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2012.08.22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0권]

 

 

  이 책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라 표기)>에 대한 11인의 심도 있는 비평을 담고 있다. 샌델의 논의들 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부분들은 직접 인용한 저자가 많고, <정의>의 주요 논점들이 적절히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샌델의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의 경우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심도 있는 비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의 인내를 바란다. 이면지에 낙서를 해가며 하루를 꼬박 쏟아 부어 진득하게 읽긴 했지만, 리뷰를 적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지금 생각해보니 어딘가 체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는 <정의>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그처럼 쉬우면 쉽지 그보다 어렵진 않을 것이다.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다. 문제에 대한 공감의식이 대안모색의 첫걸음이다. 이 책은 ‘샌델’이라는 시대의 화두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 중요한 계기에 대한 시의적절한 탐색이므로 11인의 발언은 ‘샌델 다음’을 고민하려는 세대들에게 신기 좋은 운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리뷰가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것도, 몇 안 되는 리뷰어들에게 미리 알려야겠다. 지면이 난삽하면 안 되니 이현우氏의 비평글까지만 고스란히 옮기고, 이어지는 비평문들은 모두 '접은 글'로 처리하고자 한다.

 

 

1. 정의 없는 사회는 왜 정의를 욕망하는가? (이택광氏)
  이택광氏가 대표로 포문을 연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샌델의 <정의>가 선진국 담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정치집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도 한 몫 한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크게 실망하고 있는 건 작금의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박가분氏의 ‘붉은 서재’에서 바디우에 관한 그의 입문서를 읽다가 (얄팍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바가 있어) 문득 지젝이 떠올라 그에게 대중운동의 단편성(이건 지젝의 진단)과 ‘사유의 힘(이건 바디우의 개념)’의 부족을 연관해 생각하던 중 “이 시대 대중운동들이 너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라 힘을 못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절반만 동의한다면서 나머지 ‘절반’을 동의하지 못하는 까닭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봤다. 뭘 주장하든 의회를 통과해야 (내가 쉽게 이해한 바로는) ‘씨알’이 먹힌다는 뜻이다. 운동의 성공은 결국 ‘대의(代議)’의 문을 통과했느냐 못했느냐의 여부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는 그 후 오랜 동안 그의 생각대로 대의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경험도 했다. 투표가 극명한 예이다. 소위 “찍고 싶은 사람 없어도 차선으로 찍어야 하는”, 한 유명 드라마의 대사대로라면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골라내는 것이 투표”가 되는 현실은 아무래도 보다 면밀히 심문해볼 필요가 있는 죄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대안을 찾아보는 것이 나의 역량으로는 힘들었던 차에 마침 ‘환경윤리’라는 테마의 교양강의에서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대안(여러 의결주의들)들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래서 나는 기말평가 답안지에 그것들을 우리가 정말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는 뉘앙스와 함께 약간의 희망을 적어냈다. 아무래도 ‘다양성’이라는 것이 이 면에서는 큰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택광氏는 “포기할 수 없는 개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표”인 정의, 그리고 “개인을 인내하게 만드는” 대의민주주의를 각각 진단한다. 둘 사이에는 겉보기에도 척력이 있다. 진정한 정의가 수용될 공간이 한국 사회에 마련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그 상태에서 <정의>가 유행한 것일까? 그보다는 ‘정의없음’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택광氏의 주장이다.

 

 

 

2.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 (장정일氏)
  매우 간략하고 직접적인 글로 장정일氏는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 자체로 <정의>는 반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에서 샌델이 설명한 것처럼 롤스의 <정의론>은 법의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정말 중립적인지는 - 나는 법 전공자가 아니므로 다른 이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데 - 잘 모르겠으나, 장정일氏의 주장대로 법이 고착적, 집권적, 지배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에 비해 정의의 모습은 훨씬 동적이다. “정의가 움직일 때 법은 패퇴하게 되어 있다.”는 그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건 정의이다. 정의가 법에게 위탁되면 정의를 위해 법에 대항했던 지난 투쟁의 역사는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정의를 도덕적, 종교적 가치로 형성해야 한다는 샌델의 주장에도 장정일氏는 ‘태클’을 거는데, 부족한 식견이지만 나 역시 이 태클에 동참하고픈 생각이다. 여러 강의와 책들을 통해 접한 종교사회학을 비롯해 특히 르네 지라르의 진단은 종교적 가치로부터 윤리를 떼어놓아야 하는 정당성을 매한가지로 옹호하고 지지했었다. 자본주의가 한 오랜 작업도 그것이었다. 물론 윤리를 개인에게 귀착시킴과 동시에 개인을 자본의 권력관계 속에 넣은 것이 문제였지만. 여하튼 샌델의 논의를 정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이면의 ‘종교적 가치의 폭력성’을 생각하지 못한 우를 범하게 된다. 그를 지지하면 “종교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3. 도덕적 사고의 변증법과 한국사회 (이현우氏)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로쟈’로 기억되는 이현우氏는 <정의>가 왜 유행했는지를 네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 이어 ‘옮음’과 ‘좋음’을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어떻게 저울질하는가를 샌델을 요약하면서 알려준다. 또한 샌델이 공동체주의(혹은 공화주의)를 도출하는 과정과 그의 ‘공공철학’이 무엇인지까지 설명해준다. 자세한 철학 이야기는 독자 각자가 정리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게재할 거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철학자들의 전차문제(Trolley Problem)가 샌델의 <정의>에서 언급되어 화제가 된 바, 이현우氏는 그 문제가 가진 공리주의적, 그리고 칸트주의적 함의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주의가 도덕적 죄의식의 기원에 따른 진화적 본성을 지녔다는 진화심리학의 학설을 피터 싱어의 인용문과 함께 곁들였다는 것이다. 싱어가 과학기술사회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면 샌델은 그저 도덕 원칙만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의 논의는 뒤이은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때론 가시적으로 공격받기도 하나, 이현우氏는 그러한 도덕판단의 공론화가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의주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해야 옳을 수도 있다. 그가 인용한 김용철 변호사의 저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구절은 회의론의 진수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그럼에도 이현우氏는 “나는 아직도 우리에겐 더 많은 도덕적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쪽에 걸고 싶다.”며 희망을 피력한다.

 

 

4. 공공철학의 여정 -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양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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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해설과 논쟁거리의 사고로 이뤄진 이양수氏의 이 글은 앞선 글들보다 훨씬 길고 더 자세하다. (뒤이은 두 편의 글도 모두 길다.) 부제대로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행되는 철학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표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권을 의미하는 듯하나, 실은 자유가 개인과 집단의 층위에서 모두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일이 일어난다. 근대의 작금이 그러하듯. 국가가 강조되고, 개인에게는 희생이 요구된다. 국가를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사고 중 하나이므로(혹은 ‘였으므로’) 우리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칸트주의자들이 도덕적 오류라고 반박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롤스의 <정의론>이 나왔다고 한다.

 


  이양수氏는 롤스의 <정의론>을 요약한 뒤, 샌델이 그것을 비판한 지점을 설명한다. 그 배경은 1960~90년대 미국이 ‘절차적 공화국’(나는 이걸 ‘기계적 공화국’이라 이해했는데, 크게 벗어난 이해는 아닌 듯하다.)으로 만든 여러 폐해들이다. 이론은 칸트인데, 실행은 롤스의 의무론으로 국가의 중립성과 ‘옳음(the right)’의 중립성을 준수한다. 전문가가 중시되고, 도덕논란의 회피되며, 시민들은 추상적 시민권을 갖는다. 공화주의는 여기서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민권은 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열정’이다. 이 열정은 애국심과 다르지 않다.

 


  샌델이 직접 공화주의를 시대이념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그런 뉘앙스를 아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샌델의 말은 그렇게 해석된다. 여하튼 그가 강조한 바는 ‘적극적 선의 개입’이고, 이로써 시민들은 절차적 공화국으로부터 그들이 소유해야 마땅한 시민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양수氏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가 귀한 손님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도 자유주의를 비판한 (그것도 보수적인) 공화주의자의 논의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건 역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가 그다지 논의된 바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양수氏는 우리의 유교이념을 토대로 개혁적 성향과 권위주의적 성향을 공공철학의 주제로 삼자고 살며시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공공철학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밀려드는 서구 이론을 해석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유교 개혁자들이 생각했던 만큼 사회 기반을 흔들어놓을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 없다. 체계적인 개혁의 부재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재현하려는 욕구로 분출된다. (pg.106)

 


  자유주의의 한계는 법적 인정이 자아정체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공평한 자아정체성은 ‘재단된 자아’라는 섬뜩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고, 공평한 수준 이상의 풍부함을 가졌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중립적 법이 아닌 현실참여만이 ‘나’의 가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샌델은 그래서 열정적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라 말한다. 그러나 이건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배경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과 로마의 공화정 전통은 그들에게 ‘회귀’할 기점이라도 마련해주지, 우리는 아주 없다. 이 점이 샌델을 텍스트 자체로 파악하지 않았을 때, 즉 콘텍스트를 고려해서 봤을 때 우리가 그에게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자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공화주의로부터 배울 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의 전환이다. 이양수氏는 그것이 그동안 정의를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했던, 혹은 관심이 없었던 우리 사회에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독자)가 변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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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샌델 풍으로 한국사회 읽기 (김도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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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정의담론이 갖춰야 하는 4요소(무엇을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누가 배분하는가?)를 설명한 김도균氏는 이어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적인 것의 배분’을 곁들여 무의미한 소음이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즉 ‘담론화’되는 과정을 알려준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이 했던 작업과 비슷하게 샌델의 <정의>에 포함된 여러 ‘정의론’들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론’에 언급된 절차, 배경, 결과의 공정성이, 즉 ‘정당한 불평등’이 과연 정의의 대원칙에 합치한가를 묻는다. 그보다는 롤스의 <정의론>이 훨씬 합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롤스는 재능은 공동자산이므로 노력한 만큼만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샌델은 이 점에서 롤스에게 감탄했다고 한다. 단, 비판도 한다. 그 예는 모병제에 대한 각 진영의 관점 차이와 샌델의 루소 인용(“공동선에 봉사하는 일이 시민의 으뜸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순간, 또 그것을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그 정치공동체의 몰락이 가까워진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은 직접 샌델을 정리해보며 그를 아주 단순하게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은 ‘공동선>공정성>시장가치’가 될 것이고.

 


  또 하나 샌델의 개념 중 중요한 것은 바로 ‘텔로스’이다. 대체로 “적격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캘리의 사례(pg.150~151)’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로렌스 대 텍사스 판결’은 샌델이 도덕 판단이 결여된 판례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부작용(오해와 편견)을 야기하는지 날카롭게 판단한 사례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서 말한 ‘절차적 공화국’이 비판되고, 실질적 도덕 판단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과연 우리의 사례는 어떨까? 김도균氏의 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네 가지 판결 사례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 사례, 양심적 병역거부, 군대 내 불온서적 소지 금지 등의 사례가 어떻게 정정되거나 고수되는지는 도덕 판단의 중요성을 우리의 사례로 직접 파악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도균氏는 이러한 장점 외에 샌델의 단점 역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한다며 글을 마친다. 그에 따르면 샌델의 공화주의로는 재화분배, 국제인권, 복지론 등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공동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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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비판 (최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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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앞선 김도균氏의 글, 그리고 후에 언급할 박가분氏의 글과 함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은 다른 것들에 비해 길지만 요는 “샌델은 그리스적 정의관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이 공동선을 도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갔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들에게는 샌델 고유의 한계이자 지적되어야 할 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쿠스의 설전이 실린 플라톤의 <국가> 1권을 예로 들며 최원氏는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이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를 극복하며 등장했다면서 샌델이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호메로스의 관점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라는 관점이 잘못된 점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샌델의 공동선 추구와 고대 그리스의 정의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주장에 흠집을 내진 않는다.) 최원氏의 첫 번째 지적으로 이미 샌델의 주장은 설득력을 조금 잃어버린다.


  그의 두 번째 지적은 샌델이 <정의>에 언급한 도덕적 딜레마의 사례, 앞서 말한 ‘전차문제’이다. 편리를 위해 임의로 나는 선로변경기가 있는 사례를 A라 부르고, 소위 ‘뚱뚱보’가 있는 사례를 B라 부르겠는데, 최원氏는 두 사례 사이에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A는 상황이 강제되어 있으므로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B는 ‘뚱뚱보’가 알아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나’는 보다 능동적이다. 샌델은 수단이 도구(선로변경기)이냐 사람(뚱뚱보)이냐의 차이를 강조했지만 최원氏는 그건 주된 차이가 아니며, 오히려 A와 B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샌델이 주권자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가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차문제의 또 다른 층위에는 ‘대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건 정치형태와도 연결되므로 중요한 문제인데, 최원氏는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과두정과 민주정의 사이, 그러나 민주정에 더 가까운 형태의 통치)와 플라톤(철학왕의 통치)의 차이를 소개하기 위해 긴 설명을 시작한다. (두 철학자가 각각 상이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플라톤은 “누가 지배하는가?”를 중시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화두로 삼았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나, 두 철학자 모두 당대의 ‘계급투쟁’의 문제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꼭 필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는 샌델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고대 그리스에 ‘꽃피었었다는’ 환상을 깨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샌델의 논의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 ‘동일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는 점에서 이 사회의 다양성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혹은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약점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샌델의 주장은 민족국가가 강성했을 때 등장했으니, 대안 공동체(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운명공동체’를 예로 들었으나, 자세히는 모르겠다.)를 생각할 기회는 되겠으나 그 자체를 정답이라 여기면 곤란하다는 것이 최원氏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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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의가 돈이라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한국사회 (박홍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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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글이다. 그는 왜 현대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주 모시듯”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다가 강력한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점들을 하나 둘 공개한다. 비시민계급과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에서 그리스의 자유 포기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결국 그리스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며, 비시민을 제외한 정의는 전체적, 부분적, 또한 분배적 정의일 수도 없으며, 부분적 정의 속에 있는 시정, 분배, 교환 등의 개념에는 모두 ‘등가교환’이 있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고자 한 말은 “돈이 정의이다.”, 즉 ‘화폐만능론’이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 담은 골자들이다.


  얼마나 공격적인지는 이 대목을 옮겨놓으면 될 듯하다.
  “출판 대국이니, 전국민 대졸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느니, 대부분 대학에 철학과가 있다느니 하는데도 그 유명한 디오게네스를 알 수 있는 책 한 권 없다니 너무 디오게네스하다. 너무 개같다. 개판이다.(pg.267)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편에 선 디오게네스와 그를 둘러싼 얄팍한 역사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는 플라톤의 제자에 대한 독설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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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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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태氏는 샌델의 ‘공동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는 ‘타자(他者)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며, 그 해결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를 읽으면서 윤리적 딜레마를 즐기는 잔인한 행태(초법적 주권자가 되어보는 짜릿함이라고 할까?)를 꼬집는다.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pg.277)


  내가 괄호 속에 ‘초법적 주권자’라 적은 것은 노정태氏의 지적인데, 그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인용문을 부득이하게 적어놓아야 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pg.282)


  이 말인즉, 우리는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정의의 딜레마를 보는데, 샌델이 그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든 ‘아프간 사례’에서는 미군의 눈이 중심이 되면 소년을 죽이는 것 ‘따위’는 전혀 딜레마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행위주체가 초법적 주권자로 한정된 샌델의 토론은 노정태氏의 표현대로라면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하는 선택과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이 샌델의 사례실험이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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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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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글은 나에게 상당히 어려워서 두 번에 걸쳐 읽고 이면지에 정리했으나, 위의 글들에 대한 리뷰처럼 나의 생각을 보태 정리할 능력이 나에게 없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내가 그의 글에서 얻은 여러 정보들 중 자의적 판단으로나마 중요하다 여긴 것들을 나름의 생각으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을 갖고 태어난다. 비판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말마따나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pg.292)”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의 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먼저 자유주의는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놓았다. 이걸 도운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종교에서 윤리를 떨어뜨려놓고, 개인에게 위치시켰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주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서동진氏는 윤리가 바로 저 차이의 협곡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사실 이 형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그의 글에 없다.) 이렇게 형성된 정의의 윤리는 자유주의가 물질화시킨다. 자유주의자들은 논증을 통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궁극적인 낙관주의를 모토로 활동했다. 이어진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리콜’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 ‘리콜’될 수 있을까? 서동진氏가 윤리적 규범의 실현이라는 ‘리콜’로 예로 든 대표적인 것은 ‘감사(audit)’이다. 회계감사할 때의 그 감사. 이것이 전지구적 규범이 되어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는 회사이든 정부이든 NGO이든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일반적 원리’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바로 이 ‘감사’가 갖고 있는 투명성에 있다.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역사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회국가(복지국가)가 주권적 개인의 집단인 ‘연대’의 윤리를 통해 자유주의를 재구성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공격했고, 이번에는 신자유주의가 앞서 말한 ‘감사’를 새로운 윤리의 카드로 내세운다. (이 ‘감사’에는 ‘책무성’의 척도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회계와 밀접하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정의의 윤리를 넘어서려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밖에 없다고 서동진氏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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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주주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단호하게 정의의 편에 설 것인가! (박가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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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밝혔듯이 나는 이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지적한 유일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중립적이기에 누구의 정의도 될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 무력(알랭 바디우의 주장, 참고로 박가분氏는 그의 블로그에 적은 바처럼 바디우를 가장 존경한다.)하다는 것, 제도가 아니라는 것, 근대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 재차 강조된다. 그리고 결정타, “대중을 분노케 하지 않는 정치”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스피노자의 인용문에서 독자들은 ‘민주주의’라는 풍선을 펑 터뜨리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자본주의와의 연동인데, 사실 연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등장과 함께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가분氏는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지역은 민주주의를 재난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종합해보면 반(反)민주주의적 정서는 반(反)화폐경제의 정서와 맥락이 같다.


  이 지점에서 박가분氏는 계급에 대해 묻는데, 그 근거는 근대정치의 두 기본틀이 민주주의와 계급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매우 신선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의 대신 민주주의를 물어봤던 것은 계급을 말하거나 사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혹 정의가 질문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수준은 ‘고상한 담론’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급적 조건 속에서야말로 ‘정의’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물음들이 비로소 그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p.326)


  박가분氏는 정의가 플라톤의 말마따나 때론 ‘문답무용(問答無用)’의 강력한 특징을 지닌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정의 자신을 둘러싼 논쟁들에게 붙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정의는 민주주의와 ‘경쟁’해야 할 처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선택지를 눈앞에 둔 셈이다. 민주주의와 정의 중 ‘알맞은 것’을 선택하시오.


  샌델은 민주주의를 <정의>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에게 신선했던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정의만을 말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그러나 <정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정의가 실체(그는 그것을 ‘날것’이라 표현했는데)를 드러내면 그것은 계급적 분노와 테러리즘의 형태일 것이며, 공동체는 그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박가분氏는 조심스럽게 샌델의 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 살짝 불러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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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이상의 논의들을 하루 만에 소화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고, 사실 이 리뷰도 순전한 나의 공부를 목적으로, 그리고 소화제 역할을 하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 것이었다. <정의>를 둘러싼 텍스트들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비평계의 기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조만간 여러 책들을 곁들여 읽을 생각에 급한 대로 리뷰와 그에 대한 나의 짤막한 생각들을 적어봤다.


  마지막 글로 이권우氏의 독서문화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 앞선 글들과는 다르며, 마무리하는 글로 적당한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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