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8.26

 

 

  곧 개강이다. 나는 방학의 마지막 책을 고르고 있었다. 책꽂이를 훑어보면서 나는 되도록 얇은 책을 손에 쥐려고 했다. 개강 전날인 내일은 책 읽을 정신이 아닐 듯했다. 토요일을 틈타 유종의 미를 짧게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겉표지의, 한편으로는 새삼스럽기도 한 제목의 책을 집었다. 10년이 넘으면 속지가 누렇게 변하는가보다. 1판 1쇄, 2000년 발행.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런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책에 끌린 것은, 예삿일은 분명 아니었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두 장 선 채로 천천히 읽다가, 오전과는 딴판으로 더웠던 오후의 변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방바닥에 오래된 치즈조각마냥 찰싹 붙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베개를 책상 삼아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픈 구절들이 많아 이면지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방학 중에 읽고 리뷰를 쓴 책이나, 리뷰 없이 메모만 적어둔 책들을 통틀어서 이 책을 나는 가장 편안하게 읽었다. 그 편안함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전의 경험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를 읽었다.

 

 

*   *   *

 

 

  이 책은 말 그대로 그녀가 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가를 자신의 일대기를 회고하며 밝힌 책이다. 그녀의 경험들 속에는 열정과 헌신의 이유가 솔직하게 적혀 있고, 독자들은 왜 그녀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인 구달’이라는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는지 차츰차츰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영적 평화’라는 개념 - 그녀는 이 책에서 항상 그것이 특정 종교의 해석이 되지 않게끔 주의하는데 - 은 자연과 그녀 사이를 이어주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건, 아마 누구나 체감할 수 있겠지만, 그 이해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어린 시절, 제인의 인격을 만든 여러 가지 추억들을 나열해보면 그녀가 어떤 인물이 될 소녀였는지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목사 집안인 외가, 타잔과 <정글북>을 좋아하는 소녀, 대자연에 대한 시를 종종 쓰던 소녀,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 종교에 대한 회의와 한 목사에의 동경, 성서 독해, 폐허가 된 쾰른 방문, 신지학,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아프리카 방문과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와의 만남,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


  그녀가 케냐 캐슬호를 타고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케냐의 몸바사까지 가는 긴 항로 - 원래 수에즈 운하를 지날 계획이었는데, 당시 이집트 전쟁으로 운하가 봉쇄되었다. - 에서 바다의 위대함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낭만을 꿈꾼 것이 아마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반복해서 회고하듯 홀로코스트나 차별, 박해 등은 그녀가 훗날 침팬지를 연구하며 갖게 된 인류에의 희망이 나온 검은 웅덩이, 악의 원천이었다.


  책의 104쪽에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는 침팬지 사진은 지금은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곰베에서 찍은 사진인데, 침팬지의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제인은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최초로 보고한 학자였으나,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녀가 연구원의 신분으로 제출한 보고서는 곧바로 회의론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에게 침팬지 연구를 권유했던 루이스는 그녀의 발견을 두고 인류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놀라워했으나, 다윈의 연구가 그러했듯이 제인의 연구 역시 지성인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생소하고도 다소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례보고였다. 1970년대의 이 해프닝은 ‘악의 뿌리’라는 장에서 상세하게 다뤄졌으니,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주류과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 사실 그녀는 흰 옷을 입은 과학자들을 한동안 ‘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 그녀의 ‘감정이입’이 된 연구는 과학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지적 연습이 경이의 일부를 훼손시킨다.”며, 이 ‘경이’야말로 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다. 나는 이 생각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반려동물과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이라면 제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들을 가족이라 느끼고, 어느덧 ‘동물 취급’하지 않는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인이 ‘고대의 언어’라 말한, 말없이 눈과 마음, 그러니까 영적으로 서로 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지금 과학이 중시하는 그녀의 발견은 바로 과학이 배척했던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오랜 연구가 진행되던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는 결혼에서 이혼으로, 곰베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여자에서 어머니로 그녀의 삶이 뒤흔들리던 때였고, 그녀의 글들로 미뤄보건대 내 생각에 그때 그녀는 어떤 책임의식에 대한 통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의식들은 이 한 문장으로 모아진다.

  “확실히 인간 종 -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와는 상관없이 - 의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그 존재의 지속이 위협받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pg.134)


  인간을 신이 만들었든 그렇지 않았든, 혹 누군가가 신의 여부를 믿든 안 믿든, 작금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자명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녀의 희망의 한 축을 담당한다. 맺는 글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장에서도 그녀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의 세태가 어떻다고 생각한 것일까? ‘전쟁의 전조’는 그에 대한 그녀의 간결하고도 명백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것은 ‘문화적 종분화’라는 개념이다. 그녀는 그렇게 부르나, 대체로 ‘의사종분화(pseudospeciation)’라고 하는 이 개념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구별하는 (집단)이기주의이다. 그녀는 오랜 연구 끝에 침팬지의 사회에도 그러한 분화의 전조가 있었다며, 그런 전조는 대개 두 집단으로 나눠진 사회에서 발견되었고, 두 집단 사이에서는 충격적인 공방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침팬지의 공격은 단순한 차원이었다. 그녀는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며, 인간의 문화적 종분화는 인간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세계평화의 장벽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집단이기주의, 혹 그러한 ‘이기성’은 도킨스가 써서 큰 파장을 일으킨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것처럼 인간 본연의 이기적 특성에서 나온다. 제인도 그에 동의하는 편인데, 사실 그보다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한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그녀는 도킨스보다는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 쪽이다. 그렇다고 도킨스를 ‘이기주의 지지자’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는 순자와 닮았다. 원래 악하니 도덕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가 유행할 때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타성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행동목적은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것에 있어야 하고, 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 본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서, 그리고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머금고 봤던 그러한 연민, 사랑, 희생들. 이타주의, 측은지심, 의식적인 결정, 영웅적인 행동 등등.


  그리하여 사실 독자들이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장 중 하나는 ‘도덕적 진화’라는 장이다. 나 역시 이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제인은 ‘르콩트 뒤뉴와’라는 의사 출신 철학자의 1937년 저서 <인간의 운명>을 보고 큰 울림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 책에서 르콩트는 인간의 역사를 도덕적 자질들을 획득해가는 과정으로 봤다. 그렇다면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제인은 침팬지들에게는 정의가 곧 힘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면서 19세기 후반의 빈약했던 인권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성취된 인권은 얼마나 높은가를 반추한다. 이 잠재력에 대한 긍정.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확신했다.


  희망을 키워가는 한 방법으로 그녀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라는 장에서 동물보호를 예로 든다. 물론 독자들은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이든 간에 그녀의 말대로 인간의 ‘유일무이성’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오만함을 줄이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한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바야흐로 진정 ‘인간성’이라는 개념을 재고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녀도 낙관이 힘들 때가 있다고 토로한다. 시간의 문제임도 시인했다. 비관은 아주 쉽게 전이되는 특성이 있고, 또한 다수에게 별 어려움 없이 수용된다. 세태가 그렇다. 그러나 원론적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녀의 ‘희망의 이유 네 가지’는 곱씹어봐야 한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 정신. 이에 회의론이 곧바로 질문할 것이다. 그녀가 주장한 동물실험금지, 채식주의 등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이는 내가 <엔트로피>를 읽으며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을 ‘황당하고 대범하며, 결국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기억하고 있는 이유와 닿아 있는 회의일 것이다.


  그러나 제인의 의도는 우리에게 영감와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대부분이 대의민주주의의 국가인 이 지구공동체에서 현실은 당연히 정책결정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열정은 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통로인 것이다.

 

 

*   *   *

 

 

  나는 독서를 마치고 잠시 유투브에서 그녀의 동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영어는 짧지만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종종 TED나 FORA.tv의 강의·회의 영상들을 다운받아 챙겨보는데, 내가 기억하는 제인은 매기 스미스와 닮았다. 영화 <해리포터>의 미네르바 맥고나걸 교수 역을 맡았던 그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와 제인은 모두 영국 사람이고 1934년 생으로 나이도 같다! 여하튼 내가 본 그녀의 강의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녀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한 강연이다. 제인은 많은 미국대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특히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그러한데, 나는 슬프고도 화가 납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넘어서’라는 장에서 소개한 그녀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방문기를 떠올렸다. 타협은 무감각이다. 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보여주면 열정은 검은 웅덩이에서 탈출해 각자의 태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섯 마리의 왜가리’라는 그녀의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봤다. 이 시에서 그녀는 왜가리들이 바다와 구름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시간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황진이처럼, 고이 접어뒀다가 후에 적막이 자신을 엄습할 때에 펼쳐보겠다고 다짐한다. 시가 아주 와 닿았다. 그녀가 용기를 얻기 위해 처칠의 명언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처럼 나도 이 시의 제목을 어딘가에 적어두고 적막과 회의가 찾아올 때마다 들춰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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