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5
누군가가 왜 이 블로그에 오래도록 글이 올라오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 나도 그녀가 묻기 전까지는 사실 그렇게 오래도록 내가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몇 주는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제 곧 네 달째가 되어가니 그 도중에 아마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세를 가다듬고 글을 쓰는 버릇이 생긴 지 십 수 년이 되는 지금까지 이런 긴 '공백'은 꽤 있었던 것 같다.
방학 때보다 책을 덜 읽긴 했지만 문장을 탐하고 세계를 경외하며 나의 '작음'을 생각하는 일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확실히 '내가 뱉어내는 나'는 줄었다. 아니, 없었다고 해야 옳다. 혀 끝까지 나와 발음을 하려던 말이 다물어버린 입에 막혀 버리는 것처럼, 나는 A4용지 몇 장이 되는 글을 쓰고 삭제하는 일을 반복했다. 예전에는 자만과 싸워 이겨야 하는 힘든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능히 할 수 있게 됐다. 글이 긴 만큼, 그리고 특히 자신이 생각해도 서두가 매력적인 만큼 글을 지우는 건 힘들다. 그러나 죽여야 할 글은 죽여야 한다. 정 살려두고 싶다면 (그리고 글로 뱉어진 '수많은 나'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오직 자신만이 기억하는 은밀한 곳에 넣어둬야 하고.
게으름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한 번에 많은 글을 읽거나 쓰는 작업을 오래도록 하지 않고 있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정력적으로 읽고 쓰기를 반복하던 무렵, 갑자기 작가와 글이 하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는 직감이 드는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은 일절 적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날이 더워 정 책이 읽히지 않는 때는 비밀 블로그에 그 책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는 일을 했다. 이렇게 읽는 양이 줄고, 쓰는 양이 없어지면 아주 짧은 문장 하나에서도 놀라운 생명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생명을 나의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런 유희를 하다 보면 그 짧은 문장이 여태 읽은 책 몇 권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모습이 보인다. 그 문장이 어느 사상, 다른 문장, 그리고 짧은 단어에 부딪히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책을 적게 읽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내뱉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물론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핫아이템'은 (아무래도 난 이 '아이템'을 좀 더 발랄하게 소개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버리기'이다. 서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숨 막히는 물 속에서, 책 '버리기'는 그 공간을 물이 아닌 '내 방'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자기암시이다. 요컨대, 책을 조금 읽다가 영 아니겠으면 바로 덮어버리는 행위는 책과 세계의 압박으로부터 나를 다시 책 읽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세계와 역사를 경외의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있지만 그런 인격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장서가들도 이런 동병상련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압박은 의무감을 만든다.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국 어려워도 다시금 펴든다. 오해가 생기고, 책의 의미가 내 안에서 심각하게 변질되기도 한다. 이런 게 물론 독서생활에 있어 피치 못할 실패이긴 하나, 그런 실패는 아무래도 줄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책을 버리는 것이다.
강신주가 지승호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략)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예요. 짜장면 먹기로 했으면 짜장면만 먹어야죠. 괜히 스테이크도 같이 먹지 말고. 관조적으로 보면 다 먹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안 그래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실천은 어느 때가 가장 효과적일지 결정해야 해요."(강신주, 지승호,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中)
예컨대, (일전에 밝힌 적이 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 시인을 꿈꾸며, 혹은 시인 겸 소설가를 꿈꾸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걸작들을 독파하겠다고 벼렸었다. 가장 참담한 실패는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읽다가 1권에서 포기한 것이었다. 내용이 길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고등학생의 '세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는 "세계는 더 넓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지만 이때의 "넓다."라는 형용사는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 막연한, 그리고 뼈저린 경험일 뿐이다. 이것은 항간의 말처럼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는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대학생 때부터 드는 것이 보통일 것인데, 이때부터는 위와 같은 실패는 알아서 줄이는 것이 좋다. 강신주가 한 위의 말 뒤에는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여러 여자 만나는 것보다는 "아, 지금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으레들 그렇게 말하고, 특히 연예인들이 자신의 연애담을 밝히며 여러 이성을 만나야 결혼 잘 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실 강신주의 말은 아주 지당하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여기는 때는 존재한다. 가능성이 낮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에 있어서 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아, 지금 이 책이다."라는 감을 항상 유지하는 법이다. 말인즉, 지금 자신이 어떤 분야, 사상, 감성 혹은 작가를 원하는지 수시로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신주가 말한, "나의 삶과 어떻게 같이 갈 거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독서 방법이라는 것은,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버리고, "이거다." 싶으면 펼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 마음대로 읽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상하관계로 세상을 이해할 때에, 그것은 나의 패배에 대한 뼈저린 증거품처럼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기적인 세상을 이해한 뒤부터 그 책은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실존한다. "내가 왜 세상을 다 이해해야만 하는가?"라며 시니컬하게, 또 버릇없이 물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듯 저것도 존재한다는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책을 사기 위해 여러 블로거들의 리뷰를 산책하러 다니곤 하는데, 그들이 펼치는 지식싸움, 아니면 자신의 서지학 수준을 뽐내기라도 하듯 줄줄이 늘여놓는 '모를 말'들,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 그들이 자신들만의 자와 연필로 그어놓은 잣대들을 보게 된다. (옛날의 나는 그들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읽다 보면 분명 책을 한 두 번 가볍게 읽은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은 책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게 된다.
좋은 작가가 있듯, 좋은 독자가 있다. 좋은 작가가 갖춰야 하는 역량이 좋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요구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작가가 좋은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 역(逆)은, 즉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아니다."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이지 않아도 독자는 세계에 대한, 작가에 대한, 그리고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 즉 태도의 변화로 수준 높은 인식과 건강한 인격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런 독자들은 타인의 추천, 화려한 인터넷 광고, 항간의 소문 따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건조된 거대한 배를 만들어 대양을 유랑할 수 있다. 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좌초시켜 어느 외딴 섬에서 다시 새로운 배를 건조할 수 있을 것이다.
4개월 간 좌초됐던, 좌초됐는지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나의 배는 지금 이 글의 밑에 깔려 있고, 나는 새로운 배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이 글은 이전을 추억하고 반성하는, 그리고 배를 만들 목재를 모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그것들이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는지, 타인에게는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나의 서랍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나의 잣대를 함부로 세상에 들이밀기 위해 휘두른 칼질로, 나의 서랍 벽 이곳저곳에 흠이 가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론 흠이 없는 때는 없다. 그것이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서랍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나'의 실존 그 자체이므로. 읽고 쓰고, 버리고 멈추는 나의 긴 호흡은 세계 위로 올라가려는 어린 나를 끌어내리는 힘겨운 작업이다. 아무 말 하지 않기에 더욱 힘들다. 침묵. 누군가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입다물게 하는 것.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중략)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中)
이 글로 침묵은 깨졌다. 하고픈 말이 많을 때, 그때가 입 다물고 있는 시기라고 하더라도, 막상 깨진 침묵은 "너는 하고자 하는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라고 나를 깨우쳐 준다. 이건 매우 슬픈 순간이며, 동시에 매우 기쁜 순간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긴 침묵을 염두에 두며, 나는 침묵의 저편으로, 새로운 배의 밑으로 사라질 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타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이 순간이, 나에게는 선언이 된 것 같다. 누구든 그렇다. 스스로에게 외치는 때가 있다. 그 순간, 침묵은 깨지는 것이다.