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리뷰의 리뷰

 

 

#1.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는 시를, 나는 두고두고 읽는다. 2011년의 회고에 대한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채로 두고 싶다. 무지의 초심으로 시어와 문장이 주는 향기를 음미하다보면 - 배 두둑이 채운 어느 봄날의 나른함 속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와 저도 모르게 꿀잠에 드는 것처럼, 바로 그렇다. - 무지가 나을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거다. 앞뒤 잘라 써본다.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돈’과 ‘잠자리’의 이미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처절하다. 잠자리가 돈을 깨뜨린 뒤, 그 돈의 파편들이 잠자리를 깨뜨리는 광경이다. 그건 그녀의 말마따나 일종의 울음이나 비명이다. 이 질문은 나의 눈에 생채기를 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눈물이 볼 위에 낸 흔적을 손바닥으로 비벼 지웠다.


  돈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근래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를 읽고 있는데, 한 구절이 인상 깊었다. “외환위기 때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많은 이를 자살하게 한 것은, 경제적 환란 자체가 아니라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다.(pg.59)”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돈이 관여하지 않는 비밀의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정원에 어떤 꽃을 심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의 추적자들이, 혹은 스파이들이 정원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들이 정원의 꽃들을 모두 뽑아가려고 난동을 부리더라도, 혹은 그리하여 우리가 만석꾼에서 가난뱅이로 떨어지더라도, 손에 움켜쥐고 끝까지 놔주지 않을 꽃을 한 줌 정도는 가슴 속에 미리 정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이다. 결제하기 전에 합계액을 보고 ‘헉’하며 놀라곤 하지만 <톨스토이 단편선>이 정말 8,500원의 ‘값’을 할까. <그림과 눈물>은 정말 15,000원의 ‘생각’을 담고 있을까. 정량 공리주의를 못 미더워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걸 사치라고 하면 '좀' 그렇다. 비밀의 정원이 서울광장 한복판에 공개된 느낌이리라. 좀 더 비밀스럽게, 나는 책이다.

 

 

 

#2.
  말미에 접어드는 여름. 많은 책을 읽겠노라고 스스로에게 공언까지 한 탓에, 순전히 양으로만 따지자면 만족의 발치를 기웃거릴 정도의 독서량이었다. 야심차게 나는 파농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밀의 <공리주의>를 읽고, 다시 한 번 <자유론>을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수포로 돌아갔다. 세 번째 수포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스마일 카다레,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하인리히 뵐, …, 이하생략.


  그러나 읽은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힘이 나고 좋다. 무엇이 인상적이었는가를 회고하는 것이 ‘독서건강’에도 좋을 것 같으니, 눈을 과거로 몇 번 던져본다. 뭐가 기억에 남을까.

 

 

 

#3.
  지난 학기 중에 읽은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을 정리하는 것으로 방학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논픽션 11선과 픽션 11선을 나름 선정하여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득하게 바라봤지만 이차저차 흐지부지되었고, 리뷰 올리지 않은 책과 소설책을 빼고 11선만 리뷰하기에도 사실 벅찼다. 불타는 머리로 난삽하게 정리하고, 그걸 재단하여 글로 뽑아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누에의 일’이 아닌가 말이다.

 

 

 

 

 

 

 

 

 

 

 

 

 

 

 

 

  <권태>는 제 나름의 힘을 가진 권태의 양상에 대한 책이다. 역사를 쫓아가는 재미도 있고,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권태도 분석한다. “권태는 그저 권태일뿐이다.”라는 구절과 그것의 치료법 - 이미 다 알고 있는 ‘활동들’ - 이 이 책을 용두사미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권태’이다. 밤안개처럼 슬며시 찾아와서는 우리에게 제 모습의 스산함을 보여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어느새 살그머니 떠난다.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어딜 읽어도 처음 같고, 마지막 같다.


  <진단명 사이코패스>의 요는 “잘 대처하자.”라는 건데, 사실 그보다는 분석사례가 주는 인상이 더 짙다. 역자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현장조사는 서양에 뒤진 편이다. 차라리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저 인상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마치 추(醜)처럼 우리 주변에 있으나 바라보는 것이 꺼려지는, - 움베르토 에코가 강조하듯이 - 그러나 결국 바라보게 되는 사회의 어떤 면을 이 책은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CSI나 NCIS, 크리미널 마인드 등 ‘미드수사물’을 즐겨보는 이들에게 <진단명 사이코패스>는 저 텍스트들의 실제 콘텍스트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로도 커다란 충격을 줄 것이다.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는 전형적인 ‘정리책’이다. 문장 구절 하나하나가 특별한 감흥을 주진 않는다. 그 점으로만 본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주제이다. 죽음이다. 기준점을, 혹은 한 축을 중심으로 ‘생’에의 정확한 대칭점을 이루는 것. 아니, 정정해야겠다. 이 책은 ‘정확한 대칭점’으로서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건 “살아 있는 죽음”이다. 물론 이 책 하나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세분화시키거나 고정시키진 않는다. 별다른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그건 이 책 탓이 아니다. 그 어떤 책도,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체로의 공포 속에서 우리에게 아주 사사로이 다가오지 않던가.

 

 

 

 


 

 

 

 

 

 

 

 

 

 

 

 

  <다윈 지능>에서는 지식도 배웠고, 시각도 배웠고, 간결함도 배웠다.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그러나 너무 한 문장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닌 독서는 아무 책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를 나는 도킨스나 바전, 곰브리치 등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재천氏를 목록에 넣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진화론의 역사와 이론을 쉽고 재밌게 배운 것만큼의 행복을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 <이타적 유전자>, <조상이야기>, - 분야는 조금 달라도 - <엘리건트 유니버스> 등 비싼 책들도 최재천氏가 내게 던져준 호기심 덕분(?)에 서재에 두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번 여름에 내가 건진 대어였다. 소설 좀 사서 읽겠다고 한 출판사의 책을 시리즈로 몇 권 샀는데, 값이 싸다는 이유로 - 또 하나는 밀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 한 바구니 속에 넣어 서재에 꽂아뒀었다. 더위 탓에 하도 책이 안 읽히기에 “어디 얇은 책 하나 없나?”는 심보로 이리저리 둘러대다가 꺼내 단숨에 읽은 책이다. 명료하고 강했다. 내가 초상화로 알고 있는 벤담의 이미지와 꼭 닮은 글이었다. 이론이라기보다는 프로포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는 챕터별 정리를 짜깁기해서 이 공간에 리뷰로 다뤄봤는데, 짜깁기인 만큼 전체적인 이해는 아직 확실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롤스, 샌델에 이르는 철학사의 ‘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자칫 위험한 독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류의 책이다. 발췌독이나 검색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하루의 대부분을 쏟아 부어 단숨에 읽고, 리뷰를 4~5시간 정도 적어봤는데, 그만큼의 ‘임팩트’가 있다. 일단 문제를 진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각 비평가들의 솜씨도 솜씨이거니와 하나의 텍스트가 한 국가의 독서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는 부득이하게 읽어야겠지만 -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이유>, 새삼 긍정의 필요성을 알게 된 책이다. 구달의 섬세하면서도 솔직한 태도가 읽는 내내 강한 확신을 줬다. “그녀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얻게 된 유일한 인상이다. 이 인상은 책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다. 아니, 가장 강한 인상이라고 해도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이 유사하게나마 체험하게 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다.


  물론 혹자들은 그녀가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한다고 구달을 저평가할 수도 있다. 나도 그녀의 주장 중 채식주의나 실험동물보호 등이 - 나도 모르게 이때 나는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렸는데, 아마 대다수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런 양가성이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 우리에게 과연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의심을 했었다. 그녀의 실천을 공론화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 ‘다원화된 사회’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놓쳐버리고 후에야 깨닫는 것은, 그녀와 같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의 희망전달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엄청난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래,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매번 뉘우치며 돌아올 수 있는 원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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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3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가을에도 이런 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개강축하해요, 탕기님.
ㅋㅋㅋ

탕기 2012-09-01 10:59   좋아요 0 | URL
아...ㅠㅠ 개강이에요, 아이리님.
그래도 학기 중에 꾸준히 읽을 책들 정해놨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읽어야죠^^
가을도 파이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