 ‘고상한 담론’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급적 조건 속에서야말로 ‘정의’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물음들이 비로소 그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p.326)


  박가분氏는 정의가 플라톤의 말마따나 때론 ‘문답무용(問答無用)’의 강력한 특징을 지닌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정의 자신을 둘러싼 논쟁들에게 붙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정의는 민주주의와 ‘경쟁’해야 할 처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선택지를 눈앞에 둔 셈이다. 민주주의와 정의 중 ‘알맞은 것’을 선택하시오.


  샌델은 민주주의를 <정의>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에게 신선했던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정의만을 말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그러나 <정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정의가 실체(그는 그것을 ‘날것’이라 표현했는데)를 드러내면 그것은 계급적 분노와 테러리즘의 형태일 것이며, 공동체는 그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박가분氏는 조심스럽게 샌델의 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 살짝 불러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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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이상의 논의들을 하루 만에 소화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고, 사실 이 리뷰도 순전한 나의 공부를 목적으로, 그리고 소화제 역할을 하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 것이었다. <정의>를 둘러싼 텍스트들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비평계의 기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조만간 여러 책들을 곁들여 읽을 생각에 급한 대로 리뷰와 그에 대한 나의 짤막한 생각들을 적어봤다.


  마지막 글로 이권우氏의 독서문화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 앞선 글들과는 다르며, 마무리하는 글로 적당한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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