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25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1권]

 

 

  가다머는 <과학 시대의 이성>이라는 저서에서 “정신적 객관화로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재인식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객관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과학과 수학일 것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그것은 철학처럼 언어와 말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기호와 서술의 자동화로 이뤄져 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과학과 수학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들은 가다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거의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가다머가 설명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그의 말은 “철학하자.”는 주장이다. 열심히 사유하는 삶을 통해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자기운동’으로 철학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수한 철학자의 논의를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도 한다.


  그가 과학지상주의를 겨냥한 듯 철학의 전면에 나서 그것을 호위하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그의 저 대목에서 - 어려우니 문장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고민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철학의 묘미랄까? - “과연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가다머가 철학의 반대편에 세운 건 실증과학(Wissenschaft)이다. 이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과학’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과학, 즉 ‘자연과학’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그와 더불어 역사학, 언어학, 기하학도 있다. 부분이 전체를 반영한다는 논리로, 나는 “자연과학으로부터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철학(사유)이 결정적인 지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결정적인 동기는 최재천의 <다윈지능>이었다.


  진화론과 유전자학에 따르면 -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 우리는 유전자 정보가 시키는 대로 사는 존재이다. 반대의견이 바로 뒤따를 것이다. 본능의 억제, 인류의 지적 유산, 형성된 인간의 문화 등등. 우리가 이룩하고 바라는 것이 반드시 유전자 정보대로 전개되는가? 이것은 유전자 정보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훨씬 우세하다고 믿는 일종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감성적 방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유가 DNA보다 더 우월한 것인지도, 실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매트 리들리의 <게놈>을 읽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인격 형성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철학자, 용병, 창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란 속설이 있다. 그러나 DNA가 그에 선행한다.


  나의 궁금증을 스스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를 읽어가며 계속되었는데, 사실 그냥 계속된 것이 아니라 훨씬 심화되었다고 해야 옳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부터 ‘두 과학자’의 갈라파고스 연구에 이르는 진화론의 ‘전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이 책은 최재천의 추천사처럼 일반 사람도 읽을 수 있는 난이도로 쓰인 책이다. 대중적 과학저술을 생각하는 저자라면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금 말한 ‘두 과학자’는 그랜트 부부를 일컫는다. 남편 피터와 아내 로즈메리는 지금 프린스턴 대학교에 재직 중에 있는 생태학자이며, 진화론의 실측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둘은 갈라파고스에서 무려 20여 년을 보내며 ‘핀치(Finch)’라는 새를 연구했다. 그들의 방대한 연구가 겨냥한 초점 중 주된 것은 바로 책 제목처럼 부리이다. 분명한 것은 “새의 부리가 뭐 대수야?”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읽어가며 깊은 자기반성과 함께 놀라운 지적 성취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다윈의 논리적 ‘믿음’을 밝혀나간다. “종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일종의 ‘성서(聖書)적 질문’이 “우리는 종을 믿어야 한다.”라든지 “종은 신이 만들었다.”와 같은 종교적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진화론의 특징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밝혀지지 않으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과거의 진화론자들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범죄자(일 것 같은 사람)에게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마치 ‘명탐정 코난’처럼 통쾌하게 선언하지 못하는 형사와 같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다윈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지 못해 못내 찜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밝혀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종의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밝혀졌다. 믿음이라는 건초더미에 불이 떨어졌고, 최근에는 진화의 종교적 해석인 지적 설계론이 등장했다. 사실 존 브록만의 <엣지>에 투고되는 학자들의 글만 봐도 그건 학문적으로 논할 만한 가치가 없는 ‘론(論)’이긴 하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다윈, 헉슬리 등 옛 인물들, 그랜트 부부, 그리고 갈라파고스 연구와 진화론에 관련된 학자들의 담화와 책의 구절들을 빌려오면서 진화론의 기본개념들을 인상적으로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설과 같은 구절들에서는 마치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것 같은 놀라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도 있다.


  가령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 진화론에는 자연선택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과거에 분화된 종이 하나로 뭉치게 된다는 개념이 있다. 최재천은 이를 그의 <다윈지능>에서 “달라야 산다.”고 표현했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A라는 바이러스는 B1이라는 생물군에 치명적이라고 해보자. B1의 개체들은 A 바이러스를 피해서 B2와 B3로 분화했다. 분화하게 된 것은 외압(스트레스) 때문이다. 이 경우 B1은 B2, B3로 분화하면서 ‘B’라는 자신의 종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B2와 B3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다른 바이러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으로 멸종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만약 B1이 분화하지 않고 버티면 -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겠지만 - A 바이러스는 언젠가 B1의 멸종을 불러올 것이다. B1의 실패는 곧 B 전체의 실패가 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를 다른 외압으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는 “왜 우리가 등장했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에 대해 명백한 검증을 거친 과학적 개념으로 답할 수 있다.


  “핀치의 부리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강한 선택압은 이 모든 부리가 사라지지 않게 지키기도 한다. 다윈의 과정은 하나에서 다수를 창조했으며, 다윈의 과정은 심지어 지금도 창조활동 중에 있다. 만일 자연선택이 각 섬에서 각 세대에 계속 힘들게 작용하지 않았다면, 다수는 금방 다시 하나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pg.278)


  이것이 진화론이 ‘적응방산’이라고 부르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는 찢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진화와 멸종, 변이가 실제 지구 역사의 전부인 까닭이다. 자연선택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정말 눈물도 피도 없는 냉정한 신이다. 그래서 조너던은 그것을 “창조와 파괴의 아름답고도 끔찍한 중재자”라고 불렀다.


  내가 진화론을 조금씩 배워가며 느끼게 된 것은 그것이 현대과학의 열역학과 닮았다는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 아니면 거의 확인할 수 없어서 우리가 도통 모르고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둘의 닮은 점이다. 자연을 보다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도구와 시스템이 개발된 현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개념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건 정말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다행이도 열역학의 법칙들보다 진화론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확인이 가능하다. 열역학 법칙을 확인한답시고 우리가 ‘닫힌계’나 ‘열린계’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반면 최재천이 누차 강조한 것처럼 진화론은 나방의 날개무늬, 같은 종 나무의 지역별 잎사귀 차이 같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생태학자들이 지금까지 진화론과 연관해 진행한 유례없는 방대한 작업이 바로 이러한 ‘실측’이다.


  다윈은 최근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인공선택, 쉽게 말하자면 사육을 근거로 “자연선택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유추를 했다. 여기서 진화론의 근거가 나온 것이다. 그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간 이유는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핀치의 부리를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체류기간은 단 5주. 핀치 표본도 겨우 31마리. 또한 핀치연구는 다윈의 감정의뢰를 받은 조류학자 존 굴드가 했고, 그가 핀치 표본을 연구한 후 1837년 1월 10일, “31마리는 12종으로 나뉘며 모두 ‘전적으로’ 새로운 종”이라고 발표한 기사가 뜬 이후에야 유명해졌다. 다윈의 진화론은 본래 ‘선험적 가설’이었지, 엄밀히 말해서 ‘과학’이라 하기에는 전혀 관찰된 바가 없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계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측의 세력은 강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은 종교인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었다. “어떻게? 왜?”에 대한 질문의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은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다.”라며 배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자연선택과 변이. 이 두 개념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북한산에 올라 의정부 방향의 도봉산, 서울의 은평구, 그리고 송추계곡을 한 눈에 파노라마로 담고 있으면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때 우리가 느끼는 위대함의 바탕에는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어 있는 자연’이 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긴 힘들다. 책장의 책들을 가지런히 꽂혀 있고, 신발들은 신발장 속에 차곡차곡 들어가 있다. 자고 나면 이불을 개고, 더러운 빨래는 세탁한 후에 다림질을 한다. 정리하는 것이 일상인 인간에게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낯선 것이다. 진화생물학의 ‘혜성’이라 불린다는 돌프 슐레터의 말이다.


  “당신은 종이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요동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종은 여러 해에 걸쳐 보면 안정되어 보이죠. 하지만 실제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당신의 생각처럼 안정된 것이 아니랍니다!”


  물리학이 발견한 모든 법칙들이 전 우주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놀라운 원리를 비롯해서 진화론은 물론이고 과학은 우리에게 앞서 말한 가다머의 정의대로 ‘기호와 서술’로 이뤄진 연구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삼라만상의 비밀을 조금씩 눈앞에 펼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비밀을 푸는 코드는 물론이고, 그 방법까지도 과학은 종교와 다르다. <핀치의 부리>에 있는 챕터 중 ‘보이지 않는 문자들’은 DNA를 의미하고, 물리학에서는 우주를 숫자와 기호로 푼다. 실제 그들이 우주를 관찰하겠다고 쏘아올린 보이저호, 그리고 지구를 빙빙 돌고 있는 허블 망원경은 인류가 구사할 수 있는 숫자와 기호의 상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과학과 종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이 설명하는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난해하고, 과학은 너무 어렵다.


  나의 첫 질문이 혹 과학지상주의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으나, <핀치의 부리>를 읽으며 나는 과학적 연구와 이해들이 인간을 타락시켜온 작금의 상황을 사실 ‘과학적 연구와 이해’에게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타락은 도덕의 결여일 뿐이다. 도덕이 과학적 이해와 다름은 명백하다. 과학이 밝힌 바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자연은 우리에게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알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학이 밝혀오고 알아가려는 바가 과학지상주의와 반드시 연결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핀치의 부리>가 아마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가장 인상 깊은 책으로, 나에게는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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