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6

 

 

  방학의 마지막 주이다. 조용히 빈둥거린 시간 위로 열일곱 권의 선명한 자국이 보인다. 조금 더 부지런했어야 했다. 여성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 돌이켜보며 많이 반성하고 있다. 내심 서른 권은 읽지 않겠나 싶었는데, 절반만 겨우 넘겼다. 양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소 주장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여분과 여력이 느껴진 탓일 것이다.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새삼 질투와 경외심 섞인 감탄을 보낸다.

 

 


1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성향은 ‘근본적’인 것으로 굳어가는 듯하다. 지금의 나, 혹은 우리의 삶을 비판할 수 있는 거리까지 책이 나를 밀어낸다. 그것은 강제적인 힘이다. 그래서 밀려나는 나는 아파할 수밖에,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슬퍼할 수밖에 없다.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 적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거리까지 밀려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덜 밀려난 것 같은 허무에 빠지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런 책들을 읽고 소위 ‘힐링’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더 아파졌다고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한 저항력도 없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제시하여 그곳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저 궁극의 노스탤지어들이 정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치유가 ‘일시적인 완화’나 ‘순간적인 무통증’을 일컫는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걸 ‘완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진 않는가?


  여기, 나를 더 아프게 한 세 권의 책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읽었으나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한 작품인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셋 모두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나와 같은 부류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들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도 견디기 힘들다. 그것은 중력의 원리에 대해 말해준다. 우리가 있는 힘껏 지상으로부터 뛰어 올랐을 때, 그 때가 나는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무렵부터 우리는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도 ‘상실된 세계’가 온전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오랜 시간을 재구성해보면 지금의 우리가 확실히 떨어지는 중이라는 걸,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입증할 진리들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발견되었다.


  문제는 그걸 거부한다는 것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추진력을 덧대어주는 것들은 많다. 떨어지는 우리들에게 다시 ‘상승감’을 느끼게 해줘서 실존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 같은 여러 도구적 대상들은 많다. 그걸 쓸 것인지, 안 쓸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지만 어쩌면 몫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의무인 것도 같다. 우리는 어디까지 날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 세 권의 책 모두 이러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2

 

  칼비노를 알게 된 것으로 나는 “정신적 고향을 찾았다.”고 선언해도 될까? 아직 구비하지 못한 그의 책들이 있으니, 예전도 그렇게 말했었지만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를 읽으면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건설해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여러 면에서 그를 내 안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작품도, 글도, 인물도.


  앞으로 그의 책들을 더 찾아 읽을 것이지만 우선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완독했다는 나름의 자부심으로 그를 정의해보자면, 칼비노는 나에게 “위대한 스토리텔러”가 갖추고 있는 여러 장점들에 대해 알려준 작가이다.


  그는 거의 뜸들이지 않고 독자들을 자신의 환상적인 세계에 끌고 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그의 ‘판타지’에는 터프한 면이 있다. 그러나 터프한 사람들에게 으레 가질 수 있는 편견과는 달리 칼비노는 매우 섬세하다. 유년 시절 자연과 함께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묘사력은 그가 풍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물론 인물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그려낼 때에도 그의 위력은 여전히 실감할 수 있다. 때문에 나에게 칼비노는 일종의 ‘양성적인 작가’로 기억된다. 아니면 창과 방패를 고루 잘 쓰는 소위 ‘밸런스 잡힌’ 라틴계 글래디에이터의 느낌이랄까?

 

 

 


 

 

 

 

 

 

 

 

 

 

 

 

 

 

  재밌기만 했으면 그는 세계적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에서, 그러니까 그가 20대 후반부터 30대를 보내며 연이어 쓴 세 개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 칼비노는 줄곧 ‘인간성’에 질문을 던진다. 선악(善惡), 자연과의 조화, 사랑, 실존, 생의 열정 등.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모든 작가들이 이런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고 그들 나름대로 펜을 들었겠지만 칼비노는 무게감 있는 내용을 품었으면서도 독자들을 끝내 자신의 환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썼고, 유독 특이한 작가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일상으로 돌아와도 질문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저력을 한 번 더 느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주 거짓말 같은 이야기.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그의 세계가 우리를 현실과 더 먼 곳까지 데려다주면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년 안에 나는 그의 전작을 다 섭렵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읽으면서는 나름 그를 분석도 해볼 것이고, 그의 세계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입체적으로 해부해보면서 내가 그의 전략을 나의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도 고민해볼 것이다. 이 모든 작업에 한참 앞서, 나는 설렌다. 그만큼 그를 나의 서재 맨 앞에 모셔둘 생각이다.

 

 


3

 

  최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고 있다. ‘종교경전 읽기’라는 나만의 장기 프로젝트이다. 바가바드기타, 꾸란, 성경 등을 마련해 읽을 것인데, 대략 10년을 잡고 있다. 30대가 저물어가는 즈음에는 하나의 큰 이해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진화론과 SETI를 지지하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남다르다. 신앙인들과 과학지상주의자들은 나의 목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생채기와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예컨대 우파니샤드는 첫 대목부터 나에게 충격을 줬다.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한다는 아뜨만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면지에 “과학적으로 풀어 쓰자면 ‘모든 곳에서의 동시적 존재성’이 될 것인데, 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장자를 배운 기억이 있어 무문무독(無門無毒)과, 그러니까 무경계의 경지와 동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내가 실로 아뜨만과 무문무독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했다.)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집요한 탐구 속에 들어있는 고통의 입자들에게만 화학적 결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나 행동으로는 저들의 경지를 보다 쉽게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욕심도 사실 있다. 진리는 책에 없다는 ‘불교식 진리’가 맞는 것도 같은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경전이라는 것이 대중들을 위해 일찍이 편찬된 것이기도 할 테고.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자에 새겨진 진리가 이미 달아난 후라고들 하지 않는가. 장기 프로젝트의 끝에 가면 “이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서의 본질이 백이면 백 다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  본다. 주머니에 넣은 것보다 못 넣은 것이 더 많은 행위가 바로 독서이다. 그래서 더 많이 넣어보려고 욕심도 부려보고, 실패를 통해 한계를 알고, 경계를 확장시키고, 그렇게 세계의 전체와, 혹은 근원과 계속 닿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이 독서이다.

 

 


4

 

  이번 학기의 독서목록도 나름 정해봤다. 늘 그렇듯 이런 목록도 ‘지켜지지 못할 계획’ 정도가 되겠지만 시작은 기세 좋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사실 벌써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 중앙아시아 작가로는 처음 만난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다시 읽게 된 보흐밀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그리고 에세이인 로렌 아이슬리의 『광대한 여행』, 이렇게 다섯 작품을 골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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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2-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된 세계를 재구성'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열입곱 발자국, 아주 선명히 찍으신 것 같은데요. 권수가 중요한게 아니니까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우선 담아갑니다.

탕기 2013-02-26 12:05   좋아요 0 | URL
hnine님께서 읽고 계신다는 책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바우만의 책은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고 쓰신 글, 나중에 읽으러 가겠습니다 :)

2013-02-2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