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 채만식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1
채만식 지음, 이주형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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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가 우리나라에서 ‘미술특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적이 있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사이먼 특유의 명쾌하면서도 감성적인 해설을 본 사람들은 근래 보기 드문 ‘미술비평의 수작’이 출현했음을 반가워했을 것이다.


  나는 마크 로스코 편을 유독 기억한다. 그 편에서 사이먼은 초두부터 이런 질문을 툭 던져놓는다. 누군가는 그걸 우문이라고도 하겠다.

 

  “예술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사이먼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아니다. 반대로 생각해본다. 혹시 우리가 그런 질문을 보통에는 쉽게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가 예술의 등받이에 올라 세상을 한 바퀴 휘 둘러볼 때면 그 크기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본래 인간이 그 크기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거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곁에 두고도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예술을 대할 때에는 그것으로부터 받는 느낌이라도 간소하게나마 정리해야 나중에 가서 저런 질문을 받았을 경우 자신의 사변을 미지의 호수에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하루 한 번 딱 보고 마는 것도 어리석인 짓이겠거니와. 그렇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묻고자 했다. <태평천하>. 말만 그러한 제목. 실은 빈껍데기일 뿐인 저 제목. 채만식(蔡萬植)의 이 소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문학이 전쟁을 끝냈다는 이야기는, 나는 듣지 못했다. 혹 수소문하여 누군가에게 소식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비근한 사례가 아닐 것임을 거의 확신한다. 새삼 흔히들 드는 명언이지만 - 누가 그랬더라? -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했더니, 웬걸 우리의 식민지 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종결되었을 뿐, 내로라하는 문사들의 연재소설들은 시대를 바꾸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그걸 “읽은 사람”이 제대로 된 생각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서 통속소설이 그렇게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대의 카프도 실패하고, 도대체 무엇이 이 땅에서 문학의 후임이 되겠느냐 했었을 때, 채만식의 <태평천하>로 대표되는 그것이 득세했으니, 그것이 바로 풍자소설이다. 풍자는 소살(笑殺), 말 그대로 “웃고 마는 것”이다. 그냥 만다. 그러고 만다. 이 땅에는 윤직원 영감 같은 이들이 수두룩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리얼리티는 그래서 쓴 맛이 난다. 지금 우리가 읽기에도 그러한데, 그걸 쓴 채만식의 속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기막힌 표현이 많아 웃고 또 웃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뭔가 자윌 해보자면 나는 채만식이 말하고자 한 바를 꼭꼭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버스에서, 강의실에서, 침대에서 나는 - 옛 어휘들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마는 - 돈 한 푼 아끼려는 만석꾼 윤직원 영감 흉내도 내가면서, 종수 흉내도 내가면서 도박하는 양 어투도 조금씩 바꿔가면서, 태식이 따라 천치인 듯도 해보고, 그걸 쥐어박고 싶은 경손이도 흉내내보고, 하여튼 요리조리 돌려가며 재밌게도 읽었던 것이다. 그 때에 이런 소설을 - 도대체 ‘그 때’가 뭔지 나는 당최 모르겠지만 - 쓴 채만식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서 오고가는 실랑이나 천태만상의 하나하나가 귀여워도 보이고, 사람더러 셰퍼드 같다고 한 구절도 그렇고, 혹은 서울아씨와 대복이 사이의 그렇고 그런 감정을 보고 “호르몬 분비의 명령인 한 개의 커다란 필연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던 것”이라 꾸민 구절도 그렇고, 속속들이 이 소설에는 재미가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었다.


  다 못난 사람들이다. “저게 가족인가?” 싶기도 하면서 슬며시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것이 저 꼴이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 한 것은, 한편으로는 저런 집이 한 두 가옥이었겠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강점기의 급변하는 사상이나 환경 속에서 거의 파탄날 지경에 이르렀을, 그렇다, 그때 생각해보면 살짝 그걸 비꼬아놓은 채만식의 솜씨에서 애긍한 감이 올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수부귀다남자’라 하면 뭘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말이다.


  종학이가 사회주의에, 윤직원 영감이 부랑당패라고 맹비난하며 오히려 강력한 일본제국을 칭찬하게 된 그 배경인 사회주의에 빠져 갑작스럽게 소설은 이 노인네의 울부짖음으로 끝맺는다. 그의 절규는 사뭇 복합적이다. 뜻을 헤아리면서 읽다보면 그 어떤 구절들보다도 독자의 미간에 긴장을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나는 느꼈다.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고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윤직원 영감의 발광이다. 종학에게 줄 돈은 사라지고, 이 손자는 삽시간에 ‘죽일 놈’이 된다. 가솔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영감은 퇴장했어도 몸 둘 바를 모른다. 나라든 가솔이든, 그걸 말아먹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그런 바로는 진시황이 윤직원 영감보다는 행복하다는 채만식의 평에서는 망해가는 역사가 보인다. 망국(亡國)을 하여도 망가(亡家)는 하지 않겠노라고 돈을 붙잡고 고집부리는 저 만석꾼도 그렇고, 그 밑 사람들도 도통 시대의식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다 망했다.


  채만식은 독자들을 웃기고, 그 웃음은 독자들을 달래어준다. 한판 크게 웃고 나면 뭔가 살아갈 힘이라도 나는 것이 이치인 것을, 그러나 아홉 달 간 《조광》에 연재된 이 소설이 풍자한 세계의 그 사람들은 조금씩이라도 움돋았을 그 힘을 어떻게 쓰고자 했을까. 이렇게 묻는다. “보소, 당신 잘못 살고 있소. 거 망해가는 꼬라지의 땅에서 그렇게 히히 헤헤 웃고 있으면 하늘에서 태평천하라도 떨어진단 말이오?” 그러나 웃을 뿐, 답이 없다. 이런 시대의 탈출구는 문학이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문학의 힘은 얼마나 클까? 우리의 인생을 바꾸거나,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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